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인 기도 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품목 중 하나는 “성령충만”일 것이다. 그렇게 자주 그 말이 사용되다 보니 그 말은 아주 친숙해져, 모두가 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듯이 여기고 있는데 꽤 오래 전부터,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성령충만을 달라 기도할 때, 그것을 구하는 자의 머리 속엔 어떤 그림이 있는가? 그것을 무엇이라 여기기에 그것을 달라 저마다 기도하는가? 도대체 왜, 무슨 심산으로 그것을 구하는가? 혹시 그것이 무언지도 잘 모르면서 남들이 구하니까 덩달아 구하는 것은 아닌가? 그래야 믿음이 있어 보이고, 또 성령충만이란 것을 받으면 뭔가 신통하고 영험한 영력이 생길 것이라 여기고 있지나 않은가? 아니면 아예 받은 후에 대해선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달라 하는 것인가? 성령 충만을 구하는 이유가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성령의 능력 때문은 아닌가?
“성령충만을 주시옵소서”란 말은 실은, “성령으로 나를 충만히 채워 주시옵소서”란 말이다. 성도는 반드시 이 기도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성품이 가꾸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사도 바울은 그렇게 에베소 교회에 명령하고 있다. 이 말은 술로 자신을 채우지 말고 성령으로 채우라는 권고이다. 다른 말로 술의 이끌림을 받지 말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라는 말이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나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경험이나 지식이나 주장에 의한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내 뜻과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한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삶을 살라는 주문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자들의 행동과 삶을 살펴 보자. 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난 천사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예언했고 (눅 1:13-16)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성령이 충만하여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아이가 메시야임을 노래했으며 (눅 1:41-55) 사갸랴는 자기 아들 요한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눅 1:67-79) 그리고 잘 알다시피 예수께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광야에서 사십일 간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치루어 내셨다. 오순절 날 열 두 사도들은 각 나라 방언으로 복음을 선포했고 스데반을 비롯한 일곱 집사들은 교회의 구제 업무를 맡아 처리했으며, 스데반은 메시야인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를 고발하고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그밖에 사도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 모두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고난의 길을 걸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왜 사도는 그런 권고를 주는가? 그 권고 앞 4장 22절부터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면서,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 할 여러 가지 삶의 행동들을 요구하고 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참되게 살고 탐욕을 버리고 주의 뜻을 분변하며 지혜롭게 살기 위해선 성령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내속에 성령이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오직 주의 말씀을 전하고 주의 뜻대로 살아 내기 위한 것이어야지 내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거나 내 자신의 유익을 구할 목적이어선 안 된다. 그 기도는 내가 죄에 대하여 죽고 오직 하나님께 대하여만 살겠노라는 결단이며, 내 이웃의 허물을 참고 또 참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그럼에도 그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겠다는 다짐이며, 사도 바울처럼 예수께서 가신 그 길을 십자가 지고 갈 각오가 되었노라는 충성의 서약이다. 그 결단, 그 다짐, 그 서약이 진실된 것인가? 성령충만을 달라는 기도에 앞서 우리는 먼저 그것을 점검해야 할 것이다.
2008. 4.18
참 성령충만은
자기 자신이 드러남
특히 다른 이와 비교하여 특출하게 두드러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흔히 상상하는 '성령충만'의 개념을 되짚어야 할 것입니다.
바른 인식에 이르도록 경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