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코드로 주변이 온통 수선스럽다. 기독교계의 우려가 이해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 반응은 우려의 수준이 아니라 가히 공황(Panic)에 가깝다. 마치 그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본 사람은 그 즉시 혹은 얼마 후에 혹은 기필코 반기독교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를 쓰고 막으려 하는 듯하다. 만일 정말 그럴진대, 막는다고 막아질 것인가?
만약 다빈치 코드가 소설이 아니라 학술 논문이란다면, 우리는 그것의 오류를 하나 하나 반박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하지만 소설을 놓고 그것이 맞네 틀렸네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신성시되는 사안을 멋대로 다룬 것에 불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끼리메만 해당되는 것이지, 애당초 그것을 신성시 하지 않는 불신자들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다. 예수에 대해 불신자가 어떻게 상상하고 어떤 이야기를 지어내든 그것은 교계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상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있고 그것은 존중되어져야 한다.
도대체가 이것은 격분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그러한 반응이 오히려 상대가 격분할 일이지 싶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아 재미로 지어낸 얘기일 뿐인데 뭘 그리 길길이 날뛰냐 한다면 뭐라 대답할 것인가?
진리를 보지 못함을 가슴아파 하면 했지 화를 낼 일이 결코 아니다. 어찌 보면 그 소설의 성공은 기독교계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관심의 환기이다. 무엇이 참일까는 궁금증이 그 소설과 영화를 읽고 보는 자들의 맘 속에 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 믿음이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성경 말씀을 토대한 믿음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말에 토대한 믿음인가? 한 소설가의 상상에 의해 흔들릴 정도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기껏해야 꽤 재미있는 소설로 영화로만 기억될 것을, 과도한 반응으로 반기독교의 교본 정도로 격상시켜준 꼴이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변호할 능력이 없어 그냥 내버려 두고 계시겠는가? 다 생각이 있으니까 내버려 두고 계시겠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다빈치 코드는 흥미 만점의 소설이요 영화일 뿐이다. 더 이상 우리 스스로를 우습게 만들지 말자. 그저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공부하자. 진리는 오직 성경 속에 담겨 있을 뿐이다.
5. 22.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