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
거수경례와 함께 큰 소리로 외쳐지는 이 말이 많은 한국인, 특히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에겐 어떻게 이해될까? "죽기까지 충성하라" 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의 머리 속엔 어떤 그림이 떠오를까? "까라면 까!" "절대 복종!" "상명하복" 이런 말들이 함께 떠오르지는 않을까? 마음에서 우러난 충(忠)과 성(誠)이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과 신분과 지위 때문에, 불이행에 따르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마지못해, 이를 악물고 외치는 충성이 아닐까? 그들의 충성을 영어로 옮기면 fidelity혹은 loyalty가 무난할 것이다.
그런데 개역/개역개정 한글 성경에서 갈라디아서 5:22절에서 "충성"으로 옮긴 헬라어 πιστις는 영어로는 faith혹은 faithfulness로 번역되어 있다. fidelity가 아니다. 신약에서 227곳에서 사용된 이 말은 대부분 믿음으로 번역되었는데 오직 여기에서만 충성으로 번역되어 있다. 아마도 초기 한글 성경 번역자들이 참고한 중국어 성경이 그렇게 번역하였거나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어 성경엔 信實로 번역되어 있다) 당시의 번역자들이 믿음의 헌신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그렇게 번역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문맥상 믿음직함 혹은 신실함으로 번역되었어야 할 이 말이 (표준 새번역 성경과 우리말 성경에서는 각각 신실, 신실함으로 옮겨져 있다) 충성으로 번역됨에 따라, 오늘날의 신자들은 이 말을 믿음과는 상관없는 막무가내식 복종으로,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아무런 판단도 말고 “충성!”으로 이해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그 말을 일부 못된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목사에게 교회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라는 의미라 가르칠 근거를 제공한 것은 아닌지...
충성은 대상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헌신된 마음과 복종만을 요구할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믿음이 먼저 요구된다. 복종은 그 분에 대한 믿음의 자연스런 결과이지 믿음에 앞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무조건적인 추종을 원치 않으셨다. 냉철하게 앞뒤를 따져본 연후에야 따르라 하셨다. 내가 왜 따라야 하는지 어떤 댓가를 치르고 따라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고 따르라 하셨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께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그 충성은 왜 충성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내키지도 않으면서 “까라면 까!”식의, 바치라니까 바치는 충성은 아니다. 그 충성에 따르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덜컥 뛰어 들었다가 후회와 원망과 불평 속에 마지못해 입으로만 외치는 빈 충성이 아니다. 이 충성은, 그 분이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고 하고 계시고 또 하실 것인지를 명확히 알고, 우리의 충성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믿음 위에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의 지정의를 다해 바쳐지는 것이어야 한다.
2015. 02. 21
아니다, 그 뜻이. 비단 충성으로 번역되었으나 바울이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든 그 말은 목사에게 충성하란 말도 심지어 예수님께 충성하란 말도 아니다. 그 말은 "피스티스 (πιστισ)" 믿음이다. 성경이 말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그런 사람은 믿음직하다. 그 사람이 말하면 틀림없어, 그 사람에게 맡기면 틀림없어란 말을 듣게 하는 신실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