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0월 하순, 영글어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던 나날이었습니다. 제 나이 20대 후반, 회사에 입사해 2년차로 열심을 내어 근무하고 있었고, 신앙 생활도 집 근처 서울 용산동에 있는 중형교회에 어머니, 형님과 같이 다니면서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작스레 제게 큰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교회 내 청년부의 한 자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꾸준히 청년부 활동을 같이 하면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던 이 자매가 최근 들어 맞선을 보는 횟수가 부쩍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는 어느 전도사님, 이번 주는 어느 장로님 자제.. 집안에서 빨리 시집 보내려고 바짝 조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위의 언니도 전도사님과 결혼을 한 뒤라 이제 차례가 된 것이었지요.

평상시 서로간에 남다른 정분 같은 것은 없었던 자매인지라 처음엔 별 생각없이 흘려버렸지만, 며칠 지나면서 그녀에 대한 생각이 제 머리 속에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자매에 대한 제 마음 속의 비중이 그동안 나도 모르게 많이 쌓여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큰 키에 가냘픈 체구였지만, 믿음 생활에 있어서는 강건의 열심을 내었던 여러 모습들.. 특히, 어느 여름 수련회 때 간절히 기도하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내 심상에 박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얘기 못하고 2주 정도 깊은 생각과 고민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연애를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남녀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바도 아니었으나, 이제는 평생을 같이할 인생의 반려자를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을 제 기도제목으로 주님께 올려 드리고, 응답을 구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매를 향한 제 열정이 점점 더 강해짐을 느꼈고, 기도 중에 확신이 왔습니다.

11월 초순의 어느 날, 저는 그녀를 회사 근처의 찻집으로 불러 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썩 낭만적인 프로포즈는 아니었지만, 저는 진심을 담아 내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매주 교회에서 만나는 사이었지만, 단둘이 만난 첫 자리에서 청혼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상치 못했던지라, 상당히 당황했던 표정이었습니다. 나중에 하는 말, 그냥 교회에서 많은 오빠 중의 한 사람이었던 어느 사내가 갑작스레 “널 사랑해” 하고 얘기하니, 조금은 황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속타는 기다림은 며칠 가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주일, 그녀의 집안에서 ‘교제해도 좋다’는 승낙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녀의 언니가 중간다리 역할을 하여 부모님을 적극 설득했다고 했습니다. 제 쪽의 어머니에게도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 때부터 저희는 양가 부모님의 승인 하에 공식적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의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당분간은 몰래(?) 데이트를 하라는 주문이었습니다. 청년부 활동 시에는 서로가 모른 척하고, 둘이 만날 때는 손잡고 데이트 하고.. 저희는 이듬해 5월 결혼식이 있을 때까지, 그렇게 6개월간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 했습니다.

이 6개월의 교제기간 동안 저희는 하루도 빠짐없이 만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때론 교회에서, 때론 그녀의 집에서, 때론 회사 근처 찻집에서.. 어디를 가리지 않고 저희는 기회를 만들어 만났습니다. 어찌보면 작은 기적이라고도 여길 정도로 매일 만났고, 한번씩은 누구나 다 겪는 사랑의 열병이라고 보기엔 이 만남의 체험이 저희에겐 좀더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초기 만남 때부터, 저는 그녀에게 함께 성경공부 하기를 제의했습니다. 평상시부터 생각해 왔던 에베소서를 함께 공부하며 나누고, 이를 통해 부부의 비밀을 깨닫기 원했습니다. 에베소서는 제게 ‘연합의 비밀’을 간직한 말씀으로 이전부터 다가왔습니다. 이 연합의 비밀은 두가지, 즉 그리스도와 교회의 하나됨, 그리고 부부간의 하나됨이었습니다.

에베소서를 공부한다고 해서, 따로 교재나 가이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시간 날 때, 성경을 함께 읽으며 묵상과 깨달음을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6장 끝까지 지속되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초에 기대했던 것 이상의 효과가 있었습니다. 부부의 하나됨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됨의 본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모든 충만과 연합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이같이 에베소서를 통해서, 우리는 서로간의 믿음을 확인하고, 부부의 하나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부부의 롤모델(Role Model)이 어떠한지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희가 얻은 조그마한 깨달음은 하나됨의 비밀이었습니다. 그것을 저희는 에베소서의 연합됨에 추가하여, 전도서에서 표현된 ‘삼겹줄’에서 발견했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 부부 간의 사랑이 아무리 지고하고 순전하더라도, 이것은 결국 인간적인 사랑이 아닙니까?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우리는 얼마나 불완전하고 부족한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저희는 삼겹줄의 비밀을 주님에게서 찾았습니다.

부부가 피차 사랑하는 사랑이 두겹줄이라면(나에게서 한겹, 그녀에게서 한겹), 이 삼겹줄로 표현된 제3의 줄은 무엇일까? 아, 제3의 줄.. 이것이야말로 주님의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아가페 사랑이 부부간의 사랑에 얽혀 있을 때, 이것이 삼겹줄의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희가 깨달은 것은 이러했습니다. 우선 우리 각자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점차 시들어 식어버릴 것이라는 사실.. 내가 주님 안에 거함으로 주님을 진정 사랑하고, 그녀도 주님 안에 거함으로 주님을 진정 사랑할 때, 주님은 우리 둘 사이의 촉매제가 되어 우리의 인간적인 사랑을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해 주셔서 사랑의 삼겹줄로 완성시켜 주신다는 사실.. 이같이 주님만이 부부사랑의 촉매요, 완성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동아줄을 붙들고 인생을 살기에, 늘상 서로 간에 지지고 볶고 싸울지라도 예수의 줄로 인해 결국은 하나로 연합될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에베소서를 같이 공부하면서, 저희는 자연스레 그리스도인 부부의 롤모델을 발견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초기 개척자였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만난 것 입니다. 이들 부부를 처음 성경에서 만났을 때, 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초대교회 역사의 산 증인이었고, 바울과 다른 사도들을 도와 교회를 개척했던 제 2세대의 대표자로 인식 되었습니다. 아울러 이들의 모델을 따라, 저희 부부도 그렇게 살아가도록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저희가 닮아야 할 점들을 꼽아 봤습니다.

  첫째, 그들은 한결같이 부부가 함께 일했습니다. 부부 간의 하나됨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성경에서 그들 부부의 이름이 각각 따로 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달리 말해, 그들은 한 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의 사역도 한 몸, 한 팀으로 일했을 것입니다.
  둘째, 남편인 아굴라보다는 아내인 브리스가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은, 아굴라가 그만큼 브리스가를 사랑해주고 위해주며, 또한 자신보다 앞세워 주었다는 의미일 겁니다. 아굴라의 브리스가 사랑을 제가 배워야 할 점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셋째, 그들은 디아스포라(Diaspora)였습니다. 아굴라는 유대인으로서 고토 유대 땅에 살지 못하고 정처없이 떠도는 생활을 했던 나그네였습니다. 그는 아내 브리스가를 로마에서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도 로마에서 고린도로,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다시 로마로, 그리고 다시 에베소로 움직이는 그들의 여정은 본향을 향한 나그네 인생길이었습니다. 그들의 나그네 정신을 배우기 원했습니다.
  넷째, 말씀과 복음을 향한 열정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평신도 사역자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들을 브리스가와 아굴라 집사라고 표현하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아무튼 이들은 말씀과 복음에 온 열정을 바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정통해서, 에베소에서는 전임 사역자인 아볼로를 조용히 불러내어 별도로 가르침을 주었을 정도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들 부부를 가리켜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롬16:4)고 표현한 대목에서는, 이들의 목숨을 건 헌신에 제 목이 메였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말씀, 오직 복음만을 붙들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 부부가 저희의 롤모델이 됨은 당연지사였지요.

   그대는 브리스가, 나는 아굴라..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오.
   한 방향, 한 마음, 한 몸으로
   우리 그렇게 주님 앞에서 살아 가자오.
   아굴라의 브리스가 사랑같이
   나도 그대를 사랑하기 원한다오.
   주님 안에서 우리 서로
   사랑의 삼겹줄을 엮어 가자오.
   인생은 본향을 향한 나그네 길,
   우리 손잡고 그 길을 함께 가자오.
   말씀과 복음의 사명을 위하여
   우리 그렇게 한목숨 내어 걸자오.
   그대는 브리스가, 나는 아굴라..

아름다운 만남의 체험은 그렇게 6개월간 지속 되었습니다. 뜨거움을 넘어선 격정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랑의 마법에 걸린 홍역 기간이라고나 할까요?^^ 이것이 제게는 웨이브3기- 만남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1986년 5월 10일, 우리 만남의 첫 장소였던 교회당 안에서였습니다.



(5/31일 후기)
웨이브3기를 쓰면서 조금은 후회를 했습니다. 왜 웨이브를 하나 더 만들어서 이런 살가운(!) 고백을 했어야 했는지? 누구에게나 있는 러브 스토리를 굳이 세세히 소개 했어야 했는지? 아내가 동의하지도 않을 내용을 지어서 만든 것은 없는지? 그러나 이것이 그때 당시 내 진정성이요, 내 안의 바램인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단지 이후의 실행력이 부족했습니다.ㅠㅠ 역시 문제는 내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추가 고백을 꼭 해야겠습니다.

저는 결혼 이후로 아굴라처럼 살지 못했습니다. 아굴라 같은 믿음의 삶을 제대로 유지하지도 못했습니다. 결혼 이후 아내는 저의 본래 모습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있었고, 우리는 여타 부부처럼 티격태격 부부싸움도 잦았습니다. 상호간의 생리적 체질적 감성적 심리적 차이를 극복하고 융화시키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지금도 노력 중입니다^^)

그래도 한가지 맞은 것은, 저희가 국제적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한국-독일-한국-영국-한국-미국-한국-대만-다시 독일로.. 우리는 그렇게 나그네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웨이브5기에서 교회 개척 사역도 체험해 봤고요. 그러니까 웨이브이기는 웨이브인거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튼 주님은 이후로도 저희 부부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담금질하시고 훈련시키셨습니다. 저희 안에 계셔서 간섭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6/2일 또 후기)
이 글을 써 놓은 이후 작은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노트북과 데스크탑을 오가며 쓰다보니, 주일 밤과 월요일에 걸쳐 써 놓은 글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컴에 남아있는 것은 최초에 끄적인 아이디어 몇 개 뿐이었습니다. 어느 쪽도 세이브가 안된 채로 템프 상태에서 작업을 했던 모양입니다. 다행히 프린트본 하나를 뽑아 5/31일 밤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아내가 최종 심사관이자 제 컨설턴트이거든요.ㅎㅎ 그 이후에 제가 좀 바빠서 아내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글이 다 날라가 버렸으니 나대신 타자를 다시 쳐 달라고. 그래서 이 글은 아내의 수고로 다시 완성된 것입니다. 물론 중간에 여러 표현들이 아내의 방식대로 순화되고 수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웨이브3기는 자연스레 저희 부부 공동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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