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이게 정당한 요구였다고요?

조회 수 965 추천 수 69 2009.07.31 23:06:41

어느 분이 쓴 “벼룩의 한계”라는 짧은 글(예화)을 읽었습니다. 경험상의 한계에 주눅 들어 본래의 능력을 발휘하려 시도하지 않는 벼룩의 행동은 어리석은 것이므로, 긍정적 사고로 꿈과 야망을 가지라는 권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쳤으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아무 연관도 없는 마태복음 22장의 기사에 억지로 연결시킴으로써, 괴상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본문으로 삼은 마20:22절이 포함된 20-28절은 사도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이후 요한의 모친)가 예수님께 아들들의 출세를 위해 로비하는 장면입니다. 이 대화를, 막무가내 긍정주의로 포장하여, 전혀 엉뚱하게 해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화의 전반부(벼룩의 한계)와 후반부(마20:20-28)는 서로 연결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사안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로 앞에 기술된 17-19절을 보면 지금이 극도의 긴장상황이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죽으로 올라가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그때에” ; 20절) 요한의 모친은 전혀 엉뚱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접수하시면 자기 아들들을 우의정과 좌의정으로 임명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몽땅 제쳐두고 말입니다.

요한의 모친은 지금, 자다가 뒷다리 긁듯, 생뚱맞은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자기의 이기심만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완벽히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모친이 범하고 있는 ‘실패’를 해석하는 목사의 영성과 안목이 서글픕니다.

“비록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의 요구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요구를 비난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러한 영예를 얻을 수 있는 조건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모친의 요구는 절대로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호통을 쳐야만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비록 격한 용어나 비속어는 사용하지 않으셨으나, 예수님께서는 야단치신 것입니다. ‘혀를 끌끌 차셨다.’고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더욱이 요한의 모친이 긍정적으로 옳게 요구했기 때문에,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지름길(필자의 표현=영예를 얻을 수 있는 조건들)을 제시해 주신 것도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요한의 모친이 기대한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였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엉뚱한 ‘긍정적 사고’와 연결시켜, 예수님의 승인까지 확보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곡해입니다.

평신도에 비해 성경을 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한, 소위 지도자라는 목사들의 해석능력이 이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면, 평신도가 마음 놓고 목사들에게 성경해석을 부탁하기 어려울는지 모릅니다. 서러운 현상이기에 앞서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할 것입니다.  




                          <예화> 벼룩의 한계

마20:22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어떤 선생님이 자기 반 학생들과 함께 벼룩을 가지고 실험을 했습니다. 벼룩은 하나같이 유리통 밖으로 뛰어 거의 천정까지 오를 정도의 점프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후 유리통 위에 유리그릇을 덮었습니다. 벼룩들은 뛸 때마다 자신들이 유리그릇에 부딪히자 점차 그릇에 부딪히지 않을 정도까지만 뛰었습니다.

반 학생들은 흥미진진하게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유리그릇을 치웠습니다. 그러나 벼룩들은 여전히 그 그릇이 있는 높이까지만 뛰고 있었습니다. 벼룩들은 이미 자신의 한계를 정해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뚜껑을 덮고, 좀 더 위대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자신의 가능성을 접어 버립니다. 좀 더 헌신된 신앙을 소유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하고 아주 평범한 신앙 상태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꿈과 야망을 가지십시오.

마태복음 20장에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비록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의 요구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요구를 비난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러한 영예를 얻을 수 있는 조건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것들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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