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한 말씀)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창39:9)
요셉은 울보였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사람이라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눈물의 횟수는 요셉도 못지 않다. 그는 기록상으로 총 여덟 번의 눈물을 흘렸다. 다시 말해,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다. 슬픔이 없이 어찌 눈물을 흘리겠는가? 그를 배반한 형제들을 향한 복수심과 연민이 교차되어 시작한 그의 눈물은 어느새 슬픔의 사랑으로 승화되어 간다.
그러나 진정한 슬픔은 바로 본문에 있다. 그것은 위대한 승리의 슬픔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은 두가지 상이한 힘의 대결장이다. 유혹의 힘이 그 하나이다. 누가 그랬던가? 달콤한 유혹은 죽음보다 강렬한 것이라고. 이는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쇠사슬에 메이러 가는 것과 같아 종내는 화살이 간을 뚫게 된다.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다.(잠7:22-23) 보디발의 아내의 휴혹은 또한 한 번만이 아니었다. ‘날마다’(39:10), 매번 공격되는 유혹의 힘을 힘없는 요셉은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다른 또 하나의 힘이 유혹의 힘과 대결한다. 이것이 대결의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바로 거절의 힘이었다. “요셉이 거절하여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39:8) 거절은 단호함으로 유혹을 물리친다. 타협이란 있을 수 없다. 아니면 아닌 것이지, 적당히 중간에 만나서 중재하지 않는다. 양다리를 걸치지 않는다.
이 거절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본문에 해답이 있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 이를 개역 한글에서는 득죄(得罪)라고 표현했다. 득죄하지 않겠다는 요셉의 자세가 거절의 힘을 낳았다. 그의 주인인 보디발에게 득죄하는 것일까? 아니다. 득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셉이 견지한 깨달음이요, 유혹을 이기는 비밀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이다. 내 입장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건을 본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할 수가 없으시다.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여기에는 어떠한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 사랑의 하나님은 죄를 지은 그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신다. 즉, 죄는 미워하시나 죄인은 사랑하신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딜레마요 해결책이다. 이 명제 안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이것이 요셉이 느꼈던 득죄의 슬픔이었으리라.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득죄의 현장에서 부끄러워 숨었던 아담을 향하여 부르셨던 그 음성.. 아, 그것은 슬픔의 음성이 아니었을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그렇다. 애통이다. 나의 죄성과 죄에 대한 슬픔이요, 나아가 나의 득죄를 안타까와하시는 하나님의 슬픔과 동화된 애통이다. 그렇다. 슬픔의 힘이다. 나의 슬픔이 죄의 유혹보다 클 때, 유혹은 저만치 도망가는 것이다. 그렇게 요셉은 득죄의 슬픔을 느꼈고, 거절의 단호함으로 강력한 유혹의 힘을 물리쳤던 것이다. 슬픔의 종국적 보상은 하나님의 위로하심이다. 요셉도 애통함으로 위로를 받았으리라. 그것은 하나님의 직접적 보상이요 잔잔한 터치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후 기나긴 옥살이 때 침묵의 고통은 충분히 이길 만한 것이었으리라.
늘 자신의 관점으로 무엇인든 바라보려 하고 이 작은 머리로
무엇이든 판단하려하는 우를 참 많이 저지르고 삽니다.
스스로 돌아보아 회개해야할 부분들이 엄청이나 많이 떠오릅니다.
귀한 나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