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성경을 통독하고 성독하는 것도 좋지만 정독의 필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개인 확신입니다.


초등학교에서는 단어들을 정확하게 발음하며 ‘읽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러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읽기’는 기본입니다. ‘소재와 주제 파악, 문단구조, 단어 의미 파악’ 등에 유념합니다. 차원이 달라지고 관점도 변하고 폭도 넓어집니다.

대학에서는 ‘문학적 가치 내지 인류에의 기여도’ 등 진정한 학문 영역을 탐구하게 됩니다.

학문이 이러할진대 성경은 어찌해야 할 것인지요? 그냥 막연히 읽고, 순간 떠오르는 상념에 만족하면 그만일까요? 항상 초등학교 수준에 머물러 있어도 문제없을까요?

개인적으로 ‘QT’(Quiet Time:경건의 시간)를 상당히 경계합니다. 그 가장 근본적 이유는 성경을 즉흥적이고 단정적으로 해석하는 습관을 조장하기 쉽다는 데에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짧은 본문을 읽고 순간 떠오르는 상념을 ‘성경 본래의 뜻’이라 착각하게 만듭니다.

학창시절의 시험시간을 회상해 봐야 합니다. 문장을 읽고 문제 풀 때 정답을 쉽게 찾지 못해 발 동동 굴렀습니다. 온 신경을 집중하여 읽고 풀어도 정답 찾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큐티는 본문을 읽고 ‘하나님은 누구신가?’ ‘내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오늘 내가 적용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등을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다 풀어냅니다. 학창시절 전 과목 100점 받았다는 듯 유감없는 실력을 발휘합니다.

약 10여 년 간 큐티를 했습니다. 교육도 몇 번 받았고 구역모임의 주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담임목사님이 출타할 때는 다른 사역자(전도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 대신 교인 전체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 큐티할 줄 압니다.

그러다 교회개혁 분쟁을 겪으면서 큐티의 폐해를 절감하고 말았습니다. 극한 대립 국면임에도 모두들 큐티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각자의 생각에 따라 그 해석과 적용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개인적인 단순한 차이 정도야 무슨 문제이겠습니까만, 똑 같은 본문을 읽고 완전 정반대의 해석과 적용을 하는 데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것만 최고라며 아주 힘 있는 어조로 상대를 공격했습니다.  

큐티는 자기 멋대로 편하게 성경을 읽기 쉽다는 단점을 지닙니다. 이것은 성경을 잘 읽는 방법이 아니라 무모한 읽기입니다. 이것이 또한 큐티의 위험성이기도 합니다(이에 대한 어느 목회자의 견해를 ‘별지’로 첨부합니다. 참고바랍니다).


성경을 아무 생각없이 그냥 읽기만 해도 그 뜻이 다 파악되는 연애소설 정도로 보지 않는 한, 성경의 읽기와 이해와 해석의 난이함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성경은 정말로 진지하게 읽어야 대상입니다. 안광지배(眼光紙背)의 대상입니다.

성경을 나름 정독하다보니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수없이 반복되는 말입니다만, 성경에는 이해하기 쉽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머리 싸매고 애써도 충분한 이해에 도달하기 불가할 정도의 난제들도 무척 많습니다. 이는 성경이 우리 신앙의 유일한 잣대이지만 결코 읽기 쉽지 않다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경 읽기가 쉽지 않다면 제대로 읽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가르치는 책임은 지도자들 내지 전문가들(신학자 및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들이 먼저 배운 바를 학생들에게 전수해 주는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일반성도들에게 성경읽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읽으라.’고만 했지 왜 꼼꼼히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선생들처럼 지금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이에 일반성도들 중에서 ‘독학으로라도 성경을 정독해야겠다.’는 뜻을 세운 이들이 가끔 있습니다. 홀로 노력해 봅니다. 독학으로 검정고시 준비하는 학생과 유사한 현상일 것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소위 전문가들의 견해를 참고해 봅니다. 설교도 듣고 경건서적도 읽어 봅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견해(설교와 서적 등)가 너무 천차만별이라는 점이 마음을 짓누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전혀 엉뚱하게 이해하고 해석한 것을 버젓이 내어 놓는 데는 아연실색할 지경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넷째, ‘왜 전문가들마저 이럴까?’를 생각해보니 그들도 성경을 건성으로 읽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전문가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읽고 너무 쉽게 단정하고 너무 쉽게 이야기해 버립니다.

이 모든 폐해들은 전문가들마저 성경을 가볍게 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일반성도들은 성경을 바르게 읽지 못하고 있고, 이끌어야 할 전문가들마저 제대로 읽지 못할 뿐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 해석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 난맥상의 원흉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성경뿐입니다. 성경을 통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과 예수님께 이를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명백한 것은 ‘성경을 정독하지 않고는 바른 기독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엉터리로 읽는 일부 지도자들에게 휘둘릴 위험성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의 성경 읽는 방법을 3회에 걸쳐 이야기했습니다만, 그 이상의 성경 읽는 방법은 성도 각자 각자가 더 생각해야 봐야 할 소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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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  [스크랩] 큐티, 함부로 하지 말자(개혁하는 교회, 이택환 목사)
                 (출처:http://blog.daum.net/lbts5857/3277 / 기독교자료실)

성경은 종종 창문에 비유된다. 그러나 성경은 창문이 아니다. 창문은 투명한 유리너머로 바깥세상이 보일지라도, 외부의 바람을 막아주고 실내의 따뜻한 공기를 보호해준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차단장치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성경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차단하기 보다는 세상과 똑바로 보게 하고, 올바로 소통하게 한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성경을 창문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보다 성경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기능하는 안경의 렌즈와 같은 것이 아닐까'

안경 렌즈로서의 성경은 때때로 작은 것도 크게 보는 볼록렌즈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흐린 것도 똑똑히 보는 오목렌즈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멀리 있는 것도 가까이 보는 줌렌즈로 기능하기도 하며, 허상을 제거하고 실상을 보게 하는 난시교정렌즈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성경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은 실로 오묘한 조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렌즈의 조화가 신통하다고 해서, 아무 안경이나 임의로 착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문의의 진단에 따라, 적절한 처방을 받지 않는다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똑바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삐뚜로 보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시력까지도 완전히 망쳐버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큐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걱정(?)이다. 큐티를 한다는 것은 매일 매일 말씀의 렌즈를 착용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큐티가 제공하는 렌즈가 전문의의 처방을 받은 객관적인 렌즈라기보다는, 지나치게 개인의 실존과 직결된, 매우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렌즈일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큐티 책자들이 소개하는 성경을 묵상하는 방법을 보면, 큐티가 얼마나 개인적인 문제해결에 집중하는 소위 실용적인 성경읽기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대개 큐티 안내서의 첫 번째 주의사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모든 큐티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로 큐티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유가 개인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응답이나, 적용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데 있다(오늘날 큐티가 얼마나 바리새적인 경건의 판단기준으로 오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 논하지 않겠다).

그런 점에서 큐티는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영성훈련으로서의 성경읽기인'렉치오 디비나'와도 다르다. 이러한 큐티의 문제점에 대해 정용섭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큐티를 통해 열정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나무랄 수야 없고, 오히려 칭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큐티식 성경읽기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 제시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변을 과도하게 성경 안에서 찾으려고 애를 쓰는 데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성경을 흡사 은행에서 필요에 따라서 돈을 빼다 쓰듯이 도구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는 성경 자체가 우리의 삶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성경읽기를 게을리 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열정을 갖고 성경을 읽되 객관적인 성경의 핵심을 포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경이 물론 개인의 결단과 용기, 더 나아가서 세부적인 행동 지침을 다루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요소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다. 우리의 성경읽기의 가장 결정적인 오류는 성경에 부수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인간 반응에 사로잡혀서, 그것이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큐티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서의 성경읽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스탠리 하우어와스가 <성경 해방시키기>라는 책에서 말한 '성경읽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는 능력을 갖추고 그 이야기에 충실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새겨들어야 한다.

그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대부분의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의무는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가정에 도전하고자 한다. 교회가 미국에 있는 개인 그리스도인들의 손에서 성경을 빼앗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없다...그러한 성경 읽기는 개인주의, 자기탐닉, 폭력을 조장할 것이다.

신학훈련을 받은 목회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주석의 도움이나 깊은 묵상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 큐티 본문의 맥락을 전혀 잡지 못하거나, 완전히 헛짚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섣불리 이루어진 '적용'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문가의 처방을 받은 렌즈로서의 깊이 있는 성경공부나 깊은 묵상이 전제된 성경읽기가 아니라면, 현재의 큐티는 차라리 소극적 성경읽기로 전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 가지 자신의 관심거리를 최대한으로 축소시키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만 관심을 둘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필요를 성경에서 찾아서 적용시키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적용'거리를 강조하는 현재의 큐티는 그런 욕망을 조장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욕망이 가득할 때는 차라리 성경을 덮자. 큐티, 함부로 할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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