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제가 읽은 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복음서의 기록만 보면 두 번 우셨습니다. 2부에서 간증드린 바와 같이, 주님께서는 롬폭에서 제게도 많은 눈물을 주셨습니다. 그런 저로서는 주님의 눈물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언제 눈물을 흘리셨고,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9:41에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분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받은 죄악의 도성... 그 도성의 앞날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는’(눅19:44) 완전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우셨습니다. 연민과 안타까움, 그리고 동정과 사랑이 어린 주님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신 또 다른 대목은 요한복음 11장, 나사로의 죽음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바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또 한번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주님의 눈물을 저는 추적해 보았습니다. 이 주님의 눈물을 통해서, 저도 그곳 롬폭에서 감격스런 은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때에 눈물을 흘리셨는지 하는 것은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33절과 36절을 합하여 보면, ‘심령의 통분’과 ‘민망히 여기심’,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심’에 대한 종합적 이유로 인해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나사로에 대한 사랑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왜 주님께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며 민망히 여기셨는지는 전후 배경을 살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미리 알고 계셨고, 유대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근처의 베다니로 다시 올라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나흘이 되었던 시점이었지요. 저는 여기서 죽은 나사로의 누이인 마르다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주목했습니다. 아래와 같이 대화록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마르다①]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①]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②]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님②]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③]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중간에 마리아와 유대인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③] 그를 어디 두었느냐?
[마리아/마르다④] 주여, 와서 보옵소서.
(예수께서 이 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④] 돌을 옮겨 놓으라.
[마르다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후 예수께서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위 대화록을 음미해 보면서, 저는 주님의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르다에게 비젼의 믿음이 부족함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잘 대답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소위 동문서답을 서로 주고받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는 산야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멀리 있는 산봉우리들과 능선들이 아주 높은 곳만 언뜻 보입니다. 그렇지만, 내게 더 가까이 있는 골짜기나 들판은 짙은 안개 때문에 한치 앞을 내다보기가 힘들지요. 마르다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멀리 내다보이는’ 부활의 주님으로서의 예수님을 그녀는 잘 믿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가까이에 있는’ 오라비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예수님을 그녀는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네 차례에 걸친 유도심문(?)에도, 그녀는 끄떡도 않고 눈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마르다①]의 고백은 훌륭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①]에서와 같이, 나흘 전에 무덤에 들어간 나사로를 다시 즉각 살릴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르다②]는 이렇게 얘기하는 듯합니다. “지금 당장은 안될걸요? 어차피 부활 때는 모두가 살아나니 그때나 돼서야 나사로도 살아나겠지요.”
예수님은 잠자고 있는 그녀의 ‘비젼의 눈’을 깨웁니다. [예수님②]는 그녀에게 ‘먼 미래의’ 주님을 보지 말고, ‘지금 현재의’ 주님(=살아서 믿는 자)을 바라보라고 일깨웁니다. [마르다③]의 고백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훌륭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그녀는 마치 사도신경이나 소요리 문답을 외우듯이 그렇게 읊조리고 있습니다. ‘멀리 있는’ 비젼을 보았지만, ‘가까이 코앞에 있는’ 비젼은 아직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③]에서 예수님은 이제 물리적, 현실적 시각으로 마르다를 일깨우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호시탐탐 책잡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동네 사람들과 제자들도 지켜보고 있었겠지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주신 예수님의 메시지는 먼데를 보지말고 가까운 현실을 보고, 그 곳에서 예수님이 무었을 하실 수 있는지 묻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안타까움이 보이는지요?
[예수님③]의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앞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로 [마르다①]의 후반부 고백이지요. “나는 이제라도 주님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 고백을 [마르다④]에서 했더라면, 주님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주여, 와서 보옵소서.”라는 이 단순한 대답에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사로를 주님께서 ‘지금’ 살릴 수 있다고 아직은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르다의 비젼의 한계를 보셨습니다. 제자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마르다와 같은 한계상황에 부딪혀 있었습니다. 나흘 동안이나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의 주검이 다시 살아날 것을 소망하거나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순간 주님은 철저히 ‘홀로’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눈물은 나사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아울러, 비젼의 믿음이 부족한 이들에 대한 주님의 안타까움과 연민과 통분함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는 죽었고,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의 친구들과 이웃들도,
그들은 그저 그렇게 슬픔의 눈물에 젖어 있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릴 수 있는 주님이 바로 곁에 계셨음에도
누구 하나 주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단지, 나사로가 죽은 후 나흘만에 나타난
주님이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주님은 가려진 그들의 눈을 열려고 하십니다.
주님은 닫혔던 비젼의 믿음을 흔들어 깨우십니다.
[예수님④] “돌을 옮겨 놓으라!”
닫혔던 무덤 문을 열어라!
너희 눈을 가리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
너희 눈에 있는 들보(마7:5)를 지금 빼내라!
가려진 너희 영안을 치켜뜨라!
덧그림만 보지 말고 밑그림을 보아라!
비젼의 시작이요 완성자이신 주님께서 바로 너희 곁에 계신다.
주님은 이렇게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안타깝습니다.
주님의 네번째 멧시지에도 그들의 영은 아직도 잠자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이제 스스로 무엇을 하실지 명확하게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눈먼 장님처럼 ‘코끼리 다리만’ 만지고 있었습니다.
[마르다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나사로의 주검에서 나오는 죽음의 냄새를 그들은 맡을 수는 있었으나,
바로 곁의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냄새를 안타깝게도 맡을 수 없었습니다.
아, 주님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탄식과 연민과 안타까움이 교차된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⑤] “마르다야, 아직도 나에 대한 믿음이 없느냐?
네가 이제라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것이 마르다에게 주신 주님의 마지막 멧시지였습니다.
이어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와 이들을 위한 기도를 드립니다.
아, 그제야 마르다는 주님이 무엇을 하실지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은 열렸습니다.
(이것이 비젼의 1단계입니다)
옆에 서있는 마리아의 손을 꼭 쥡니다.
마리아도 눈짓으로 무언의 동의 표시를 합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비젼의 2단계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하늘과 땅이 진동할 큰 소리였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믿음이 주님의 말씀에 얹어졌습니다.
주위에 서있던 친구들과 제자들의 비젼도 얹어졌습니다.
(이것이 비젼의 3단계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옵니다.
얼굴은 수건에 둘둘 말려 쌓인 채로 그는 나왔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눈물에 나도 울었습니다.
나를 향한 동정과 연민의 눈길을 주시면서,
비젼의 믿음이 없는 나를 안타까와 하시면서,
주님은 연약한 나를 위해 그렇게 우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내 안에 계신 주님은 이렇게 오늘도
말할 수 없는 ‘탄식과 눈물’로써
나를 위하여 기도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눈물과 나의 한없이 부족함을 깨달으면서, 저는 롬폭 도서관에서 성경 10독째를 하던 2006년 11월 19일 오후에 그저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습니다. 아, 좋으신 주님! 극심한 몸살과 편도선염으로 고통 속에 있었던 지난 며칠.. 그렇지만 주님의 은혜 주심과 바라봄의 법칙을 몸으로 체험케 하셨고, 기적의 치유를 맛본 바로 그날.. 그 감격적 치유의 은혜에 더하여, 주님의 눈물을 또한 체험케 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아, 은혜의 쓰나미여.. 그러기에 주님의 눈물은 제게 더 큰 감동과 감격으로 다가 왔습니다. 이 글을 처음 정리했던 12월 2일 오후 롬폭의 맑은 햇살에, 그 날의 감동을 되새기며 글을 쓰다가 다시 크나큰 눈물이 쏟아짐도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부족한 나를, 특히 부족한 내 비젼의 믿음을 그렇게 도우시는 주님의 눈물과 이 감격을 평생 간직하고 싶습니다.
롬폭에서의 마지막 두 번의 주일(12월 10일 및 17일)은 제게 잊을 수 없는 감격의 날이었습니다. 12/10일 예배 때의 성경 봉독(Scripture Reading) 시간은 흑인 친구인 키이쓰(Keith)가 해 주었습니다. 제가 평상시 성경에 대한 깨달음을 간간히 나누는 거의 유일한 영적 친구였습니다. 전날 12/9일 점심시간 때, 무슨 말씀을 전할 것이냐고 묻는 제 질문에 키이쓰는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얘기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제가 은혜를 많이 받았던 말씀이자 그 시점에 가장 묵상을 많이 했던 말씀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영적인 전율도 느껴졌습니다. 바로 키이쓰와 함께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서로의 깨달음을 깊이 나누었습니다. 그 다음 12/10일 주일날 예배 때, 키이쓰는 요11:1-44의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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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저(키이쓰)는 마르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믿음의 단계를 높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그녀가 세가지 다른 믿음의 단계를 접하고 이를 높여갔는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그녀의 첫 믿음은 제한적 믿음(Limited Faith)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21절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마르다는 그녀의 믿음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있기는 하지만, 시공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진정한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제한적 믿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믿음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제한해 놓은 ‘바운더리(Boundary)’ 안에서만 ‘믿음의 룰(Rule)’이 작동하는 것이지요. 이 바운더리를 넘어서면 그녀가 신봉하는 믿음의 룰이 깨지게 됩니다. 그녀가 정해놓은 바운더리는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나와 함께 계셔야만이 내가 기적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녀와 오빠 나사로와 함께있지 못함으로 나사로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제한적 믿음을 높여가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여러가지 힌트와 격려의 말씀들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하시고자 했던 말씀은 “내가 여기 있으나 없으나 나는 나사로를 살릴 수 있음을 네가 믿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마르다는 아직도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레벨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조금 더 발전한 두번째 믿음의 단계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저는 이것을 사실적 믿음(Factual Faith)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27절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이 말씀은 그녀의 위대한 신앙고백이자 우리 모두가 해야 할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Fact)에 대한 믿음이지, 예수님이 진정으로 바라는 믿음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레벨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녀에게는 조금 더 교육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마르다와 또한 마리아의 믿음을 높이기 위해 나사로가 묻혀있는 무덤으로 가야 했습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여기서 돌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돌은 우리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입니다. 돌은 우리 영안을 가리는 들보입니다. 돌은 우리 마음밭에 여기저기 자라고 있는 의심의 열매들입니다. 이 돌들을 치워야 합니다. 이 돌들을 옮겨 놓음으로써 우리 믿음은 비로소 장애물없이 자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돌을 치우라고 하는 예수님의 명령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예수님이 다시 한번 그녀의 마음을 일깨웁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예수님은 이제 그녀에게 무제한적 믿음(Unlimited Faith)을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무제한적 믿음이 제가 생각하는 마지막 세번째 단계의 믿음입니다. 진정한 믿음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내가 신뢰하고 믿을 때 가장 좋은 것으로 나에게 주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무제한적 믿음입니다. 이는 내 속에 막힌 의심과 편견의 ‘돌’을 옮겨놓음으로 비로소 가능한 것이지요.
마르다는 마지막 순간에 무제한적 믿음의 단계로 올라옵니다.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무제한적 믿음이 얹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감격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제한적 믿음, 사실적 믿음에 머물러 있지 말고 무제한적 믿음으로 우리 레벨을 끌어올려 이곳 롬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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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쓰의 열정적 메시지에 박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도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12/10일 그날 밤, 잠자리에 눕기 전 묵상의 기도시간에 저는 키이쓰의 메시지와 주님의 눈물을 다시 생각하면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곤 한정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과 콧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주님의 눈물에 감격한 저의 세번째 눈물이었습니다. 저와 키이쓰의 영혼을 만나게 하시고, 같은 말씀에서 같은 관점으로 묵상하며 깨달음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제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 키이쓰 형제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출소하기 직전의 2006년 12월 17일, 롬폭에서의 마지막 주일 예배도 감사와 감격이 넘쳐났습니다. 넬슨 목사님은 제게 간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시간에 저는 주님의 눈물에 대한 제 깨달음을 나누고 롬폭에서 제가 은혜 받았던 전반적 간증도 곁들였습니다. 그곳 믿음의 형제들에게 전해준 마지막 제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형제 여러분! 저는 이번 주일을 마지막으로 여러분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제게 이렇게 크나큰 은혜를 내려주신 우리 주님은 여러분과 늘 같이 계십니다. 여러분이 피곤하여 낙심이 될 때 제 이름 Smiling Sunny를 기억해 주십시요. 8개월의 이곳 생활 동안 셀수 없는 눈물의 은혜를 주시고, 12번 성경을 읽게 해주신 Sunny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혹시 Sunny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웬 Korean guy가 있었는데 성경에 심취해서 주님이 주신 은혜의 강물 속에 빠져있다가 롬폭을 나가더라, 하는 정도로 기억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이 모든 일을 이루신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Glory to the Lord! Praise the Lord!”
넬슨 목사님도 설교시간에 제 얘기를 예화로 들어 주셨습니다. 예배의 끝부분에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특별순서를 또한 배려해 주었습니다. 십여명의 형제들이 저를 둘러싸 손을 제 몸에 대고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기도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제 허리 이상은 형제들의 손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슈가베어와 키이쓰 형제를 필두로 하여 기도가 돌아갔습니다.
뜨거움의 순간들이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기도와 축복의 손길들이 제게는 지난 8개월간의 고생을 일거에 씻겨내리는 주님의 위로의 강물이었습니다. 그 위로와 기쁨의 순간, 왜 나의 콧물과 눈물은 주체할 수 없는 것일까요? 손을 들어 눈물을 홈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저는 형제들의 손길에 둘러싸여 마냥 주르르 흐르는 눈물을 속절없이 떨어뜨리고만 있었습니다. Thanks, my Lord! 그저 수없이 그렇게 대뇌었습니다. 마무리하는 목사님의 기도 소리에도 눈물이 섞여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감동의 순간들은 저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롬폭 훈련소에서의 마지막 주일은 이렇게 은혜의 강물로 채워졌습니다. 제게 은혜주신 주님께서 아직도 그곳에 남아있는 장기수 형제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로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30년 넘게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 인생의 웨이브 6기, 지난 2006년 롬폭의 8개월간은 주님께서 주신 말씀 체험이자 눈물의 웨이브였습니다. 그 눈물 속에서 말씀의 보화를 하나하나 캐내 가는 ‘기쁨’은 오히려 통쾌하고 후련한 경험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제 생애에 가장 축복된 기간 중 하나라고 감히 고백드릴 수 있습니다. 부족한 저를 은혜 가운데 훈련시켜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체험을 허락하여 주신 우리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