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20:25-28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미국에서 아주 성공한 목회자 중에 존 비비어 목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자선재단을 설립하여 TV 및 뉴스레터 ‘메신저’로 국제전도에 전념하고 있다 합니다. 아울러 그는, 아내와 더불어,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수 년 전 ‘두란노’가 번역 발간한 “순종,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누리는 보호와 자유”라는 책을 구입하여 읽었고, 그 허황된 이론에 동의할 수 없어, 부정적인 ‘독후감’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비비어 목사의 ‘순종’에 대한 짧은 글을 읽었는데, 필기하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아 스크랩 하려 하였지만, 운영자가 허용하지 않아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다 ‘혹시 책에서 발췌한 내용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살펴봤습니다. 맞았습니다. pp. 23-24에서 발췌한 것이었습니다. 좀 길지만 ‘별지 1’로 첨부하겠습니다.
부분 인용한 별지의 요지는 단 하나입니다. ‘목사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비비어 목사의 변하지 않는 철학입니다.
독후감에서도 몇 가지를 짚었었지만, 워낙 비뚤어진 사상인지라, 지적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짧은 ‘별지’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어 가지만 지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의 성장 과정과 잘못된 교회관 때문”이라는 표현은 정말 잘못된 인식입니다. 비비어 목사가 생각하는 교회관은 ‘하나님 ⇒ 목사(성직자) ⇒ 일반성도’의 구조입니다. 하지만 성경적 교회관은 ‘서로가 형제인 원형공동체’(마23:8) 입니다!
둘째, 롬13:1-2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세상 권세를 대하는 성도의 자세에 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롬13:1-2절은 신중히 해석해야겠지만, 모든 권세의 근원이 하나님이라 해도 순종하지 말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에게 대항한 모세, 교황과 대립한 종교개혁자들(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반항아들’임은 비비어 목사도 잘 알 것입니다), 나치에 협조하지 않은 본 훼퍼 목사 등은 당대 정통 권위들에게 순복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부연하겠습니다. 비비어 목사는 정치권력이나 종교권력 등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천주교 교황도, 조계종 총무원장도, 이슬람 수니파 수장도, 통일교주도, 모두 하나님의 작품일 것입니다. ‘이들에게도 순종해야 하는가?’ 참 묘한 상황입니다. 혹 ‘목사만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나머지 종교 지도자들은 아니다.’라고 발뺌하지는 않겠지요! 이 주장은 전형적인 불륜-로멘스 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셋째, 행26:14절의 “가시채” 부분도 아주 신중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비비어 목사의 해석은 참으로 애석합니다. 회심하기 전의 바울(사울)은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의식 아래 종교지도자들에게 철저히 복종’했습니다! ‘종교지도자 =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인식으로 행동했었습니다. 회심 전 바울은 ‘순종’의 대가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순종’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넷째, “인간 권위에 반항하는 것은 곧 주님의 명령이나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것”이라는 주장 역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독단입니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주님과 바울에게만 적용해 보기 바랍니다. 주님은 당대 정통 인간권위(제사장 및 바리새인들)에게 순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바울도 로마정부에 굴복하여 한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전체적 및 암묵적으로 비비어 목사는 교회 내에서의 목사를 대하는 일반성도의 자세를 왜곡하고 있습니다(이 책 전반의 분위기입니다). 즉, ‘목사 순종이 곧 하나님 순종’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는 성경지식을 교묘히 왜곡시키는 전형적인 곡학아세인 것입니다.
간략히 짚어본 몇 가지만으로도 비비어 목사의 견해는 수용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꼬아도 너무 꼬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조금 살피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23:1-12, 막10:42-45, 눅22:25-27절과 병행되는 구절입니다. 핵심은 아주 명확합니다. ‘큰 자가 되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라.’입니다.
섬기는 자(디아코노스=하인, 고용인)는 곧 종(둘로스=노예)입니다. 종은 대접받는 신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홀대받는 지위입니다. 심한 경우 자유마저 없습니다.
사실상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과 바울의 교회관은 오해할 건더기조차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제사장도 없고 성전도 없고 제사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지도자 계급, 종교 전문가 계급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어떠한 조직 형태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성직자가 우뚝 선 교회들뿐입니다. 바로 비비어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삯군 목사들이 꿈꾸는 그런 교회입니다.
‘목사’를 오늘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개신교 신앙의 필수적 존재, 현대교회의 독보적 초점이자 대들보요 중심부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현실로는 만약 목사를 교회에서 제하면 기독교가 금방 무너질 것으로 보입니다. 목사 없는 현대교회, 상상하실 수 있으신지요?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찾아봐도 초대교회에는 ‘목사’가 없었습니다! 61-65년경에 기록된 엡4:11절에 나오는 “목사”는 ‘목자’의 오역일 뿐이고, 성경에 나타나는 “목자”는 복수직분으로서 교회 내에서의 특정 역할을 표현하는 은유적 표현이지, 직책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목자”는 하나님의 양을 돌보고 양육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목사는 결코 교회 내에서의 유일한 대접과 존경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잠시 도대체 ‘목사’가 어떻게 출연하게 되었는지, 성경과 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삼서 9절에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삼서는, 어떤 학자는 65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대부분은 90-95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여기서 “으뜸되기를 좋아하다.”(필로프로튜오)는 ‘첫째가 되기를 원한다.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라는 뜻입니다.
‘첫째 또는 지도자 되기를 좋아하는’ 것은 비단 디오드레베 한 사람의 욕망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는 서로 ‘으뜸’(프로토스=첫째의, 최고의) 되려다 나머지 제자들과 대판 싸우기도 했습니다(마20:20-24=오늘 본문은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입니다).
성경은 ‘으뜸사상’에 대해 아주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으뜸’ 욕심은 소위 위대한 교부들을 통해 기독교 내부로 침투하는 불행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학자들의 연구를 아주 간략하게 정리합니다.
○ 안디옥의 이그나시우스(37-107)가 최초로 감독 직능을 강조하였다.
○ 카르타고의 씨프리안(200-258)의 영향으로 ‘사제’로 호칭하고 감독과 장로를 합쳐서 ‘성직자’로 호칭하게 되었다.
○ 밀라노의 암브로즈(339-397)는 사제를 미사의 주관자로 세웠다.
○ 이후 그리스 로마 문화가 더욱 침투하여 계급제도를 강화시켰다.
○ 4세기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교회가 계급조직사회로 고착되었다(천주교의 사제제도).
어찌되었든, ‘으뜸사상’은 아주 잘못된 사람들의 그릇된 야망이었고 이 야망이 교부들을 통해 구체화되어 전승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존 비비어 목사를 비롯한 ‘성직자 중시주의자들’의 사상은 바로 이 잘못된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비비어 목사의 주장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그것은 완벽히 비성경적이라는 진실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교회상은 결단코 목사라는 특정직분이 하늘 높이 솟아나서 홀로 대접받고 존경받는 그런 조직체가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섬기며 종이 되는 합력공동체, 봉사공동체, 원형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해가 혼자만의 망상이 아님이 다행스럽습니다. 같은 견해를 지닌 두 분만 소개드리겠습니다.
첫째, 페루에서 선교사업에 진력하고 있는 참 성도 ‘폴 워셔’ 목사의 견해입니다.
“목사님들을 향한 경배와 우상숭배를 멈추십시오. 목사에 대한 지나친 대우와 존중은 복음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바벨론의 사제직 숭배에서 나온 것입니다.”(인터넷 대담 중에서 발췌).
둘째, 래리 리처즈라는 분의 견해인데, 이분도 예수님께서 ‘성직자 위계제도’를 세우지 않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735가지 성경난제 뛰어넘기”의 마태복음 23장 해설 부분(p.348)을 옮겨 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뜻이 무엇일까?
신약 시대에는 율법 교사가 되는 분명한 과정이 있었다. 오랜 기간 동안 공인돤 현자(랍비)에게 훈련을 받는 일이 그 과정에 포함되었다. 이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은 유대교에서 존경을 받았고 종교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 이들에게 ‘랍비’ 혹은 ‘아비’라는 경칭이 붙었으며, 이들이 내놓는 율법 해석은 율법 자체만큼 권위있게 받아들여졌다.
당시대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13절)을 정죄하는 이 장의 문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직자 위계 제도를 발전시키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몇 사람을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권위자로 세우기보다 모든 신자를 형제와 자매로 여기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유일하게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여겨 모두가 그리스도께 호소해야 할 것이다.
이 주제는 나중에 신약의 서신서들에서 발전되며, 특히 신자 개인이 다른 사람이 해석한 하나님의 뜻에 좌우되지 말고 주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로마서 14장에서 더욱 발전된다. 】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순간도, 목사라는 특정직분자가 툭 튀어나와서 좌지우지하는 교회를 꿈꾸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선입견 없이 성경을 읽으면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일인데, 왜 성직자(?)에게 그토록 목을 매는 이상한 사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지,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별지> 나는 하나님에게는 복종하지만
“나는 하나님에게는 복종하지만 인간에게는 먼저 내가 수긍할 수 있어야 복종할 수 있다.”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의 성장과 잘못된 교회관 때문에 우리 앞이 막힐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에게만 있는 권위에 대한 복종과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위에 대한 복종은 나뉠 수 없다. 모든 권위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성경은 이렇게 권고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1-2).
이 말씀에는 생각할 것이 많다. (나중에 좀 더 깊이 살펴보겠지만) 우선 여기서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다. 첫째, 다스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나님 모르게 권위 있는 자리에 합법적으로 오를 사람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우리는 이 개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둘째, 인간 권위에 반항하는 것은 곧 주님의 명령이나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것이며, 그것은 심판을 자취(自取)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의 저자가 (권력에 굶주린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딤후3:16)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성경을 곡해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성경을 쓰셨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본인들은 선뜻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만 순종해야 하지, 인간 권위에는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주님이라 부르는 분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셈이다. 예수님이 (후에 바울이 된) 사울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행26:14). 성경 시대 농부들은 가시채라는 것을 사용했다. 대개 2.5미터 길이의 곧은 참나무나 튼튼한 나뭇가지 껍질을 벗기면 가시채가 되었다. 가시채 앞쪽 끝에 뾰족한 대못을 박아 소가 쟁기질하다 뒷발질을 하면 찔리게 했다. 소는 아픔과 상처를 주는 이 날카로운 도구에 감히 저항할 생각을 못했다. 이 말은 위에 있는 권위나 세력에 저항하는 것이 부질없음을 나타낼 때 사용하던 속담이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권위에 저항하든 그분이 위임하신 권위에 저항하든, 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셈이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며, 많은 사람들은 그런 고생을 통해 교훈을 배운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존 비비어 목사, 순종-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누리는 보호와 자유, 두란노, pp. 23-24>
"예수께서 꿈꾸신 교회는?" 이라고 제하신 이 글을 읽고 조금은 흥분된 마음으로 가슴이 벅찹니다.
요즈음 끊임없이 성령께서 제게 생각하게 하시는 것이 "태초에 하나님이 친히 디자인하신 교회는 어떤 것일까?"이기 때문입니다...
회원가입은 진작에 해 놓고 정작 들어와 글을 거의 읽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형제님의 글을 먼저 다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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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비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