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맛 잃은 소금

조회 수 5328 추천 수 125 2007.03.10 09:52:14
♣ 막9:49-50(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 들어가기

  ▲ 앞서 나누었던 단상 ‘빛과 소금’의 요점은 ‘빛과 소금은 모든 성도의 위상으로서 실제적 사명은 자신을 소모(희생)하여 타인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지만 공적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에 대해 허경조 형제님께서 “이 글에 있는 의미로 본다면 마가복음 9장 49-50절은 어떻게 묵상하는 것이 좋은지?”를 물으셨습니다. 솔직히 이런 질문은 운영자이신 박 목사님 같으신 분께나 어울리는 것입니다.

  ▲ 따라서 허 형제님의 요청은 명백히 무리한(?) 것입니다만, 비전문가의 견해가 궁금하여 하신 질문일 것이라는 가정 하에, 한번 더 귀중한 말씀을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 이후의 글에서 성경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발견된다면(신학적인 잘못은 크게 괘념치 않겠습니다), 목사님께서 바로잡아 주시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용기 내어 시작하겠습니다.


▣ 막9장의 주요 사건 정리

  ▲ 막9장을 주제별로 보면 적어도 6가지의 사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①변형 사건(2-8절). ②하산 시의 대화(9-13절), ③하산 후의 제자들의 실패 사건(14-29절), ④변화산 아래 마을에서 갈릴리로의 이동(30-32절), ⑤가버나움에서의 토론(누가 크냐)(33-37절), ⑥축사 행위에 관한 처리 방안 토의(38-50절) 등이 그것입니다.

  ▲ 그러므로, 여러 사건(주제)이 다수 기록되었다는 점을 참작하면, 질문 구절인 49-50절 말씀이 9장 전체와 관련된 것이냐 아니면 마지막 사건인 축사와 관련된 것이냐의 확인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야 보다 정확한 의미 해석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물론 신학자들의 공통된 이해와 같이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나머지 복음서에서는(공관복음은 물론 요한복음까지) 막9장 사건들이 연속된 일련의 사건으로 표현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즉, 막9장만 읽으면 연속 사건 같지만 실제는 불연속 사건들로서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해 막9장처럼 정리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심지어 시간적 선후(先後)가 전도된 경우도 있는 듯합니다만, 오늘 묵상에서는 이 점(연속 사건 여부와 선후 문제)은 다루지 않겠습니다.    

  ▲ 아무튼 저는 49-50절을 막9장 전체의 기록 의도와 연결하여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간 및 지면 관계상 범위를 조금 줄여서 마지막 제⑥사건(38-50절)을 중점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축사 사건(38-48절)의 개략적 정황 해석

  ▲ 38절에 의하면 귀신을 내어 쫓은 자는 주님을 따라 동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익명인의 축사행위를 금지시켰다고 보고합니다.

  ▲ 이에 주님께서는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42절에서 “이 소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축사 사건에 있어서 ‘소자’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주님의 진의가 결정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2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 ①견해 : 41절만 보면, ‘소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특히 42절을 41절의 종속절로 볼 경우 이렇게 받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듯합니다.

    ○ ②견해 : 그러나 42절을 41절의 종속절이 아니라 병행절로 볼 경우, ‘소자’는 ‘그리스도를 믿지만 현실적으로 동행하지 않는 자’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는지 모릅니다. 즉, 사도 요한에게 꾸중 들었으나 주님께 인정받은 자를 가리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 주제에서 벗어납니다만, 어떤 목사님께서 41-42절을 ‘평신도의 목사 존경’ 근거 구절로 인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희”는 ‘목사’(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므로), “저”는 ‘평신도’, “소자”는 ‘목사’를 가리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가 목사에게 물 한 그릇만 바쳐도 천국의 상을 얻는데, 보다 큰 것을 가져다주면 오죽하겠느냐는 설명이었습니다. 목사는 그리스도에게 속했고 평신도는 속하지 않았다는 설명도 그렇고, 대접받기만 바라는 속내도 그렇고, 매우 엉뚱한 해석이라고 웃어 넘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 아무튼 축사 사건(38-48)에 있어서 ‘소자’는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인 것 같아 보입니다. 주님께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셔서, 만약 소자를 실족시키면(죄에 빠트리면),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48절) 지옥에 떨어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 저는 위의 2가지 견해 중, ②견해에 지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38절의 ‘주님을 따르지 않았던 축사 시행자’를 의미할 가능성이 상당히 열려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38-40절의 뉘앙스가 그렇게 느껴집니다. 놀랍지만, 주님 당시 실제 주님을 따라다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처럼 느껴집니다.

    ○ 먼저, 주님은 주님을 따르지 않은 축사 시행자(38절)를 믿는 자로 인정하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40절). 축사 행위는 성령을 힘입어야만 행할 수 있는 일로서 귀신의 능력으로는 실행되지 않는 현상입니다(마12:22-28). 따라서 주님은 이미 축사 시행자를 주님의 제자로 인정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축사 시행자는,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사도에 비해 약자의 위치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사도 요한은, 자기들은 명백한 제자이면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데(제③사건), 이 축사 시행자는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축사에 성공한 것에 대하여 질투심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질투로 인해 축사행위금지를 요구했을 수 있습니다(38절).

    ○ 이러한 모든 정황과 상대적 위상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퇴출 위기에 처한 축사 시행자를 보호하시기 위해 “소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즉, 축사 행위를 통해 이미 주님의 제자가 된 미약한 자(소자)를, 단지 주님을 직접 따라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 49-50절의 의미 해석

  ▲ 학자들의 견해를 확인해 보니, 49절과 50절은 난해한 구절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문자 자체의 의미 해석도 어렵지만, 48절 이전 구절과의 연결 여부 판단이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 먼저 49절은, 앞의 절에 연결되어, 48절의 “(지옥)불”이 곧 49절의 “불”이라는 해석입니다. 실제 헬라어 성경에는 한글개역에 누락된 ‘가르’(gar=영어의 for)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49절 하반부의 “소금 치듯 함”은 ‘지옥불의 격렬함’을 상징하는 비유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극한 고통을 강조한다는 의미입니다.

    ○ 성경에는 소금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오는데, 히브리어로 ‘멜라오’(melach)라 하며, ‘불변성/영원성’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민18:19절 및 대하13:5절의 “소금 언약”이라는 표현은 ‘영원하고 불변하는 언약’을 의미합니다.

    ○ 또 소금은 제물을 성결하게 만드는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출30:35; 레2:13절 등).

    ○ 한 가지 더 짚어봐야 할 것은 흠정역(KJV)입니다. KJV는 49절을 “For every one shall be salted with fire, and every sacrifice shall be salted with sal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타 역본에 비해 ‘and' 이하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소금으로써 제물을 성결케 한다.”는 뜻을 첨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상과 같은 부분적 고찰들을 종합한다면, 49절은 48절 이전과 연계하여,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는 지옥불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으며 이는 소금처럼 변개되지 않는 선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 다음은 50절로서, 이 구절은 시각을 조금 달리하여 소금의 기본적인 역할(기능)을 재강조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 여기서는 소금의 ‘조미(맛) 기능’만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만, 역시 소금의 주요 기능인 ‘부패방지=정결 기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하반절의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라는 말씀은, 단순히 ‘신앙의 맛’을 의미한다기보다 ‘불변하고 영원한 말씀 즉 인간의 타락을 방지하는 기능’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로스’(analos)라고 하는데, 이는 ‘소금이 없는/소금 성분을 잃은’의 뜻입니다. 상당수의 영역본들도 ‘lost its saltines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금의 “맛”은 ‘조미 기능과 정결 기능’을 함께 암시하는 것으로 받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입니다.

    ○ 어떤 학자는 본문에 나오는 소금의 의미를 33-42절까지 포괄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작고 미미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섬김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희생/겸손/사랑/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김/절제/경건 등으로 나타나는 삶이 필연적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50절의 의미를 ‘심판 때에 불로 소금치듯 당하지 않으려면 평소의 삶 속에서 희생과 겸손과 사랑의 소금을 치라.’는 것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 가능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50절 하반절에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이 따라 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소금’은 앞에서 살핀 대로 ‘하나님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약속 즉 언약’을 의미합니다. 소금(언약)의 기능은 ‘신앙의 맛을 유지하고 신앙의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나아가 화목하기 위해서는 좀 전에 말씀드린 자기희생/겸손/사랑/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김/절제/경건 등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평소 삶 속에서의 ‘희생’(소금의 중요 특성)은 충분히 강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이상과 같은 의미와 해석을 참작하여, 저는 일종의 전의(轉義) 개념으로서 “소금”을 먼저 된 제자들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막9장에서는 사도들이 해당되겠지요. 오늘날에는 목사와 장로 등 영적 성숙자들이 될 것이고요.    

    ○ 그렇다면 50절의 “그 맛”과 “화목”이라는 단어를 고려할 때, 50절에 담긴 영적 요구는 ‘소금처럼 자신을 희생(소모)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화목) 삶을 살라.’는 것으로 받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하겠습니다.


▣ 종합 해석(38-48절 해석과 49-50절 해석의 통합)

  ▲ 이 문제는 앞에서 제법 상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쉽게 정리될 듯합니다.

  ▲ 즉, 38-48절에서 “소자”는, 사도들처럼 주님의 측근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축사 시행자처럼 주님으로부터 다소 멀리 떨어진 자로 인식되는, 소외자들을 암시한다고 봅니다. 물론 앞에서 약간의 토의가 있었으나 이 소외자의 범주는 주님을 믿는 자로 한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 또, 49-50절에서 “소금”은, 맛과 부패방지 기능을 고려할 때, 먼저 주님을 믿어 성숙된 자들(예를 들면 목사나 장로)이라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 따라서 축사 사건의 뜻은, 먼저 믿어 성숙된 자들이 나중 믿어 미성숙된 자들을 잘 섬기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오늘 본문인 49-50절의 의미는, ‘만약 이러한 제자의 기본 사명에 실패하면 응분의 책임을 질 각오를 하라.’는 뜻으로 받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 나가기

  ▲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를, ‘못 말리는 승귀 욕망’(누가 크냐)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보다 뛰어난 재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공적을 쌓고 이를 근거로 명예 누리는 삶이 옳다.’는 가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세상에서 인정되는 가치체계입니다만 성경마저 이에 동조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 성경이 성도들에게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하신 뜻은, 소금의 기능인 맛과 부패방지를 완수하라는 것인데, 이는 당연히 소금 자신의 소모(희생=없어짐)를 전제한 개념입니다. 소금이 남아있다는 것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의 증명일 뿐입니다. 따라서 공로가 있는 성도(목사든 장로든)가 그 공로의 덕을 계속 본다면, 이는 사라지지 않은 소금과 다름없기에, 본연의 사명을 완수했다 평가받기 곤란합니다.

  ▲ 두 번에 걸쳐 살펴본 소금의 비유는 ‘소금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이웃의 유익을 증진하라.’는 교훈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정리하면, 50절은 하나님의 약속인 소금언약을 마음에 품음으로써(소금의 희생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상호간의 평화(화목)를 이루라는 뜻입니다. 소금이 소모(희생)되어야 부패가 방지되고 바로 이 상태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화목”인 것이지요. 만약 이에 실패하면 49절의 경계를 스스로 감당해야 할 비극에 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지난번 단상(빛과 소금)의 요지와 맥이 맞닿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많이 부족하지만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보다 좋은 깨우침이 있으시면 나누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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