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서울의 한 청년의 질문에 박 목사님께서 두 번에 걸쳐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답변에 참고로 몇 말씀 보태려 하다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이렇게 따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신관부터 다른 종교입니다. 회교의 신은 인간을 고해에서 건져낼 수 있는 능력은 있으나 그럴 의사가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 밖에 초월해 존재할뿐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너희들 문제는 너희들끼리 해결하라는 방관자세를 취합니다. 인간은 선행을 통하여 또는 알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써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런 신관을 이신론(理神論, Deism)적 신관이라고 합니다.
한편 불교나 힌두교, 그리고 뉴에이지 영성운동을 좇는 무리들은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적 신관을 따릅니다. 이 세상이 곧 신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심지어 돌멩이에까지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봅니다. 무속신앙 역시 이 범주에 듭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각자에게 깃들인 신성을 잘 갈고 닦으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이 또한 자력구원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신관에 따르면 신은 이 세계에 국한되어 있으므로 결코 인간을 이 세상의 고해에서 건져낼 수가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들에 비해 유신론(有神論, Theism)적 신관의 기독교의 신은 이 세상밖에 거하시는 초월자시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 세상에 지대한 관심과 극진한 사랑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할 능력도 있으시고 (범신론과 대비됩니다) 우리를 구할 의지도 있으십니다 (이신론과 대비됩니다). 유독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신관의 차이 때문입니다. 초월해 계신 신(하나님)이 세상 안으로 들어 오셔서 인간으로 살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알려 주시고 구원을 약속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영생에의 길을 보여 주신 후 그 사실을 믿는 인간들을 구원해 가고 계십니다. 구원에 있어 인간이 할 일은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 가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타종교의 신은 구원해 줄 능력이 없거나 구원해 줄 의사가 없기에 인간은 스스로를 구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선행으로 또는 신을 위해 죽음으로써 (또는 우주의 본질에 접속함으로써)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고 믿지만, 인간은 그 어떤 노력으로도 선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들 종교의 신관은 역설적으로 인본주의를 결과하게 됩니다. 구원의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을 만하고 아니고를 신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결정짓게 됩니다. 결국 서로 잘났다 서로 옳다 싸우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힘센 자가 이기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상이며 절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는 상대주의적 주관적 세계관을 따를 도리밖에 없습니다. 절대적 기준이 없기에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본주의는 기독교의 신본주의와 정면 대치합니다. 인본주의가 무엇입니까? 사람인 내가 세상의 중심입니다. 내가 모든 일에—심지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결정권자입니다. 신조차 내 계획과 욕심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필요할 뿐입니다. 프로이드는 심지어, 인간은 그들의 심리적 필요에 의해 신을 만들어 그에게 인격을 부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세 살 때엔가 유아 영세를 받았고 일고 여덟 살 때부터 엄마 손에 이끌려 성당에서 자랐던 저는 그 주장을 처음 접했던 스물 후반부터 기독교의 신을 부인했으며, 내겐 신 따윈 필요 없다 큰소리치며 살다가, 급기야 불혹의 나이에 들어서면서 뉴 에이지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신이라 여기는 경지로 들어섰습니다. 어느 날, 내가 신이기에 내 소견에 옳으면 그것은 옳은 것이며 내 소견에 악하면 악한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군요. 선과 악을 제가 규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저도 모르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겁니다.) 이때부터 혹시라도 누군가가 전도하러 찾아 오면 그들을 기독교의 미혹에서 깨어나게 하려고 성경의 난해 구절들을 들이대고 말도 안 되는 교리들을 공박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을 깨우치자면 나부터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성경을 읽겠다 작정하기도 했습니다. (그 작정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재미도 없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금방 참을 수 없게 졸음이 쏟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성경책은 수면제 대용으로 썼습니다—지금 생각하니 하나님께서 졸음으로 제 눈을 가려 당신의 말씀을—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셨나 봅니다. 후일 제게 믿음이 생긴 다음엔 성경책만 펼치면 정신이 맑아져 새벽녘에서야 억지로 잠을 청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낙태는 산모 개인의 결정권이라는 Pro-Choice 입장에 섰고, 동성애자들을 옹호했으며, 성적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며 혼전정사는 물론이요 혼외정사까지 개인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행복 추구를 신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기독교는 아주 잘못된 종교이며, 죽은 조상에게 예를 차린다고 제사를 금지하면서 이천 년 전에 죽은 남의 나라의 귀신을 사랑해요 하며 그 귀신을 위해 죽겠다는 기독교인들은 모두 정신 나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구원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이제는 잘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알라 신과 여호와 하나님이 동일한 신이라는 세간의 주장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그 둘은 전혀 다른 신입니다. 모든 신은 각 시대와 민족과 문화에 따라 다른 모습과 다른 이름으로 인지되었을 뿐 실은 하나의 신이란 주장도 그럴듯하게 들리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왜 모습과 이름을 굳이 달리 하셔야 하는지요? 백 보 양보하여 그럴 수 있다 해도, 왜 그 가르침이 일관되지 않고 다릅니까? 신의 됨됨이가 왜 다 다릅니까? 그 존재 양태가 왜 다릅니까? 답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각기 다른 신이기 때문이라는. 그럼에도 왜 그들의 신이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구원의 능력과 극진한 사랑을 그들도 부러워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왜 기를 쓰고 그렇게 다름을 주장합니까? 그들의 종교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그들이 안쓰러워서 그럽니다. 우리만 옳다는 독선의식에서가 결단코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팎을 통틀어 단 한 분뿐인 만신의 신인 여호와를 우리의 구원자요 하나님이요 아버지로 믿는 복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했습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에, 너희들은 그 믿음이 왜 없느냐 따지고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오직 박진호 목사님이 답변에서 제시한 대로 하나님의 큰 은혜가 그들에게도 임하길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진정한 사랑으로 그들을 섬김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시의 적절하게 복음을 풀어 설명하며 성경으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먼저 받은 큰 은혜에 보답하는 올바른 길이라 믿습니다.
2010년 7월 9일
여기에 사울(가장 큰 자)에서 바울(가장 작은 자)로 바뀐 또 다른 생생한 실례가 있군요.
아니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