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성경을 통독하고 성독하는 것도 좋지만 정독의 필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개인 확신입니다.


초등학교에서는 단어들을 정확하게 발음하며 ‘읽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러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읽기’는 기본입니다. ‘소재와 주제 파악, 문단구조, 단어 의미 파악’ 등에 유념합니다. 차원이 달라지고 관점도 변하고 폭도 넓어집니다.

대학에서는 ‘문학적 가치 내지 인류에의 기여도’ 등 진정한 학문 영역을 탐구하게 됩니다.

학문이 이러할진대 성경은 어찌해야 할 것인지요? 그냥 막연히 읽고, 순간 떠오르는 상념에 만족하면 그만일까요? 항상 초등학교 수준에 머물러 있어도 문제없을까요?

개인적으로 ‘QT’(Quiet Time:경건의 시간)를 상당히 경계합니다. 그 가장 근본적 이유는 성경을 즉흥적이고 단정적으로 해석하는 습관을 조장하기 쉽다는 데에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짧은 본문을 읽고 순간 떠오르는 상념을 ‘성경 본래의 뜻’이라 착각하게 만듭니다.

학창시절의 시험시간을 회상해 봐야 합니다. 문장을 읽고 문제 풀 때 정답을 쉽게 찾지 못해 발 동동 굴렀습니다. 온 신경을 집중하여 읽고 풀어도 정답 찾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큐티는 본문을 읽고 ‘하나님은 누구신가?’ ‘내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오늘 내가 적용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등을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다 풀어냅니다. 학창시절 전 과목 100점 받았다는 듯 유감없는 실력을 발휘합니다.

약 10여 년 간 큐티를 했습니다. 교육도 몇 번 받았고 구역모임의 주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담임목사님이 출타할 때는 다른 사역자(전도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 대신 교인 전체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 큐티할 줄 압니다.

그러다 교회개혁 분쟁을 겪으면서 큐티의 폐해를 절감하고 말았습니다. 극한 대립 국면임에도 모두들 큐티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각자의 생각에 따라 그 해석과 적용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개인적인 단순한 차이 정도야 무슨 문제이겠습니까만, 똑 같은 본문을 읽고 완전 정반대의 해석과 적용을 하는 데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것만 최고라며 아주 힘 있는 어조로 상대를 공격했습니다.  

큐티는 자기 멋대로 편하게 성경을 읽기 쉽다는 단점을 지닙니다. 이것은 성경을 잘 읽는 방법이 아니라 무모한 읽기입니다. 이것이 또한 큐티의 위험성이기도 합니다(이에 대한 어느 목회자의 견해를 ‘별지’로 첨부합니다. 참고바랍니다).


성경을 아무 생각없이 그냥 읽기만 해도 그 뜻이 다 파악되는 연애소설 정도로 보지 않는 한, 성경의 읽기와 이해와 해석의 난이함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성경은 정말로 진지하게 읽어야 대상입니다. 안광지배(眼光紙背)의 대상입니다.

성경을 나름 정독하다보니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수없이 반복되는 말입니다만, 성경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머리 싸매고 애써도 충분한 이해에 도달하기 불가할 정도의 난제들도 무척 많습니다. 이는 성경이 우리 신앙의 유일한 잣대이지만 결코 읽기 쉽지 않다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경 읽기가 쉽지 않다면 제대로 읽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가르치는 책임은 지도자들 내지 전문가들(신학자 및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들이 먼저 배운 바를 학생들에게 전수해 주는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일반성도들에게 성경읽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읽으라.’고만 했지 왜 꼼꼼히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선생들처럼 지금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이에 일반성도들 중에서 ‘독학으로라도 성경을 정독해야겠다.’는 뜻을 세운 이들이 가끔 있습니다. 홀로 노력해 봅니다. 독학으로 검정고시 준비하는 학생과 유사한 현상일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소위 전문가들의 견해를 참고해 봅니다. 설교도 듣고 경건서적도 읽어 봅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견해(설교와 서적 등)가 너무 천차만별이라는 점이 마음을 짓누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전혀 엉뚱하게 이해하고 해석한 것을 버젓이 내어 놓는 데는 아연실색할 지경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넷째, ‘왜 전문가들마저 이럴까?’를 생각해보니 그들도 성경을 건성으로 읽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전문가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읽고 너무 쉽게 단정하고 너무 쉽게 이야기해 버립니다.

이 모든 폐해들은 전문가들마저 성경을 가볍게 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일반성도들은 성경을 바르게 읽지 못하고 있고, 이끌어야 할 전문가들마저 제대로 읽지 못할 뿐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 해석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 난맥상의 원흉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성경뿐입니다. 성경을 통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과 예수님께 이를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명백한 것은 ‘성경을 정독하지 않고는 바른 기독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엉터리로 읽는 일부 지도자들에게 휘둘릴 위험성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의 성경 읽는 방법을 3회에 걸쳐 이야기했습니다만, 그 이상의 성경 읽는 방법은 성도 각자 각자가 더 생각해야 봐야 할 소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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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  [스크랩] 큐티, 함부로 하지 말자(개혁하는 교회, 이택환 목사)
                 (출처:http://blog.daum.net/lbts5857/3277 / 기독교자료실)

성경은 종종 창문에 비유된다. 그러나 성경은 창문이 아니다. 창문은 투명한 유리너머로 바깥세상이 보일지라도, 외부의 바람을 막아주고 실내의 따뜻한 공기를 보호해준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차단장치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성경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차단하기 보다는 세상과 똑바로 보게 하고, 올바로 소통하게 한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성경을 창문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보다 성경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기능하는 안경의 렌즈와 같은 것이 아닐까'

안경 렌즈로서의 성경은 때때로 작은 것도 크게 보는 볼록렌즈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흐린 것도 똑똑히 보는 오목렌즈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멀리 있는 것도 가까이 보는 줌렌즈로 기능하기도 하며, 허상을 제거하고 실상을 보게 하는 난시교정렌즈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성경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은 실로 오묘한 조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렌즈의 조화가 신통하다고 해서, 아무 안경이나 임의로 착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문의의 진단에 따라, 적절한 처방을 받지 않는다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똑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삐뚜로 보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시력까지도 완전히 망쳐버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큐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걱정(?)이다. 큐티를 한다는 것은 매일 매일 말씀의 렌즈를 착용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큐티가 제공하는 렌즈가 전문의의 처방을 받은 객관적인 렌즈라기보다는, 지나치게 개인의 실존과 직결된, 매우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렌즈일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큐티 책자들이 소개하는 성경을 묵상하는 방법을 보면, 큐티가 얼마나 개인적인 문제해결에 집중하는 소위 실용적인 성경읽기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대개 큐티 안내서의 첫 번째 주의사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모든 큐티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로 큐티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가 개인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응답이나, 적용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데 있다(오늘날 큐티가 얼마나 바리새적인 경건의 판단기준으로 오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 논하지 않겠다).

그런 점에서 큐티는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영성훈련으로서의 성경읽기인'렉치오 디비나'와도 다르다. 이러한 큐티의 문제점에 대해 정용섭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큐티를 통해 열정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나무랄 수야 없고, 오히려 칭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큐티식 성경읽기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 제시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변을 과도하게 성경 안에서 찾으려고 애를 쓰는 데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성경을 흡사 은행에서 필요에 따라서 돈을 빼다 쓰듯이 도구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성경 자체가 우리의 삶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성경읽기를 게을리 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열정을 갖고 성경을 읽되 객관적인 성경의 핵심을 포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경이 물론 개인의 결단과 용기, 더 나아가서 세부적인 행동 지침을 다루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요소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다. 우리의 성경읽기의 가장 결정적인 오류는 성경에 부수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인간 반응에 사로잡혀서, 그것이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큐티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서의 성경읽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스탠리 하우어와스가 <성경 해방시키기>라는 책에서 말한 '성경읽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는 능력을 갖추고 그 이야기에 충실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새겨들어야 한다.

그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대부분의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의무는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가정에 도전하고자 한다. 교회가 미국에 있는 개인 그리스도인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없다...그러한 성경 읽기는 개인주의, 자기탐닉, 폭력을 조장할 것이다.

신학훈련을 받은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주석의 도움이나 깊은 묵상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 큐티 본문의 맥락을 전혀 잡지 못하거나, 완전히 헛짚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섣불리 이루어진 '적용'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문가의 처방을 받은 렌즈로서의 깊이 있는 성경공부나 깊은 묵상이 전제된 성경읽기가 아니라면, 현재의 큐티는 차라리 소극적 성경읽기로 전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 가지 자신의 관심거리를 최대한으로 축소시키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만 관심을 둘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필요를 성경에서 찾아서 적용시키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적용'거리를 강조하는 현재의 큐티는 그런 욕망을 조장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욕망이 가득할 때는 차라리 성경을 덮자. 큐티, 함부로 할 게 아니다.

사라의 웃음

2013.01.06 22:21:30
*.109.85.156

저 또한 오랜시간 동안 큐티의 문제점에 휩싸인 채 큐티를 해 왔었습니다. 성경을 제게 적용시키려는 무모한 행위를 오래도록 해 왔었습니다. 정말이지 우리가 성경에 적용되어져야 하건만... 저의 탐욕으로, 저의 이기심으로 성경을 자꾸만 제 구미에 맞게만 적용시키려고 했었습니다. 이 곳에 와서 말씀을 조금씩 배워가면서 얼마나 제가 잘못 배워왔고 잘못 적용시키며 제 편한대로, 제 이기심 채워가며, 제 탐욕 이끄는대로 말씀을 적용하며 살고 있었음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ㅠㅠ

성경을 풀어주시는 지도자들의 문제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화초가 물병에 꽂혀 있어야만 생명이 유지되건만, 물 없는 화병에 꽃만 수려하게 담아내려하는 설교들... 정말이지 십자가 사랑이 제외되고, 생명이신 예수님이 제외된 채 학술적으로 논술적으로 아무리 잘 정리되어진 설교라 할지라도, 결국은 영혼들을 푸석하게 만들고. 시들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을요.

오직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우릴 구원해 주시려 오신 예수님 앞에 그냥... 그냥... 이 못난 죄인을 구원해 주신 그 은총 아래 머리 숙이고, 구푸리며 감사하는 삶이, 수시로 속에서 솟아나는 탐욕과 이기심을 또 아뢰고 아뢰며 십자가 사랑만이 참 생명으로 인도해 주시에, 십자가에 다시금 엎드려 봅니다.

배승형

2013.01.07 05:44:55
*.233.119.247

외상 후 스트레스

정순태 형제님의 여러 글을 읽고 느낀 점입니다.
글을 쓰다보니 길어 졌습니다. 나누어 올리기에는 적당한 것 같지 않아 길더라도 한 번에 올렸습니다.

이 글을 쓰는 것이 어쩌면 형제님을 지면을 통해서 안지 얼마 되지 않고, 형제님의 많은 부분을 알지 못한 채 이 글을 쓴다는 자체가 형제님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시점에서 제가 형제님의 글을 읽으면서 형제님을 비판도 아닌 사랑도 아닌 저의 관점에서 느껴지는 형제님의 성향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래도 약간의 동질감과 애정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정순태 형제님께서는 신앙 생활을 잘 하시던 중 담임목사님의 좋지 않은 모습을 보고 좋은 방향으로 돌리려 했으나 그들의 뉘우침없는 인간적인 모습에 실망했고 그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교회에서 계속 기득권을 잡고 위선의 모습을 본 것에 대한 아픔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형제님은 군에서 조금의 빈틈을 보이면 바로 적에게 노출되어 적에게 패배할 수 있기 때문에 적군을 이기기 위한 연구와 분석력이 아주 뛰어난 분으로 느껴집니다.
특히 목사직에 대한 연구와 분석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입니다.
섣불리 정순태형제님에게 반론을 제기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 가지 말씀을 드리자면 그런 빼어난 연구와 분석력에도 불구하고
형제님 스스로도 느끼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마는
아픔을 겪고난 후 상태방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계속 자리잡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어쩌면 그 상처와 부정적 시각이 오히려 형제님을 이렇게 성숙하게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일관성있게 자리잡고 있는 부정적 시각이 제 눈에 들어 왔습니다.
제가 제목에서 어슬프게 표현하였습니다마는 외상 후 스트레스증후군이라고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 지 이미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목사님과 기복주의 신앙을 가진 교인들에게 형제님 못지않은 부정적 감정이 있습니다.
제가 보아온 한국 교회 문제점은 이렇습니다.
1950,60년대 우리 부모님 세대는 대부분 농경사회요, 학력도 국졸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전해들은 복음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신학도 그리 깊이가 있지 않아도 충분했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그렇게 아는 것은 부족했지만 깨닫는 한, 두 말씀을 가지고도 충분히 만족하며 깊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간 믿음의 세대입니다.
그런데 7,80년대 산업화 시대에 들면서 복잡 다양한 시대가 되었고 학력도 고학력화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시기에 기독교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교회는 지도자(목사)가 부족하자
우후죽순 비인가 신학교를 만들어 제대로 신학을 배우지도 못하고, 사회에서 낙제된 사명감도 없는 신학생들을 대량 배출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인한 폐해들을 오늘날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은 제대로 배운 목회자나 그렇지 못한 자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물질만능주의가 되어버린 많은 목사들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 가장 큰 원흉을 순복음교회로 보고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축복인지, 사박자 축복인지 그것이 기복주의 신앙의 대표가 되어 한국 교회 신앙을 변질시키고 말았습니다.
고난의 복음은 버리고 이기적인 신앙이 한국 교회 전반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저 조차도 그 뿌리들을 완전히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순복음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한국교회가 이 후에 정통교단으로 인정하더니 요즘에는 아예 모든 교단이 순복음교회를 따라 가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부흥(?)되기 때문입니다.
교인 수가 엄청 늘어나니 기존 교회들이 따라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인의 기질과 관련되어 있지 않나 생각 해 봅니다.
첫째는 기복신앙이 우리 고유의 무속 신앙과 잘 어울려 물질 축복이 축복의 다 인 것처럼 전하는 메시지에 사람들이 열광한 것입니다.
듈째는 소위 말하는 냄비 근성이죠.
뭔가 뜨겁게 하면 스트레스가 풀리기 때문입니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나면 뭔가 후련 해 지는 이 화끈함을 한국 사람은 특히 좋아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한국에 이단이 그렇게 많이 배출되지 않나 생각 해 봅니다.

이렇게 누구든지 한국 교회의 부정적인 상황을 보는 입장은 다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무조건 비판과 비난을 하는 방법.
둘째 대안을 가지고 건설적인 비판을 하는 방법.
셋째 스스로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 방법.
물론 첫 번째는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든지 인식합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인데요.
이 부분은 개인적 성향에 따라 해법을 달리 하는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 성향은 세 번째입니다.
저는 회개는 하나님만이 하게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방법은 강제성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힘의 우위를 가지고 꼼짝 못하게 하는 거지요.
그래서 사회 정의가 실현되고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는 것입니다.
최근의 영화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5.18을 고발한 ‘화려한 휴가’, ‘26년’같은 것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러한 응징이 본인을 회개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안을 가진 건전한 비판은 성공할 경우
힘의 우위를 가지고 사회 제도를 개선함으로써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절대 본인을 회개시키지는 못합니다.
자식도 내 마음대로 안 되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이 자기 바라는 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목사님을 비롯해서 어느 누구도 바뀌어 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대신 바라는 것이 있으면 제 역량이 되는 한 제가 그것을 감당하려고 합니다.
어짜피 남이 바뀌지 않는데 남이 바뀌기를 바라고 있으면 자신만 상처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겁한지는 몰라도 저 개인적인 온건한 성향 때문에 저는 이 방법을 택합니다.

현재 교회 내의 갈등은 교회 내의 왕정 정치와 현대의 민주주의 정치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성경에서의 제도가 왕정 정치에 가깝기 때문에 교회는 대부분 이를 따라 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최소한 민주주의를 부정합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됩니다.

세상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교회내 권력의 정점에 있는 목회자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목회자 스스로 목회자는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의 신앙을 챙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
행정적인 처리는 가급적 교인들에게 위임하는 선순환 구조를 가질 경우 교회는 나름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 분란이 일어나지요.
또한 교회는 의사 결정이 민주적이지 않을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교회는 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선한 의지로 이루어 질 때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것이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진행될 때에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회자가 문제가 있을 경우 제대로 시정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 돈과 기득권의 문제로 연결되는 데 저는 싸우는 사람은 다 같이 잘 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싸움의 일반적인 원리입니다.
한 쪽의 일방적인 잘 못으로 싸움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싸움은 거의 대부분 쌍방과실이죠.
목회자와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상대방도 가만히 생각 해 보면 물질과 권력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에 약점이 있다는 거지요.
그것에 대한 유혹이 올 때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물론 성에 관련된 특별한 문제는 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잘못한 80%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잘못한 20%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비유이지만 싸움에는 반드시 내가 잘못한 일정한 비율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에 대한 요구는 나중에 제가 성화의 부분에서 말씀 드리겠지만
상대방의 수준은 초등학교 밖에 되지 않는데(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지요) 요구하는 수준은 대학생 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에 해결 방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이 옳은 말이고 틀린 말이 아니지만 상대방은 그 요구를 받아드리는 데는 엄청난 수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볼 때는 쉬운 것 같지만 상대방은 특정 부분에서 유치원과 초등학생 수준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요구를 받아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내가 대학생 수준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부족한 것을 인정하고 받아드리고 내가 그 분야에 대학생 수준이라면 내가 그것을 감당하고 상대방이 자랄 때까지 기다려 줘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에 대한 요구 수준은 대학생 수준이어도 자신 역시 그 분야에서 초등학생 수준입니다.
아니면 형제님 말씀대로 그 옆에 있으면 계속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피하는 것도 하나의 큰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리면 낮엔 빛이 무한대이고 밤엔 어두움이 무한대이듯이
아무리 예리하고 날카로운 연구와 분석력을 가지고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할지라도
어떤 하나의 관(觀)을 가지면 그 쪽 관의로의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의 모습 또한 다양할 수 있지만 사랑의 관점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 형제님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군자의 모습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는 형제님이 제일 싫어하는 교회에서의 최고의 덕목은 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설사 내 것이 옳다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제 주장을 말하는 그런 사람은 못됩니다.
차라리 피했으면 피했지...
위에서 말했지만 이것은 기질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옳고 틀림의 문제이기보다는 기질적 특성을 이해하며 접근한다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좀 더 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제 제기를 하며 스스로 힘들어 하는 형제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감히 한 말씀 올렸습니다.

묵상법에 대하여는 위의 글을 읽고 저에게 대입시켜 보면
저의 묵상법은 제대로 된 정독 묵상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초기의 묵상법은 주로 성경 단어의 참 의미를 묵상 해 보는 묵상법이었구요.
성경 신학(주로 강해 설교)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서당개 풍월을 읊는 식으로 문맥을 따라 몇 번씩 읽고 정독하여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을 묵상합니다.
보완해서 일상 생활 속에서 사색하는 중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 해 보는 그런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저 수준은 대충 이 정도입니다.

정순태

2013.01.07 14:09:07
*.142.126.91

배승형 형제님!
귀한 권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트라우마 – 가장 정확한 진단일 것입니다. 크게 공감합니다.
기왕 어렵게 말씀하셨으니 조금 부연하고자 합니다.

1) “신앙생활 잘 하던 중”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 잘 했던 것이 아니라 멍청했었습니다. 감쪽같이 속았었죠. 목회자들에게.....
○ ‘1+1=2’로만 알았습니다. 그게 10도 되고 100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 목사의 설교를 3년 동안 프리노트하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그 많은 분량을 타이핑하여 그 목사에게 되돌려줄 정도였지요. ‘당신을 이만큼 존경했다.’는 말과 함께..........
○ 허황된 짓이었습니다. 한국교회 내에서의 종교생활이라는 것의 실체를 너무 많이 알아 버렸던 것입니다.........
○ 중증 트라우마임을 인정합니다.

2) “연구와 분석력이 우수하다?”는 표현에 대하여
○ 절대 아닙니다.
○ 누구나 조그마한 관심만 가지면 다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상식적인 수준일 뿐입니다.
○ 다만 대부분의 성도님들께서 ‘귀찮다. 분란 일으키기 싫다.’는 안이한 마음으로 모른 척하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들이 특출 나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 뒤로 물러나서 모른 척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겠지요. 욕만 실컷 얻어먹고 실패했던 교회개혁 당시 신물 날 정도로 겪었던 현상이기도 합니다.

3) “부정적 시각으로 고착”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 너무나 정확하여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 한국교회에 대해서는 소생의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형국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2의 종교개혁으로도 치유 불가능할는지 모른다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형제님께서 기대하고 있는 두 번째나 세 번째 방안으로는 어림없을는지 모르겠습니다.
○ 정말 힘없는 일반성도입니다. 서리집사도 못 땄습니다. 무슨 발언권이 있으며 무슨 말빨이 서겠습니까?
○ 하지만 교회생활 할 때도 항상 이랬습니다. 어느 목회자에게든 할 말 다 했습니다. 심지어 담임목사 3명을 한 자리에 앉혀놓고 1:3으로 따지기도 했습니다. 안수집사나 장로 따위를 염두에 두고 목회자들 비위 맞추기가 그렇게 싫었습니다.
○ 처음부터 목회자에게 반감이 있었느냐고요? 아닙니다. 너무 순수하게 따랐습니다. 심지어 교회와 목사를 잘 섬기겠다고 10년 간이나 골프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정년퇴직하면 목사님 모시고 심방하면서 남은 여생 사는 것이 제 노후계획이었습니다. 이 소망을 무참히 짓밟은 목사 앞에서 뜨거운 눈물 흘리며 그 사람을 떠날 때 참으로 슬펐습니다. 그 실망감 – 이해되실는지요?
○ 다시 트라우마 상태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 항목은 그만 하겠습니다.

4) “교회 갈등이 왕정정치와 민주정치로 인한 현상”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 크게 공감합니다.
○ 그러나 저는 여기에 ‘욕망’이라는 것을 더하고 싶습니다. 목회자들의 성공욕망, 일반성도들의 인정받고 싶은 욕망 등이 어우러져 치유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진단입니다.

5) 그러면 어찌 할 것인가?
○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는 개인적인 문제이겠지요?
○ 사실 제 글에 담겨진 내용들이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라는 사실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글 쓰는 당사자가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래서 마음 무겁습니다.
○ 한 때 이곳에 글 올리기를 중단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올리게 되었지요. 왜 계속하게 되었는지는 그 글에 담겨져 있습니다.
○ 개인적이고 부정적인 신앙체험이 다른 지체님들께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면 이는 또다시 재고해야 할 것입니다.
○ 저의 칼럼에 대하여 다시 한번 숙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제게 있어서 글쓰기는 마지막 남은 【신앙적 숨쉬기】입니다. 이거라도 안 하면 질식할 것 같습니다!!!

배승형

2013.01.07 20:47:23
*.234.165.213

사라의 웃음님의 표현처럼 부족한 제 졸필을 널리 이해하고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틀림없이 형제님의 글이 올라 오리라 예상했습니다.
착잡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엇습니다.
그래서 잠도 설쳐대고 지금은 새벽 3시입니다.

어느 누가 형제님의 상처와 글들을 가볍게 여기겠습니까?

저에게 고등학교때부터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때 주번 반장으로 전교생 조회때 단상에서 전도를 할 정도로 순수하고 열정적인 친구였습니다.
대학교에서 그 친구는 운동권이 되었습니다. 그냥 운동권이 아니라 골수 운동권이 되었습니다.
데모 때 화염병을 던지도록 조장하는 사상을 교육하는 사상가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모든 구조적 문제에 대해 철저히 개혁을 외치는 친구입니다.
결혼 후 같은 교회에서 10년 넘도록 함께 신앙생활도 하엿습니다.
그 친구는 그렇게 철저히 개혁가이지만 애둘러 표현할 줄 아는 친구라서 큰 갈등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30년 넘도록 우리는 그 친구가 무었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30년 넘도록 서로 평행선입니다.
그 친구는 지금 다른 교회를 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사회와 교회의 개혁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혁의 피가 몸에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친구와 30년 넘게 평행선을 달리는 것은 아마도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기질적 차이가 아닌가 판단 해 봅니다.
어쩌면 기질적 차이라는 것은 비겁한 제 성격의 변명일 수 있습니다.
형제님께서도 언급한 것처럼 두번째, 세번째 방법으로는 한국교회의 무너진 것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한국교회는 커녕 우리 교회가 변화될 수 있을지 아닐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도 역시 아주 평범한 한국교회 특성을 가진 한 교회입니다.
특별한 문제는 없지만 건전한(?)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 많은 문제점들 중 교인들의 헌신이 교회 안으로만 머무는 것을 바깥으로 돌리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을 교회 바깥으로 돌리려 하는 거지요.
교회 교육과 더불어 이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겨우 이 문제 하나 붙들고 있습니다.
저 개인으로부터 교회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면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제 삶의 처음과 끝입니다만는 그것마저도 저와 저 주변과 타협하느라 눈치보고 잘 되지 않네요.
사실 우리 교회 안에서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특수목적교회(장애인교회 등)로 옮길려고 생각했었는 데
이제 제가 교회 안에서 주도적 위치(기득권층-장로 피택이 되었습니다)에 설 수 있게 되었기에
교회 안에서 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를 한 번 더 시도해 보려 합니다.
만일 그럼에도 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면 당초 제가 생각한대로 특수목적교회로 옮기려합니다.

형제님의 몸에도 개혁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누가 옳다 그르다고 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형제님은 처음부터 그 신앙의 열정이 남달라서 바울 선생님과도 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성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에 형제님같은 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저보다는 훨씬 용감하시고 떴떳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님같은 분들을 통하여 크게 역사하리라 믿습니다.

다만 형제님에게는 죄송하지만 혁명과 개혁이 역사적으로 또 다른 권력을 낳는다는 저 개인적 성향에 의해 형제님과는 입장을 달리합니다.
오직 사랑의 순교만이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솝 우화처럼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세찬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형제님 안에 있는 갈등은 형제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의 순수성이 불의에 대한 정의감과의 갈등 표출로 여겨집니다.
모두에게 있는 상처는 사랑으로 승화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감히 저도 상처(개인적으로 말 못하는 상처)를 알기에 표현하였습니다.
형제님의 정독묵상법은 그 말씀의 깊이가 일반 목사님의 그것보다 훨씬 깊고 풍부하여 새로 깨닫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것은 분명 모두에게 알려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형제님의 글쓰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제 이 공간에 들어온지 며칠 되지 못한 제가 아주 오랫동안 이 공간의 주인이신 형제님께 이 말씀을 한다는 자체가 너무 우습고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모양입니다)
다만 다같은 비판적 글들이라도 진정 승화된 감정으로, 그 시각으로 글을 쓸 수 있다고 하면 그 때 쓰는 글은 좀 더 아름다운 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제 5시가 다 되어가네요. 두서없이 말이 길어 죄송합니다.

세힘

2013.02.02 13:30:41
*.100.27.84

진심이 담긴 두 분 형제님의 "진검일합"을 자세히 읽으면서 제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보았습니다. 저는 분명 정순태 형제님과 싱크로율 99%임이 분명합니다. 동시에 배승형 형제님의 마음도 99% 감히 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저의 생각도 밝히는 것이 도리인 줄 생각합니다. 저와 두 분 형제님의 믿음은 분명 하나입니다. 그러나 '아는 것'에 대해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봅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라,는 당부가 얼마나 깊은 고통의 산물인지 느낍니다.

그렇다면 '아는 일'은 왜 다르게 되었었고 또 지금도 다를 수 밖에 없게 되었을까요? 며칠 밤을 새울지라도 이 부분, 끝이 안날 대화의 주제이지만, 축약해 본다면 사도시대가 끝난 때로부터 "천주교"라는 종교가 기원하는 서기 313년까지, 그리고 다시 서기 1517년 루터에 의해 "개신교"라는 종교가 시작하던 그 때에 하나님의 참 복음을 전하던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그 실체적 진실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은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신 적이 없으시지만, 천주교라는 종교가 하나님의 이름을 참칭하며 서기1517년 루터의 때까지 무려 1.200여년 동안 사단의 개 노릇을 지속하였고, 그 천주교라는 종교의 고목에서 곁가지가 하나 나와 소위 '종교개혁'의 미명으로 다시 "개신교라는 종교"로 이름만 바꾼 채 역시 사단의 개 노릇을 하는 일이 또 다시 500여년을 지속하여 오늘에 이르렀음을 보지 못한다면,

다시 말씀드려서 "기독교는 종교다"는 이 엄연한 2천년 동안의 역사적 진실을 부인하는 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다 이루신 일"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해 어떻게 거짓 증거되어 왔는지를 보지 못하는 한, 에덴에서 하나님 말씀을 뒤집었던 사단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뒤집는데 성공하고 있는지를 보지 못하는 한,

두 분의 대화는 결국 평행선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어서 슬픕니다.

배승형

2013.02.02 17:46:09
*.223.174.123

형제님께서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사단의 개노릇을 하였다는 데 충격을 받습니다.
사실 안다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빈약한 상태이므로 이 부분에 집중하면 저는 아무 할 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통해 다 이루신 일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해 어떻게 거짓 증거되어 왔는지에 대하여는
어떤 말씀을 하실려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네요.
또한 이것을 알면 정순태형제님과의 평행선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세지도 전하셨는 데
자뭇 궁금합니다.

세힘

2013.02.03 09:30:39
*.100.248.179

배승형 형제님께 / 그렇습니다. 제가 다소 격한 언어인 "사단의 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형제님께 약간의 번거로움을 드릴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와 거기서 파생한 개신교 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것이 "기독교라는 종교"임을 부인하지 않으신다면 지금 의문하시는 내용들 즉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 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일"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해 어떻게 거짓 증거되어 왔는지, 그리고 정순태 형제님과 형제님 두 분이 어떻게 평행선의 접점에서 만나실 수 있는지,에 대해 서로 아는 것을 함께 나누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또한 저의 생각일 뿐 형제님께 어떤 도움이 될 지 오히려 해가 될 지 여부는 잘 모르는 일이니 행여 저의 말에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개역한글)하신 말씀을 묵상하시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배승형

2013.02.03 13:41:17
*.223.174.123

정순태형제님은 미국에 살고 있고 저는 한국에 살고 있고 세힘님은 어디에 사시는 지 모르겠지만 만일 이 공개된 공간에서 형제님과 의견을 나눌 수 없다면 영영 아는 것을 함께 나누는 날은 오지 않겠지요.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여기에서 떳떳하게 형제님의 아는 것을 오픈하시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인 것 같습니다.

mskong

2013.02.05 03:57:10
*.226.142.23

대화 도중에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정순태 형제님도 한국(부산)에 살고 계십니다. 한번 뵐날을 기획해 보아야 겠네요...

배승형

2013.02.05 07:41:51
*.233.119.247

저 혼자 완전히 착각하며 살았네요^^
직접 만나 뵌다면이야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요.
근데 홈에 정순태형제님 고정 칼럼난이 없어졌네요.
전부터 찝찝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제가 형제님을 상처 입혀서 그런 것이라면
저도 글을 계속 올릴 입장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글을 올리려다 그것을 알고 급히 글을 내렸습니다.

세힘

2013.02.05 14:40:53
*.100.27.84

배승형 형제님께/ 제가 결례를 한 것이면 넓게 해량을 구합니다. 이 공간에서 떳떳지 못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글로 쓰기에 너무 방대하고 또 개인적인 체력의 한계도 번거러워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운영자

2013.02.06 14:21:49
*.205.34.240

첫 홈에 글이 사라지는 특별한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단지 한달 이상 새 글이 업데이트 되지 않으면 사라지게 프로그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초청칼럼 사이트에서 원의숙, 김유상, 이선우 님의 글들이 오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0^

이영임

2013.06.22 17:49:09
*.62.172.105

좋은글 잘보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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