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crossvillage.org/ 성도의 칼럼>에서 있는 이근호 목사의 글이라 합니다. 오늘날 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내용인 듯하여 퍼왔습니다...
생태계에서 생존에 상극을 이루는 것을 ‘천적’이라고 한다. ‘니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관계가 천적 관계다. 목사가 복음의 천적이 되는 이유는, 목사는 교인들의 의견을 대변해서 하나님께 아뢰는 자리에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목사는 교회를 대표한다. 교회를 누구보다도 꿰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회 없는 목사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다. 교회가 있을 동안에만 목사다. 목사가 교회를 잃으면 목사직도 잃는다.
목사직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든 교회가 있어야 한다. 교회란 교인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교인들을 의견을 반영하지 아니하면 교회는 깨진다. 교인들이 요구 사항을 목사는 여과없이 교인들을 대변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 기도 내용을 교인들은 유심히 본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기도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교인들이 복음이 싫단다. 따라서 목사는 하나님께 솔직하게 전달해야 한다. “하나님, 우리 교회 교인들이 복음이 싫답니다.” 그런데 목사는 교인들 탓으로 돌리지만 싫은 목사 본인이 복음이 싫은 것이다. 이런 면을 분명히 부각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복음을 사랑하는 자를 보낸다.
목사는 바짝 긴장한다. 그 많은 교인들 가운데서 자기 권위가 안 먹히는 인간은 그 복음을 아는 그 인간뿐이다. 목사는 천적을 만났다. 저 인간 안 쫓아 보내면 자기가 교회에서 쫓겨나갈 판이다. 일단 목사는 유화책을 쓴다. 당근을 제공하는 것이다. 교인들 앞에서 그 복음 아는 자를 한껏 칭찬해준다. “여러분, 우리 모두 이 분의 신앙을 본받읍시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말씀을 사랑하고 복음대로 사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이 분은 우리 교회의 보배입니다.”
무슨 뜻일까? 까불지 말라는 뜻이다. 함부로 날뛰지 말라는 뜻이다. 봐 줄 때 조용히하라 는 뜻이다. 목사가 공개적으로 칭찬해 주었기에 너도 어디 가서 담임 목사를 부추겨 세우는 식으로 교회 생활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막상 복음을 아는 이 성도는 꼭 저능아 같다. 교회 돌아가는 사태에 아둔하다. 무감각하다. “무슨 일 있어요?”라고 되묻는 눈동자를 보인다. 그냥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식으로 살아간다. 이 바보, 등신 같은 처신이 교회에서 문제가 된다. 목사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 성도가 자신을 존경하는 것으로 되갚아주는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목사는 교회 내에서의 자기 권력에 약간의 구멍이 생기게 된 것을 느낀다. 그 구멍이 어디까지 커졌는지를 염려가 되어 사모님으로 하여금 조사케 한다. 한편으로는 더욱더 호의적으로 그 성도에게 다가간다. 하지만 아무리 목사가 그 성도를 부추겨주어도 성도는 목사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괘씸하다. 사회성이 결여된 자 같기도 하고 고지식하게 보이기도 하다.
교인들이 동요하다. 목사가 외치는 하나님과 그 복음 아는 성도가 말하는 하나님이 사뭇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챈다. 분명 복음을 아는 성도가 말하는 하나님이 옳은 것 같다. 목사는 손봐 줄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자 한다. 목사가 부쩍 설교 시간에 복음적인 내용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나도 복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투로 그 성도로 경쟁에 나서려는 것이다. 하지만 밑천이 딸린다. 교인들이 복음에 대해서 부쩍 질문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위기다. 어설프게 답변했다가는 연이어 수 십 개의 파생된 공격을 받을 수가 있다. 무식이 폭로나면 안 된다. 어쨌든 훌륭한 목사라는 이미지로 밀어붙여야 된다.
“그래, 인격이다. 인격으로 밀어붙이자!” 이때부터 유난히 교회 내에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보이는데 평일에 바쁜 장로들까지 불러내어 목사의 솔선수범적인 구제 활동을 목격토록 한다. 그리고 그 업적은 빠짐없이 온 교인들이 들으라는 듯이 설교 시간과 광고시간에 나팔을 분다. “여러분,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여러분들은 머리로만 신앙생활 해서는 아니 됩니다. 실천적 신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교회 사업을 시간 바치시고 헌물 바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배나 갚아주십니다. 전도서 11:1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
목사는 발악을 한다. “어디 감히 내 밥그릇을 뺐으려고 이눔(=놈)이”
그 성도는 더 이상 모범적인 교인이 아니다. 교회를 파탄내는 불순분자로 찍혔다. 그 성도와 사귀는 자들은 사모님의 정보망에 걸려 속속 목사 귀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교인들은 조심하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예전처럼 진정되어진다. 그리고 그 성도는 잊혀진다. 반짝 소동이었다.
복음이란 이처럼 늘 짧은 소동으로 끝난다. 하지만 파도 위의 달빛처럼, 떨어져 나가고 또 떨어져 나가도 파도는 계속 밀려온다.
바울이 산넘고 물건너 갖은 고생 끝에 만난 자들에게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전하였을 때, 어찌보면 참 싱거운 듯한, 아니 밋밋한 듯한 그 한 마디를 위해 그런 고생스런 전도여행을 하였을까? 하며 의아해 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
속이 비어버린 겨와 충실한 알곡을 사람의 눈으론 알 수가 없기에 한 사람, 한사람이 스스로 긴장하며 그 생명,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에게 있는지 조심히 살펴야함이 너무도 시급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 받을 수 있음이 복음이기에 오로지 그 복음만을 전하는 목사님, 그런 참 목자는 어쩌면 이 세대에선 모랫사장에 정금 한알 찿기 보단 힘이드는 세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때문에 정말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에 이르길 열망하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기를 열망하며 사도바울처럼 '오직예수'만을 전하는, 운영자님과 같은 그런 목사님들이 이 땅에 점 점 더 많아 지시길 진심으로 기도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