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어버이의 날’이 있지만, 미국에는 ‘어머니의 날’ (Mother’s Day)과 ‘아버지의 날’ (Father’s Day)이 나뉘어 있다. 이 두 기념일은 불과 한 달 남짓의 차이인데, 어머니의 날은 온 나라가 떠들썩하고 아버지의 날은 다소 썰렁하기까지 하다. 사실 한국의 어버이의 날도 어머니의 날이 개정된 것이 아닌가. 이런 저런 이유를 불문하고, 또 때늦은 감이 다소 있으나 나는 오늘 희수(喜壽, 77세)를 앞두고 고국에 홀로 계신 친정 아버지를 기리고자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빠의 팬이었고, 여느 유년기의 아이들처럼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해야지!”라고 생각했다. 학창시절, 생활기록부에 있는 ‘존경하는 인물’ 란에는 항상 ‘아버지’를 적었다. 헬렌 켈러, 이순신 등과 함께. 그렇다고 내가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엄마의 손은 오빠에게, 아빠의 무릎은 여동생에게 빼앗겼고, 방학이 되면 나만 먼 외가댁에 보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를 존경하는 이유는 내 눈에 비춰진 아빠의 삶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엄마의 몫이 더해진다. 엄마는 암투병을 하며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아빠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신실하게 나타내셨다. 그것은 ‘존경’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아빠의 취미는 자연석 수집이었다. 우리가 강가에서 물놀이를 할 때, 아빠는 물과 돌들과 대화를 하셨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내가 지어드린 목석(木石)이라는 별명처럼 늘 조용하셨다. 언성을 높여 엄마와 다투신 적도, 우리를 혼내신 적도 거의 없었다. 온유하시고 길이 참으시는 성품 때문이다. 아빠는 원망과 불평을 하시지도, 형제와 이웃을 비방하시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보낸 과일상자를 돌려 보내실 정도로 청렴하셨고, 억울할 땐 웃으시며 잠잠하셨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요동하신 적이 없었다.
항상 월급을 받으시면 먼저 얼마나 떼어 시골에 있는 학교로 장학금을 보내신 후 나머지를 엄마에게 주셨다. 그 선행의 삶은 지금도 지속되어 소외 받고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의 헌금을 보내신 뒤 남은 것으로 생활을 하신다. 쓰고 남은 것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돕고 남은 것으로 써야 한다는 변함없으신 소신 때문이다. 아빠는 신념을 따라 한 길을 걸어오셨고, 지금은 작은 텃밭을 일구고 계신다. 아낌없이 나눠 주시는 그 땅의 열매는 일 년에 한번씩 이 미국까지도 날아온다. 참깨, 고춧가루, 참기름, 들기름, 무말랭이, 말린 나물 등. 그렇게 달았다는 복숭아를 먹어보지 못한 것이 못내 속상하지만 손수 만들어 보내주신 매실즙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다.
하지만 한결 같으신 아빠도 고희를 넘기시며 조금씩 변하셨다. 그래서 한때 내 안에 있는 아빠의 견고한 성이 무너지는 듯하여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그런 아빠도 사랑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모습일지라도 우리 곁에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눈으로 본 아빠의 삶과 함께 마음으로 깨닫는 그분의 존재가 더없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꽃무늬 넥타이에 감색 양복이 아주 잘 어울리셨던 아빠를 오늘도 그리며, 지면이 한없이 부족함을 아쉬워하며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간구해 본다. 사랑하는 나의 아빠에게 장수의 복을 허락해 주시길, 주님 품에 안기실 그날까지 모세와 같이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않는 축복을 내려 주시길….
넓은 마음으로 용납해 주시길 간구 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