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7:1-10
샬롬~ 독일의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오늘 백부장의 믿음을 읽으면서 "틀림과 다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에 한창 첫 맛을 들였던 1980년대 시절에 성경을 통독하면서 맞닥뜨린 의문 중 하나가 이 사건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두 번 나옵니다. 마8장(5-13절)과 본문의 눅7장에서였지요. 서두의 말씀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이 똑같고 전후 스토리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 둘은 같은 사건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8장에서는 백부장 본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께 간청한 반면, 눅7장은 백부장 본인이 아닌 마을 장로들과 벗들을 보내어 요청했다고 나옵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맞을까? 하나가 진실이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라는 말일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고 하는데.... 이것이 30년전의 제 고민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해결점을 나름대로 찾았습니다.(신학 서적이나 다른 이의 의견을 구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제 개인적 의견임을 참고하세요.^^) 그것은 다름과 틀림에 대한 나의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마태와 누가의 관점을 이해하면 이 모든 것이 문제없이 풀립니다. 마태는 12제자 중의 하나요, 그가 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입니다. 반면, 누가는 의사로서 이방인(비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이지요. 그래서, 둘다 그 당시의 공용어인 헬라어로 쓰여지긴 했지만, 마태의 관점이 히브리적 사상(헤브라이즘)에 기초한다면, 누가의 관점은 헬라적 사상(헬레니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의 차이가, 하나의 사실(Fact)을 두고 두가지 엇갈린 이야기(Story)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아시겠지요?
오늘날의 우리는 논리적, 사실적, 체계적인 사상에 기초한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에, 헤브라이즘 사고는 어떤 사실에 대해 직관적, 통합적,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이 두가지 상이한 문화 코드가 섞여 있어, 문화의 충돌을 여기저기서 볼 수가 있지요. 바울과 누가로 대표되는 그룹은 헬레니즘에 기초한 이방인 선교를, 베드로와 마태와 야고보로 대표되는 그룹은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한 유대인 선교를 맡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제 의견^^)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요한을 두고 크게 싸운 이야기나, 바울이 베드로를 외식한다고 하면서 책망했던 이야기들은 이 관점에서 본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수 있겠습니다.
마태의 히브리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합니다. 창32장에서 야곱이 얍복강 나룻터에서 누군가를 만나 밤새 씨름했던 사건을 잘 아시겠지요? 야곱이 만난 '그'는 과연 누구일까? 창32장은 야곱의 관점에서 쓰여졌다고 봐야 하겠지요.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의 새로운 이름은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고 했고, 그 지명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로 명명되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야곱은 하나님 당신을 직접 만난 것일까? 아니겠지요. 호세아 선지자의 글이 이를 증명합니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뒷발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12:3-4)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헤브라이즘의 문화코드는 이같이 선언합니다. "야곱과 겨룬 분은 하나님이자, 천사이다." 그런 그들에게 이렇게 따지지 마십시요. "아니, 천사면 천사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고 하면 진실은 대체 뭐란 말이오?"
본건으로 돌아가서, 이제 우리는 진실을 압니다. 진실은, 백부장은 자기가 직접 나서지 않고 다른 이들을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이 틀렸습니까? 아니지요. 마태도 자신의 관점에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히브리적 사고에 의하면, 사자를 보냄은 곧 자기가 직접 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는 것이나, 내 뜻을 대신하여 사신이 가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얘기입니다.
너무 길어졌지만, 결론은 이것입니다. 어떤 사실, 어느 사건에 대해서, 내가 '틀렸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 나의 관점은 내가 그동안 살아오고 경험하고 교육받아 온 가치관과 판단 체계로 인한 것입니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문화 코드와 가치관은 다를 수 있습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관점에서는 이것이 "같다, 비슷하다 또는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히는 것 뿐이지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후기)
요즘은 거의 매일 큐티 묵상 노트를 쓰고 있습니다. 회사의 조기 출근으로 아침 시간에 조금 더 여유가 생긴 이유도 있고, 스마트폰을 이용한 큐티방도 여기저기 들락거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큐티의 나눔 속에서 깨달음도 많고 배움도 많음을 느낍니다. 이 글은 '비공식' 그예다 카톡방에 오늘 아침 올린 내용을 카피한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나서 조금씩 풀리는것 같네요. 잘 모르겠는데 '뭘 잘 모르는건지'도 모를 때가 많지만
일일이 질문을 하다보면 진도가 나가지 않아 그냥 되도 않는 순종하는 마음(이것도 사실 불분명함)으로
읽자하고 읽는 복음서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도 제대로 못쓰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어왔지만
이 글을ㅓ 통햇 이 막연한 질문으로 가득찬 제 마음에 세미한 대답을 주시네요. 적으라면 이것도 너무
'막막하지만' 이전보다는 조금은 밝고 환한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