"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말 1:2,3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당신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에서와 야곱의 예를 동원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는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성경의 어디에도 하나님의 편애에 대해 시원하게 설명한 곳을 찾을 수 없다. 이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느낌을 어쩌지 못한다. 더구나 야곱은 아무리 보아도 에서에 비해 예쁘게 보아 줄 곳이 없다. 오히려 얄밉기까지 하다. 그에 비하면 에서는 좀 단순하긴 하지만 체구도 성격도 남자답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선 우리 보기에 이렇다 할 뚜렷한 이유없이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다. 공정하신 하나님이 그래도 되는 건가? 이 문제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그런 공정치 못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실 수 없다는 반응이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를 인도주의자내지 박애주의자로 여기는 사람들이고 정의감에 넘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에서의 입장에서 동정내지 옹호하려 든다. 자신을 혹 야곱의 입장에 둔 사람들의 경우 자신이 편애를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미안해 한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선택구원설에 부담을 느낀다.
둘째는, 공정하신 하나님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편애를 하실 리 없다는 반응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타당한 이유를 찾으려 노력한다. 때론 그 노력이 지나쳐 억지스런 이유를 갖다 대기도 한다. 그들은 대게 자신이 구원받을만 하여 구원받았다 여기고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만인구원설에 동조하지 않는다.
나는 두 반응을 차례로 거쳤다. 그리고 이제 또다른 반응을 한다. 그것은, 나를 야곱의 입장에 놓고 무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아무리 스스로를 들여다 보아도 에서보다 나은 구석이 없는 나를,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참다운 인간으로, 사내로 만들어 주시는 그 은혜에 그저 감사를 드릴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으로 하나님의 공정함을 변호하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불필요할뿐더러 가능치도 않은 일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변호할 능력이 없으시겠는가? 우리의 변호력이 하나님보다 뛰어나겠는가?
그 누가 하나님의 공정을 잴 수 있는가? 공정의 기준은 하나님인 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공정한 것이고 선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 눈에 어떻게 비취든 상관없이. 더러는--아니 어쩌면 많은 경우에--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을 경우가 많으나, 우리는 그 분의 행위와 그 분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건방지고 교만한, 우리를 하나님보다 높이는 짓이다.
아니 어떻게 그러실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하시면 안되죠. 하나님, 실수 하시는 겁니다. 감히 하나님께 이런 훈수를 두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보다 한 수 위라는 태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왜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는가는 중요치 않다. 그러셨고 또 그러실 권한이 있으신 분이란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권한으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나는 더 이상 왜 나를 사랑하시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나같은 사람을 사랑해 주심을 감사드릴 뿐이다.
3.20.2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