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

  ▲ 마12:22절 이후를 보면, 성령을 힘입어 귀신들리고 벙어리된 자를 치유하신 주님의 사역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시비 거는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의 사역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의지하여 행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아주 확정적으로 부인 하십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와 동네는 황폐해지고 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25-27절). 당신의 사역은 분명 성령의 역사라고 강조하십니다(28절). 지당하신 가르치심입니다.

  ▲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주님의 가르침과 대치되는 듯한 구절이 있어 성도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인 것 같은데, 대립의 양상을 띠는 사건들이 제법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자칫 ‘견해를 달리하는 교회’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난처한 사건들을 살펴보고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상호대립을 표현하는 듯한 사례들

  ▲ 먼저, 구약을 살펴보겠습니다.

   ○ 욥4:12-5:7을 보면 욥의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영적체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금 자세히 보면, 12-16절은 엘리바스의 체험개황 설명이고, 17-21절은 영의 말씀이고, 5:1-7절은 다시 엘리바스의 보충견해인 것 같습니다. 15절의 ‘영’(히:르아흐)이 성령인지 또는 다른 영적존재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이를 ‘성령’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엘리바스가 영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42:7).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의 영적체험도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 욥22:21-23절도 엘리바스가 욥을 설득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과 덜 친밀한 엘리바스가 하나님과 더 친밀한 욥을 권면합니다. 분명 주객전도 현상입니다.

   ○ 출5:21b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너희’는 모세와 아론입니다. 이스라엘 패장들이 모세와 아론을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 삼하24:1-3절과 대상21:1-4절은 다윗왕의 인구조사 명령에 대한 요압의 반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행위는 사단의 격동에 따른 불의한 것이었고(대상21:1), 반대한 요압의 주장이 분명 옳았습니다(2절). 그러나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요압은 온전을 장담하기 어려우나 다윗은 분명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치 못한 자가 성령 충만한 자보다 더 영적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무척 곤혹스러운 상황입니다.

   ○ 왕상13:18절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유다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 않는 벧엘 선지자의 말이 나옵니다. 분명한 속임수(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였지만, 겉보기로는 벧엘 선지자가 정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 열왕기하 2장에는 사명이 끝난 엘리야를 들어올리기 전, 엘리사의 행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먼저 벧엘과 여리고의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야의 죽음’을 예언합니다(3, 5절). 이에 대해 엘리사도 동의합니다. 엘리야의 죽음을 엘리사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3, 5절). 영성의 깊이에 무관하게, 선지자의 생도들이나 엘리사나 모두 엘리야의 지상사명 완수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다 같이 성령의 조명을 받아 엘리야의 죽음을 알고 있었지만, 생도들과 엘리사의 반응은 다릅니다. 역시 겉보기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 간에도 불일치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 다음은 신약을 살펴보겠습니다.

   ○ 행21:4절에 보면 두로의 제자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극구 만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분명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해를 당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 행21:7-13절을 보면,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지고 바울의 미래를 정확히 예언합니다. 아가보는 분명 “성령이 말씀하시되”라고 밝힘으로써 자신의 증거가 참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 이상 2곳에서의 바울의 반응은 변함이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미리 보여준 예언을 무시(?)해 버립니다. 행21:13절의 바울의 다짐은 비장합니다만, 다른 지체들의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 같아 민망한 부분입니다.

▣ 불협화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없는가?

  ▲ 위의 구절들은 일치되지 않고 대립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마치 성령과 성령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사고를 조금 전환하면 새로운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 먼저, 모든 성도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과 엘리바스, 다윗과 요압의 경우에 있어서, 성경 기록만으로 보면 엘리바스와 요압이 더 타당합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와 요압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지는 못했고 오히려 꾸중만 들었습니다. 문제는, 꾸중 들은 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옳은 말씀이 선포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온 성도는 직분에 관계없이 모두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포를 경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매우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한다고 해서 무조건 믿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벧엘 선지자의 경우가 이에 해당됩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단어만 나왔다하면 덥석 수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벧엘 선지자의 속임수에 넘어간 유다 선지자는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정확하게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끝으로, 보다 큰 시각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와 바울의 경우, 생도들이나 아가보 등 선지자의 예언도 분명 성령 안에서 행해진 옳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엘리사와 바울의 고집도 옳은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옳으면서도 대립 양상을 보인 사례인 것입니다. 이럴 때는 보다 큰 시각에서 보아야 합니다. 즉, 선지자의 생도들이나 아가보의 시각은 협의의 관점입니다. 엘리야와 바울 개인에 관계된 것입니다. 사실임에도 개인 관련사항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에 비해, 엘리사와 바울의 관점은 훨씬 넓습니다. 개인의 삶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의 완수여부를 보고 있습니다.

   ○ 엘리사는 엘리야의 생사를 떠나 ‘하나님의 영감이 자신에게 이어질 것인가?’에 더 관심이 큽니다. 개인의 죽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궁금증인 것입니다.

   ○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죽음은 염두에도 두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주님을 증거할 것인가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행20:17-35절에 나오는 바울의 고별연설을 읽어보십시오.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이 설교에서 바울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으나 순교까지 각오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 장엄한 설교의 반응은 모두 울지만 또한 온전히 수용하는 것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행20:37-38).

▣ 나가기

  ▲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잘못 알고 행동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교회는 목사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행동해야 하고, 교회 내에서는 어떠한 이견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 무척 타당할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교회 내에서도 상당한 이견이 존재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몇몇 구절들도 이러한 이견의 증거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 성도들은 현실교회에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때론 상당한 격론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하지만 전혀 걱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교회가 좀 시끄러워도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서 볼 때 아무 소리가 없어 문제없다고 인정받는 교회가, 실제적으로는 치유할  수 없을 정도의 중병에 걸린 경우가 허다합니다.

  ▲ 교회 내의 이견 -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다양하게 발표하고 검토해야 합니다. 다만 이때 위에서 살펴본 3가지 사항은 꼭 기억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를 중심한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한 해석일 경우에만 정당성이 입증됩니다.  

  ▲ 따라서 성도들은 교회의 시끌벅적한 현실에 놀랄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보다 성경적인 행동원리에 다가가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해야 할 것입니다. 좀더 넓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샬롬! ♥

김문수

2006.12.24 14:54:56
*.74.113.21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내가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오직 십자가복음만이 인간구원의 길임을
절실하게 깨닫고 때로는 너무 지나치다 싶고 함께 복음을 전하는 동료들도 이해하기 힘들정도로 사명감이강하고 의견충돌한적도있었지만 {그렇게 친한 동료였던 바나바 하고도...}
하나님께서는 전체적으로 합력하여 하나님의선을 이룰수있도록
그들을 때를 따라서 인도하셨던것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미친듯이 복음을 전했지만
그렇게 강직한것같은, 찔러도 피한방울 안나올 사람같이 보이는 사도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평강과 사랑}대해서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있으니
바울사도는 공의의 하나님을 올바르게 전하는데,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사람인것같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이 성령충만하게 해달라고 쉽게 고백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령충만했던 제자들과 사도바울의 삶을 보면 그렇게 일시적 감정이나 사명감없이 쉽게 고백할
성령충만 주옵소서 !! 가 아닌것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샬롬!!

허경조

2006.12.25 18:55:32
*.89.245.75

성령의 능력과 열매중 현대교회는 성장과욕증에 걸린 나머지 능력에만 치중하여 이런 폐단들이 생기는것 같습니다. 지혜로운 분벌력이 필요하며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도들에게 올바른 분별력을 키워주어야 할것 같습니다.

세힘

2012.09.23 17:47:45
*.100.27.84

성령충만 상태에서도 상호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가장한 사단의 궤계로 인한 충돌로 보아야 하지 않을런지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오직 사람의 어리석음이 다른 것을 만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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