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행12:1-4(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 쌔 때는 무교절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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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 이라크의 호전적 무장단체에 피랍되었다 무참히 살해당한 고 김선일 씨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온 국민이 분노한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공개된 비디오에 의하면 마지막 순간까지 살고 싶어 한 고인의 몸부림이 우리의 마음을 숙연케 합니다.
◉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은 34세의 젊은이이며 신학을 공부하여 장래 소망을 이라크 선교에 둘 정도로 참 성도인 그는 살아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참담한 상황에서 붙잡을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인 주님을 얼마나 의지했겠습니까? 고인의 절박한 심정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고인의 기도와 그리고 우리 기대와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죽음입니다.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일뿐 아니라 특히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성도이기에 더욱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사건입니다.
◉ 이제 우리는 성도로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참 성도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일찍 그리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고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은근히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솟구칠 수도 있는 사건일 것입니다.
◉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 생각과는 너무 달라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의 한 곳입니다. 어쩌면 고 김선일 씨의 경우와 연계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다를 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는 것이 바른 일입니다. 따라서 고인의 경우도 이 방법으로 조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사도 야고보의 죽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 본문에 나오는 야고보는 누구입니까? 사도 요한의 형제라 했습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 모든 제자들과 사람들을 다 사랑하셨으나, 복음서 곳곳에서 주님과 함께 꾸준히 나오는 제자는 세 사람입니다. 곧 수제자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본문에서 죽임을 당한 야고보는 주님께서 아주 특별히 사랑하신 제자들 중에 포함됩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 다녔습니다. 변화산의 기적에도 동참했던 제자입니다. 주님께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특별하게 양육하셨고 따라서 특별한 임무를 주실 것으로 기대되었던 제자였습니다.
◉ 좀더 오래 살았던 베드로와 요한의 삶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일을 하였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으면서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요한 또한 가장 늦게까지 지상에 남아 있으면서 연애편지보다 더 진솔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우리에게 전해 주었고 계시록을 통해 천국의 일면을 알려주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특별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에게 걸맞은 그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같은 3명의 애제자에 속했던 야고보는 어떠했습니까?
◉ 오늘 본문에 보니 일찍 죽었습니다. 그것도 허무하게 말입니다.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이 말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하나님께 영광이 될만한 내용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스데반 집사처럼 유창한 설교 한번 못했습니다. 빌립 집사처럼 복음도 전해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죽을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그토록 애지중지 양육할 필요조차 없었을 텐데, 어쩌면 이처럼 허무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야고보는 왜 이 시점에서 이처럼 허무하게 죽어야 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왜 야고보의 죽음을 못 본 척 지나치셨을까요?
◉ 우선 야고보의 죽는 시점이 영 이해되지 않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교회는 한창 부흥하고 있습니다. 3천 명 5천 명이 회심하는 상황이고 스데반과 빌립 등 집사들마저 정신없이 천국확장 사업에 몸 받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위험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성공적으로 수습되었고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명칭을 얻는 시점입니다. 한 사람의 성도라도 더 필요한 그런 시기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양육하신 제자 3인방의 활약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던 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아무 한 일도 없이 말입니다.
◉ 오늘 본문 뒤쪽을 좀더 읽어보면 ‘야고보의 죽음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잘못(?)이 아닐까?’라는 불경한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보세요. 곧이어 체포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살려 내십니다. 그것도 기적을 행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야고보가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면 야고보를 죽음에서 살려내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셨습니다. 마치 야고보의 죽음을 방조하신 것 같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허무한 죽음을 예비하셨다면 주님은 왜 야고보를 편애하신다는 오해마저 받으면서까지 그토록 사랑으로 양육하셨을까요? 베드로나 요한처럼 하나님 나라(교회)를 위해 크게 쓰셔야 하지 않으셨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야고보의 죽음은 너무 허무하고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너무 많은 손해를 보신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손익분기점이 크게 기울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 죽음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성경에는 살아서 하나님의 사역에 크게 쓰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일찍 죽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벨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로 경건했고, 그가 더 살았더라면 하나님께 더 유익이 되었을 아벨이었지만 형 가인의 시샘으로 일찍 죽었습니다. 그리고 욥의 초기의 10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엉뚱한 사단의 시험에 아무 죄 없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들도 더 살았다면 하나님의 사역에 도움이 되었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 탄생시 희생된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어야 할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주님과 한 시대에 태어난 영광에 따라 그들 중 몇 명은 주님의 귀한 동역자가 되었을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여하튼 이런 분들은 모두 일찍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무런 합당한 이유 없이, 아니 오히려 너무 억울하게 말입니다.
◉ 오늘 야고보도 동일합니다. 그가 죽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살아서 천국사업에 크게 쓰임 받아야 마땅한 자였습니다. 왜 주님은 그토록 사랑하셨던 야고보의 죽음을 못 본 척 외면하셨을까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으신다.
◉ 우리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만 할는지도 모릅니다. 죽음이 무엇일까요? 생물학적으로는 호흡이 정지되어 육체의 생명현상이 중단되는 것이며 그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종말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죄의 삯으로서 일종의 벌칙이지요. 다만 두려운 것은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가 될 수도 있기에 믿는 자들에게도 무척 겁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우리가 말로써 잘 설명하든 또는 조금 잘못 설명하든에 관계없이 그 무서움만큼은 잘 알고 있는 것이 죽음입니다. 결국 인간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이란 무척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게 되는 어떤 현상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은 죽음을 어떻게 보실까요? 참으로 다행인 것은, 하나님은 죽음을 조금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죽은 자란 결코 없습니다. 모두가 산 자입니다. 성경이 밝히는 하나님의 죽음관은 ‘안식’입니다. 어떤 학자는 ‘죽음이란 더 좋은 안식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결코 종국이나 방해물로 보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도 한시바삐 주님 품에 안기기를 소원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죽음은 오히려 은혜입니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삶보다도 죽음을 더 좋아 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를 믿는다면 이제 우리는 죽음에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죽음도 삶이요 삶도 또한 삶입니다. 사나 죽으나 모두가 삶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오늘 야고보의 죽음을 보는 우리의 시각도 변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일찍 죽임을 당한 야고보는 하나님께 손해였을까요? 성경을 상고하건데, 결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야고보가 미워서 일찍 죽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사랑하셨기에 일찍 불러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사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이 빠르거나 늦거나 하는 시점의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모두 사랑입니다.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죽음의 빠르고 늦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느냐 아니냐인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인 것입니다. 성경은, 죽었거나 살았거나에 관계없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를 ‘복 있는 자’라고 선포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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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선일 씨나 사도 야고보의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조금 빠른 것 같으나, 하나님께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은혜스럽고 적절한 시기에 데려 가신 것입니다. 은혜의 시간이요 구원의 때에 불러 가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오늘 살아있다 하는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보며 안타까워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라도 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시는 이들을 만나지 못하므로 무척 서운한 마음이야 들겠지만, 천국에서의 재회를 믿는다면 오히려 감사의 고백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 나아가 아직 지상에 남아있는 자로서, 오늘 하루를 누리게 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어차피 우리는 주님 안에 있기에 죽고 사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고 감사일뿐입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증거하고 계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죽음이란 없다고 말입니다. 사나 죽으나 이미 우리는 주님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도의 죽음을 비탄으로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 목사님께서 "왜 죄없는 자가 죽어야 하는가?"라는 말씀을 해 주셨고,
또 며칠 전, 36년 간 삶을 함께 해 왔던 친구가 뇌졸증으로 갑자기 타계했습니다.
몇 년 전 우연히 묵상했던 글이 있어 나누고자, 게재합니다........
필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