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상7:20-27절에는 12지파 중의 하나인 에브라임 지파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 족보를 보기 쉽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제1족보(20-21a) : 에브라임⇒수델라⇒베렛⇒다핫⇒엘르아다⇒다핫⇒사밧⇒수델라.

  ○ 제2족보(21b-22) : 에브라임⇒에셀과 엘르앗.

  ○ 제3족보(23- 27) : 에브라임⇒브리아⇒레바와 레셉⇒델라⇒다한⇒라단⇒암미훗⇒엘리사마⇒눈⇒여호수아.

  ○ 제4족보(24절) : 에브라임⇒세에라(딸)

● 위에 정리한 에브라임의 족보에는 몇 가지의 의문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세심하게 읽는다면 비교적 쉽게 찾아 낼 수 있는 의문점이라 하겠습니다. 과연 어느 점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지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참고적으로 위의 족보에서 화살표(⇒)는 1세대를 의미합니다. 즉, 에브라임의 1세대 후손은 아들 4명(수델라, 에셀, 엘르앗, 브리아)과 딸 1명(세에라) 등 총 5명이며 그 다음부터는 손자 이후의 후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먼저, 첫 번째 의문입니다. 제2족보와 관계됩니다.

  ○ 21절을 보면, 에브라임의 아들들인 에셀과 엘르앗이 가드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들의 짐승(가축)을 강탈하려다가 가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 21절에 “저가 또”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3인칭 대명사 ‘저’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불분명합니다. 바로 앞에 나오는 ‘수델라’를 지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2절의 “그 아비 에브라임”과 연계한다면, ‘저’는 ‘에브라임’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문제는 바로 이점에서 시작됩니다. 이 강도짓과 피살 사건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 우선 이 시기가 어느 때일까요? 성경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애매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슬기롭게 활용한다면 개략적인 시기 정도는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브라임은 야곱의 손자이며 총리 요셉의 차남입니다. 요셉은 30대 중후반쯤(34-36세 경)에 에브라임을 낳았을 것이며(창41:50) 요셉이 110세로 사망했을 때 에브라임은 약 75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에브라임의 정확한 결혼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요셉의 사망 시기쯤에는 에셀과 엘르앗이 거의 청년기쯤에 이르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이 추정이 부정확하기 때문에 약 10-20년 정도의 오차를 적용해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 따라서 에브라임의 아들들인 에셀과 엘르앗이 가드 사람들에게 죽임 당한 시기는 요셉이 살아있을 동안이었을 수도 있고, 요셉의 사망 후라 하더라도 오랜 기간이 지난 시기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당시는 요셉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시기였습니다. 야곱의 후손 중에서 일부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임의로 드나들며 강도짓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시기였을 것입니다. 애굽 종살이 막바지처럼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했던 시기도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강도짓을 해야 할 만큼 각박함을 추정할 방법이 없다 하겠습니다.

  ○ 또 ‘가드’라는 지명도 짚어 봐야 하는데, 아마도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가나안 5 성읍에 속하는 ‘가드’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약 450여 년 후에 존재했던 ‘가드’가 에브라임 시대부터 존재했었는지 궁금합니다. 21절에 나오는 ‘가드 토인’은 가드의 원주민(native-born men)을 의미하므로, 성경 기록만으로는, 에브라임 시대에 이미 가드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신학자들 중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에 조차 블레셋 족속은 가나안 땅에 이주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주장하기도 하는데(성경 불신 이유 중의 하나), 이 견해를 따른다면 에브라임 생존 당시 ‘가드’라는 성읍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에브라임 아들들의 피살문제는, “①에브라임 당시에 ‘가드’라는 가나안 성읍이 존재할 수 있었는가?, ②아직 요셉의 영향력이 남아있을 시기에 무엇 때문에 가나안 땅까지 원정 강탈을 시도해야만 했느냐?” 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의문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의한 증명이 불가능한 의문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역시 증명될 수 없는 견해이긴 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여기에 나오는 ‘에브라임’이 요셉의 차남이 아닌, 동명이인 후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봅니다. 어느 시기인지는 불명확 하지만 후손 중에 ‘에브라임’이라는 인물이 살았고 그의 아들 2명의 피살 사건을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기자의 일시적인 착각(정확히 말하면 성경의 오류 중의 하나)일 가능성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을 너무 벗어나는 추정이며 당연히 성경에 의한 검증이 불가능한 추론일 것이나 별다른 설명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 두 번째 의문입니다. 제4족보(딸)에 관련된 것입니다.

  ○ 24절을 보면, 에브라임의 딸 세에라가 윗 벧호론과 아랫 벧호론 및 우센세에라 등 3개의 성읍을 세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 먼저 벧호론입니다. 윗 벧호론과 아랫 벧호론은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존재하고 있었고(수16:3,5), 이 성읍은 레위 지파에게 분배되었습니다(수21:2). 그리고 성경사전에 의하면 그 위치는 베냐민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성읍으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12km즘 떨어져 있던 곳으로 보여집니다.  

  ○ 또 우센세에라는 아래 벧호론 남서쪽 5km 지점일 것으로 주장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벧호론 인근의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습니다.

  ○ 여기 나오는 벧호론과 우센세에라라는 성읍들은 분명 가나안 땅에 속했을 것입니다.

  ○ 반면에, 에브라임의 딸 세에라는 분명 애굽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애굽(고센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연약한 여인 1명이 멀리 떨어진 가나안 땅에 가서 3개의 성읍을 건설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단지 명의만 ‘세에라’ 이름으로 부여할 때에나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애굽 정착 초기에 과연 이러한 사건(이스라엘 민족이 집단적으로 가나안 일부 지역을 점령 및 통치하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요?

  ○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세에라가 가나안 족속에게 시집가서 시댁 사람들을 동원하여 성읍을 건설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친 억측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이 문제 또한, 위의 개인적인 추정견해와 같이, 요셉의 차남이 아닌 동명이인 ‘에브라임’의 딸이 가나안 정복시 동족들의 도움을 얻어 3개의 성읍을 건설했다고 보는 것이 더 논리적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역시 성경을 통한 검증은 불가능합니다.  

● 총 결론입니다. 대상7:20-27의 에브라임 족보에는 석연치 않은 의문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성경의 설명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위에서와 같이 추론해 볼 수는 없을까요? 좀 더 논리적인 견해가 있으시면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려 봅니다. ♥

김문수

2006.12.31 13:48:01
*.75.66.116

순태 형님 !!
족보만 등장하면 떨려요 !!!!!!!
너무 신기합니다 !!!!!
어찌하여 ????????????????


창세기 5장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셋은 일백 오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 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 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게난은 칠십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 사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마할랄렐은 육십 오세에 야렛을 낳았고

야렛을 낳은 후 팔백 삼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팔백 구십 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야렛은 일백 육십 이세에 에녹을 낳았고
에녹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육십 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 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족보 소개 이후의 완전한자 노아
창세기 6장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그가하나님과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창세기 11장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아르박삿은 삼십 오세에 셀라를 낳았고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 삼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셀라는 삼십세에 에벨을 낳았고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 삼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에벨은 삼십 사세에 벨렉을 낳았고
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 삼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벨렉은 삼십세에 르우를 낳았고
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 구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르우는 삼십 이세에 스룩을 낳았고

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 칠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스룩은 삼십세에 나홀을 낳았고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나홀은 이십 구세에 데라를 낳았고
데라를 낳은 후에 일백 십구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족보 소개 이후의 믿음의조상 복의 근원 아브라함
창세기 12장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족보 소개 이후의 등장한 다윗왕
역대상11장

온 이스라엘이 헤브론에 모여 다윗을 보고 가로되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전일 곧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가 왕이시었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 여호와께서 사무엘로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
다윗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브스에 이르니 여브스 토인이 거기 거하였더라
여브스 토인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 다윗이 시온산 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족보 소개 이후의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1장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조인구

2007.01.01 11:31:16
*.91.106.118

김문수 형제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의 의미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딤전 1:4]
이 말씀을 풀이하신것같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경륜에 의한 섭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바울도 미리 차단시킨것같습니다.

국중후

2007.01.02 14:09:25
*.147.129.77

김문수형제님글과 조인구형제님글에 아멘입니다.

정순태

2007.01.03 11:35:12
*.75.152.55

형제님들의 충정어린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향한 큰 사랑과 교회를 향한 깊은 신뢰와 지체를 향한 애틋함이 느껴집니다.
공연히 ‘내공고수’라는 평을 듣는 것이 아님을 재확인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부분 아멘!’임을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다소 생각이 다른 면이 있기에, 이 부분을 조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성경을 부정하기 위해 성경의 오류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다만 여태까지의 다른 의문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의문도 제 지식과 능력과 영성으로는 충분한 이해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를 계속 붙여두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공표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모르는 것(이해가 안 되는 것)을 ‘모르겠다.’ 말하고, 저보다 앞선 성도님들의 조언 구하는 것 자체를 심히 나무라시면, 몸 둘 곳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넓으신 이해를…… ^^

#############################################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조금 과소평가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지식적 이해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들만 성경을 연구한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보다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여 알고 있는 비기독교인들이 무척 많습니다.

박 목사님과 친분을 맺는 계기가 되었던 오강남 박사도 기독교 계열의 다원주의자입니다.
그분의 성경지식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 성철 스님도 성경을 무척 많이 읽고 깊이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양대 교수인 민희식 박사 또한 목사 못지않게 성경을 폭넓게 알고 있습니다. 조만간 그의 책에 관하여 독후감 형식으로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기독교 변론에 관심있는 성도님들이라면 다 알고 계시는 이사(Issa) 전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사역에 임하시기 전에 인도와 티벳에서 불교/힌두교/조로아스터교를 섭렵하신 후 기독교를 창시했다는 이론입니다.


우리는 그냥 무조건 성경을 믿기만 하고 가만 있으면 되리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대적들(타종교인 또는 다원주의자)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우는 사자(벧전5:8)처럼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그들의 주공격 방향 중의 하나가 바로 지식적인 측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성경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게 힘들고 어렵다고 포기해서는 안 되며,
특히 변론을 피한다는 잘못된 오해로 인해 우리의 임무를 등한시해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신화와 족보에 얽매여 변론에 발목 잡혀서는 안 되지만
역으로 우리는 지성을 사용하여 단단한 식물을 먹기도 해야 합니다(히5:14).

제가 앞으로 중점적으로 다루기 원하는 부분은, ‘목회자 위상’에 관한 것으로서, 이는 상당한 논쟁을 각오해야 할 주제일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신학을 하게 된다면 논문 제목으로 정 하겠다 생각했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후일 목회자 위상 문제를 다룰 때, 여전히 부담을 느끼는 성도님들이 계신다면, 처음부터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나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시간을 두고 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하지만
아무리 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이곳을 통해 나누어지는 아름답고 귀한 교제만이야 하겠습니까?
또 원 주인이신 박 목사님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 글에 약간의 거부감이라도 느껴지신다면 얼마든지 삭제할 의향이 있습니다.

두 분의 솔직한 의견 알려 주시기 원하며

그래도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샬롬!!!

김문수

2007.01.03 14:10:15
*.91.102.102

순태 형님!!
제가 순태 형님을 얼만큼 좋아하는지는
순태 형님께서도 어느정도 아시죠 !! ㅎㅎㅎ

형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이 무슨뜻인줄 알아요 !!

그런데

우리 골통형제들을 하나님께서
이 사이트로 불러 모으신 이유는
진짜 골통역할을 충실히 해서 {십자가 복음에 미친골통}
천국복음이 아닌 가짜 복음이 판을 치고있는 이 현실속에서
그 가짜복음이 진짜복음이라 믿고있는 분들을
구출해내는 임무를 수행하는일이라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형님께서도 느끼시듯이
작금 현실은 율법에 통달하고 은혜로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던
사도 바울이 율법과 윤리실천에 자부심을갖고 하나님을 진실로
두려워 하지않았던, 택함받았다고 큰소리치던자들앞에서{이해하기 힘들게}
십자가의 도를 전하던 시대와 다를바가 없는 현실속에서
우리가 살고있지 않습니까 !!!!!!!!!!!

형님!!
이 이상한 현실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남아있는 칠천인을위해서
미친자 역할을 할수밖에 없지않습니까!!!!!!
흑흑흑!!!!!!!


형님!!
저는 이 말씀이 정말 무서워요 !!
모든 신자들이 거의 다 알고있는 이 말씀이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사도 바울도 틀림없이
두려워했을것입니다 !!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형님을 진짜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
형님!!
우리한번 확실하게 미쳐버리죠 !!!!! 샬롬!!


허경조

2007.01.04 05:53:14
*.80.180.119

저도 정순태님과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목회자위상과 더불어 초대기독교사와 현재와 같은 교회제도가 언제 생겼으며 어떤 연유로 오늘날과 같이 변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깨닫는 선결사항인것 같습니다.
그런 연후에 어떤 방향으로 개선되는 것이 바람직한지의 여부가 자연스럽게 돌출되리라 생각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1 [단상] 빛과 소금 [5] 정순태 2007-03-03 1521
20 [의문] 하룻밤의 징계?(창12:10-20; 20:1-18) 정순태 2007-02-24 2287
19 [고백] 교사의 고백 - 그 마음 한 조각 [1] 정순태 2007-02-17 1548
18 [묵상] 모세의 위대성(3) [3] 정순태 2007-02-10 2335
17 [고백] 언제쯤 이 주책에서 자유로울꼬? [4] 정순태 2007-02-04 1874
16 [의문] 400세가 넘은 비느하스? 정순태 2007-02-03 2863
15 [묵상] 성도의 죽음 - 하나님의 막심한 손해? [1] 정순태 2007-01-27 2196
14 [단상] 교회 내에서도 읍참마속(泣斬馬謖)이 필요한가? 정순태 2007-01-21 1752
13 [묵상] 천사에 관하여 [2] 정순태 2007-01-20 2978
12 [의문] 제사장과 관련된 몇 가지 의문들 [2] 정순태 2007-01-13 2319
11 [단상] 칭찬만으로는 고래를 춤추게 하지 못한다. [2] 정순태 2007-01-07 1803
10 [단상] 가을 산행 [2] 정순태 2007-01-06 1552
» [의문] 에브라임 족보의 의문점들(대상7:20-27) [6] 정순태 2006-12-31 3374
8 [묵상] 성령충만 상태에서도 상호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가? [3] 정순태 2006-12-24 2063
7 [단상] 교회개혁의 아픈 기억(4) - 촌놈의 수다 [6] 정순태 2006-12-17 2004
6 [단상] 교회개혁의 아픈 기억(3) - 실언과 식언의 차이 [1] 정순태 2006-12-17 1725
5 [단상] 교회개혁의 아픈 기억(2) - 성도의 삶 당당한 삶 [1] 정순태 2006-12-17 1984
4 [단상] 교회개혁의 아픈 기억(1) - 까마귀와 까치 [1] 정순태 2006-12-16 1873
3 [의문] 주님의 사역개시 나이는? [5] 정순태 2006-12-10 2802
2 [묵상] 언약궤와 성막의 생이별 사연 [3] 정순태 2006-12-06 7108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