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에서 본 분깃신앙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너무 유명하여 전체 줄거리를 여기에서 굳이 소개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제 관심의 초점은 어떻게 방탕했던 둘째 아들이 분깃신앙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 중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미리 받습니다(12절). 같은 절을 자세히 보면, 둘째 아들 뿐만 아니라 첫째 아들도 자기 분깃을 받았습니다. 즉, 아버지는 가지고 있는 재산을 첫째와 둘째에게 각각 나누어 준 것이지요. 중간의 얘기는 생략하고, 이후에 둘째 아들은 자기의 분깃을 먼 나라에서 모두 탕진하고, 갖은 고생 끝에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아버지가 반기며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를 엽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불만이 가득한 첫째 아들이 나옵니다. 32절 아버지의 대답을 새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씁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네 것이다. 그런데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 관심은 둘째 아들의 미래입니다. 과연 둘째 아들은 잔치만 한 번 받고 더 이상 아무 분깃도 없이 살아가야 할까요? 아버지의 말씀을 보면 분명 둘째 아들은 용서를 받았고, 아들로서 다시 받아들여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 돌아올 분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말 둘째 아들은 아무 분깃도 없을까요? 저는 그가 따로 더 받을 분깃이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오신 분들은 이제 고개를 끄떡일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아버지 자신이지요. 아버지가 그의 분깃으로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무슨 궤변인가, 하고 생각하지 마시고 곰곰히 묵상해 보십시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분깃 신앙의 첫걸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분깃은 재산만이 아닙니다. 사람도 분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아직도 아버지가 그의 분깃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단, 이 결정은 둘째 아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버지가 할 일입니다. 아버지가 스스로 그의 분깃이 되어 줌으로써, 둘째 아들은 ‘복권된’ 아들의 자격으로 아버지의 집에 계속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 무한히 자비로운 그 아버지만이 자기 자신을 둘째 아들의 분깃으로 선포하고, 둘째 아들의 권리를 되살릴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 분깃을 ‘은혜로, 값없이’ 거저 받는 것이지요.
이렇게 됨으로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분깃은 명확해 집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분깃으로 받았지만, 이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분깃으로 받았습니다. 어떤 분깃이 더 클까요? 아버지의 재산일까요? 아버지의 마음일까요?
한 때 탕자였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가지고 있던 분깃을 다 탕진하고 주님께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주님은 아무 조건 없이 나를 받아주시고 주님께서 친히 나의 분깃이 되어 주셨습니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나의 분깃은 나의 행위, 지식, 노력, 명예 등이었지만, 나는 이 모든 것에 실패했습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나만이 너의 분깃이니라.”
이 모든 것을 깨달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어서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렸더니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되찾은 내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자꾸나.“
라고 기뻐하셨지요.
그리곤 또 말씀 하셨지요.
“아들아 걱정 마라.
너는 내 아들이니라.
내가 너의 분깃이 되어 주마.
그래, 나는 네 분깃이야.“
아버지, 나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젠 아버지만이 나의 기쁨입니다.
아버지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정말로 아버지만이 나의 유일한 참 분깃입니다!
분깃은 사랑입니다.(아가서 다시보기)
분깃은 나눔이요, 사귐입니다. 분깃은 사랑입니다. 내 분신(=분깃)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고 그 분신으로 인해 희노애락을 같이 합니다. 엄마와 자식 간의 사랑과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나의 분깃’이라는 선언은 양방향입니다. 내가 주님의 분깃이기에, 주님이 나의 분깃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비밀을 아가서에서 엿보았습니다. 남녀 간의 아름답고 감미로운 사랑의 노래, 정확히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 간의 이 사랑 이야기는 분깃을 나눈 사이인 주님과 나의 관계와도 비슷합니다. 새번역 성경을 기준으로 이렇게 고쳐 노래하고 싶습니다.
(나) 나에게 입맞춰 주세요, 숨막힐 듯한 님의 입술로.
님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하답니다. (1:1)
(주) 나의 사랑 그대는 바로의 병거를 끄는 날랜 말과 같소.
땋은 머리채가 흘러내린 님의 두 볼이 귀엽고,
구슬 목거리가 감긴 님의 목이 아름답소. (1:6)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아름다워라, 비둘기같은 그 눈동자. (1:15)
(나) 나의 사랑, 멋있어라.
나를 이렇게 황홀하게 하시는 그대!
우리의 침실은 푸른 풀밭이라오. (1:16)
(주) 바위 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숨은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 그 사랑스런 모습을 보여주오.
그대의 목소리, 그 고운 목소리를 들려주오. (2:14)
(나) 님은 나의 것, 나는 님의 것.
님은 나리꽃에서 양을 치네.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나의 님이여, 노루처럼 빨리 돌아와 주세요.
베데르산의 날랜 사슴처럼 빨리 오세요. (2:16-17)
(주)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문 잠긴 동산,
덮어놓은 우물, 막아버린 샘.
그대의 동산에서는 석류와 온갖 맛있는 과일,
고벨 꽃과 나도 풀, 나도풀과 번홍 꽃,
창포와 계수나무 같은 온갖 향나무,
몰약과 침향 같은 온갖 귀한 향료가 나는구나.
그대는 동산에 있는 샘, 생수가 솟는 우물,
레바논에 흐르는 시냇물이라. (4:12-15)
(나) 나는 님의 것, 님은 나의 것.
님은 나리꽃 밭에서 양을 치네. (6:3)
(주) 오 나의 사랑, 나를 기쁘게 하는 나의 님,
그대는 어찌 그리도 아리땁고 고운가? (7:6)
(나) 도장 새기듯, 님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남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참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8:6)
(주) 동산 안에서 사는 그대,
동무들이 귀를 기울이니
그대의 목소리를 들려주오. (8:13)
(나) 님이여, 노루처럼 빨리 오세요.
향내 그윽한 이 산의 어린 사슴처럼,
빨리 오세요. (8:14)
주님만이 나의 분깃
제목이 바뀌었습니다. 도입부에서는 ‘주님은 나의 분깃’이었는데, 이제 신약편에서는 ‘주님만이 나의 분깃’이 된 것이지요. 두 말의 어감 차이를 자세히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12지파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호수아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땅의 경계를 정하여 12지파 간에 ‘분깃’을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12지파 중 가나안 땅의 분깃을 받지 못한 지파가 있었지요.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는 지도자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속한 지파로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다른 지파처럼 가나안 땅의 분깃을 얻기 보다는 더 영광스러운 일인 하나님과 성전을 섬기는 일을 직분으로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 자신을 이들의 분깃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니라.”(신 10:9)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요! 세상의 분깃은 없으되, 하늘의 분깃이 나의 것이고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분깃 신앙으로 살아온 믿음의 선진들을 저는 곳곳에서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예언자들이 주님을 분깃으로 살아왔습니다. 제사장들을 비롯한 모든 레위 족속도 그들의 ‘삶의 터전’이 하나님이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 말씀이 너무나 이기적인 것 같아 쉽게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주님이 나의 소유물, 나의 분깃이라니! 어찌 보면 참람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살아있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우리들에게 보혜사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바로 주님의 영이시지요.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성령님은 내 안에 내주하시어 나와 함께, 나의 숨결 중에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현재의 성령시대에는 믿음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나의 분깃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 중에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분깃이지만, 주님이 나의 많은 분깃 중에 하나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선조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고 살았습니다(히11:16).
그러므로, 하나님 한 분 만이 나의 분깃이어야 하겠습니다. 즉, ‘주님은 나의 분깃’에서 ‘주님만이 나의 분깃’으로 나의 관점을 송두리째 바꿔야 할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를 기억하십시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첫 번째 받은 분깃에서는 실패했습니다. ‘아버지만이 나의 분깃’임을 깨닫는 그 때, 그는 아버지의 진정한, 참된 아들이 된 것입니다.
결론으로 저는 이렇게 외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나의 분깃이 없다!
독일에는 나의 분깃이 없다!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분깃이시다!!“
4회에 걸쳐 "사랑"을 게시하고 있는데, 나머지 2번의 본문이 바로 탕자 구절입니다.
형제님과 조금 관점을 달리하여 해석하고 있는데, 다른 관점을 통해 더 깊은 깨달음을 얻으라는 주님의 당부인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 뵙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