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왕상18장,19장] 엘리야 묵상

조회 수 1226 추천 수 79 2010.12.18 21:57:33

샬롬~ 지난 주 정상진 선교사와 식사 중에 엘리야 이야기가 나와 이곳에 다시 올립니다. 은혜와 중보의 사람 엘리야, 절망 속에서도 은혜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엘리야를 다시금 묵상하면서, 시험을 앞둔 김유상 형제님과 여러가지 어려움을 직면한 모든 형제 자매님들께 조그마한 힘이라도 되기를 소원합니다. 왕이신 주님, 오시옵소서... 메리 크리스마스!
**


1부: 은혜와 중보의 사람 엘리야

본문: 열왕기상 18:41-46

내용 요약
은혜의 대표자 엘리야는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이를 응답해 주신다.

붙잡은 말씀
41절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42절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4절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46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느낌 및 묵상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능력의 예언자요 큰 믿음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중보자이기도 했던 것 같다. 본문도 중보하는 사람으로서의 엘리야로 내게 다가왔다. 그는 그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중간자로서, 대언자로서, 또한 중보자로서의 위치에 서 있었다.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과 같은 것이 아닐까? 구약의 두 대표자인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 상에 나타났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로서 뽑혔을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무엇의 대표자인가? 엘리야는 은혜의 대표자로서 선택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은 율법과 은혜를 동시에 완성하신 분이 아니신가?

엘리야가 은혜의 대표자라고 한다면, 그 주요 이유로서는 단연 그가 중보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는 비를 내리지 않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기적이 무엇인가?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지 않는 것이 기적이자 은혜이다. 왜 가뭄이 시작되었나? 후대 역사가들은 아합왕의 정치적 치적에 대해 얘기한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만들었고 그 시대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 외국의 문물이 거침없이 들어왔고, 왕비를 이방여자 이세벨로 맞는 등 외교적 수완도 남달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큰 해악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스레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여호와와 바알이 동등한 경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영적으로 볼 때 통탄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어찌 이를 가만히 보고 계셨겠는가?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이스라엘 전역에 가뭄의 재앙을 선포한다. 여기에 주님께서 성도와 비성도 간에 다르게 대우하심을 본다. 비성도는 죄악 속에 뒹굴더라도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 (롬1:24,28). 그것 자체가 주님의 형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도는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도록 때리고 연단하고 일깨우신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가뭄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기적이다.

3년반(눅4:25)의 가뭄 기간 동안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진다. 전반기에 엘리야는 편한 마음으로 그릿 시냇가에 머물면서 까마귀가 물어오는 음식으로 공궤를 받았다. 가뭄의 후반기에 그는 본격적인(?) 활동을 한다. 사르밧에 사는 이방여인, 그것도 과부에게 몸을 의탁하며 그는 기나긴 중보의 씨름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전반기는 시냇물이 말라버릴 시간이므로 길게 잡아야 1년 이내일 것이다. 따라서, 후반기 그의 중보기도는 최소한 2년반 동안 지속되었으리라. 왜 엘리야가 은혜의 대표자인지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사르밧 과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엘리야를 만난 것이 전적인 은혜가 아닌가?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처럼,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들어가서 그 가정을 가뭄에서 건져 주었다.

엘리야의 중보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외적으로는 은혜의 단비를 하루속히 부어주십사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면의 실질적 기도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중보가 아니었을까? 갈멜산의 대결에서 이것은 확실해졌다. 이스라엘 백성의 근원적 죄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양다리 걸치기가 아닌가? 여호와도 믿고, 바알도 믿고.. 그들에게는 더 많은 신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돈과 재물의 신이다. 세속사회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신이지 않는가? 좋은게 좋은 거지.. 다다익선, 여호와도 좋고 바알도 좋고.. 그러나 진실은 무엇인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리라.” (마6:24)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엘리야에게도 옮아간다. 엘리야의 지리한 중보기도는 이렇게 시작되었으리라. 엘리야가 왜 낙타무릎이 되었을까? 본문의 반나절 짧은 기도로 그가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의 기도는 사르밧에서 지내는 기나긴 가뭄의 기간 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왔을 것이다. 아, 이스라엘을 위한 그의 눈물과 통곡이 들리는 듯 하다. 모세의 중보와 같이, 엘리야는 지난 2년반 동안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중보기도를 올려드리지 않았겠는가?

42절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라는 말씀..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다. 무릎 기도를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하면 낙타무릎이 된다. 낙타무릎의 특징은 양 무릎 사이가 오랜 기도로 자연스레 벌어져 얼굴이 그 사이로 들어가는 무릎이다. 이 낙타무릎이 엘리야의 무릎이다. 그의 무릎기도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19장에서 여러 차례 표현한 ‘여호와를 향한 열심’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심은 단순한 열정이나 열성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특심이었다!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유별난 열심, 그것이 특심이 아닐까?

물론 이 특심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에게 주어진 것이리라. 그러나 그 특심이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특심이 아니라 자가발전된 특심으로 변질되었다면? 어느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없이 자기만 열심을 낸 특심으로 바뀌었다면? 이것이 19장의 주제인 것 같다. 아무리 은혜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은혜의 원천인 주님을 보지 못하고 주변의 환경과 자신의 의만을 바라본다면, 은혜는 간곳 없고 절망과 시험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차원에서, 엘리야는 19장에서 새롭게 주님을 만나며 또 한 단계의 믿음의 도약을 하게 된다. 아무튼 지금은 하나님이 주신 특심으로 엘리야는 낙타무릎이 되기까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다. 하나님께서 그의 낙타무릎을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 아합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나님께서 어찌 들으시지 않으셨겠는가?

은혜의 대표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은혜 주심을 갈구했다. 은혜의 단비를 온 이스라엘 땅에 촉촉히 내려 주시기를 간구한 것이다. 하나님은 18장1절에서 비의 응답을 엘리야에게 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갈멜산 대결을 통해서 승리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이스라엘에 선포하셨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18:39) 아합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이에 동의한 결과로, 엘리야는 450명이나 되는 바알 선지자들을 일거에 진멸할 수 있었다. 엘리야는 이 승리함을 통해서 이미 큰 비의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그의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 아닌가? 가뭄의 원인은 이미 해소되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유일신앙을 회복하였다. 이제 은혜의 단비를 내리시지 않을 이유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 엘리야는 큰 비의 소리를 심령적으로 이미 들은 것이었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의 기도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은혜의 빗줄기 소리를 이미 믿음 가운데 확신한 엘리야는 단지 하나님의 때를 묻는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이전까지 단비를 달라고 안타깝게 드렸던 부르짖음의 기도와는 달리, 이제는 고요히 비를 주실 하나님의 때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기도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사환이 계속해서(일곱번씩) 바다 쪽에 구름이 올라오고 있는가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리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오히려 더 급하게 응답 주시고 은혜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2년반을 기도해 왔던 엘리야의 지금 반나절 기도는 정말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아, 믿음의 기도! 아, 은혜의 단비!

믿음이 무엇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믿음을 정의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아닌가? 엘리야의 기도에서 믿음의 증거는 단계적으로 나타남을 본다. 1단계는 듣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10:17) 심령적으로 주의 음성을 들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큰 비의 소리를 엘리야는 들었다. 2단계는 보는 것이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11:1)이다! 다시 말해, 믿음의 눈은 바라는 것들을 실제로 보이게 한다. 주님의 설계하심에 따른 최초의 씨그널(Signal).. 그 씨그널, 덧칠하기 전의 그 밑그림을 보는 것이다. 엘리야는 사환을 통해서 바다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을 보았다. 그리고 그 구름을 본 순간 그는 기도를 멈췄다.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졌고, 그 하나님의 때가 도래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엘리야의 기도는 이것이 전부였는가? 아니다. 또 하나의 다른 기도 내용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합을 위한 기도였다. 46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이 얼마나 놀라운 기사인가? 엘리야가 마라토너가 되었다는 얘기다. 갈멜산에서 아합의 왕궁 이스르엘까지의 거리는 60km 정도라고 한다. 그 먼 거리를, 앞이 한치도 안 보이듯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씨 가운데서 엘리야는 달려갔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합 앞에서”, 즉 아합을 태운 마차 앞에서 그는 이스르엘로 가는 길을 앞서 달리며 가이드를 해 주었던 것이다.

왜 그가 갑자기 마라톤을 하며 아합의 가이드가 된 것일까? 하나님이 가만있는 엘리야를 느닷없이 강압적으로 시키신 일일까? 낙타무릎을 하고있는 엘리야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노쇠한 나이에 뜀박질 당하는(?) 엘리야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나는 이 사건 뒤에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다. 엘리야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그를 뛰게 하셨을까? 분명 이것은 엘리야가 자청해서 구했을 것이다. 기나긴 중보의 기도가 응답의 결실을 맺는 오늘, 엘리야는 지도자 아합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 아합의 일정은 오늘 왕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평상시 같으면 쉬운 길이지만, 극심한 폭우가 내리는 오늘은 자칫하면 길을 잃고 낭패를 보지 않겠는가?

그의 중보는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아합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보다도 아합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중보했던 것이리라. 그러기에, 그곳 지세와 형편을 잘 아는 엘리야가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겠는가? 그의 기도 내용이 이렇지 않았을까? “주여, 은혜의 단비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한가지 더 간구하옵나니, 우리의 지도자 아합이 길을 잃지않고 수월히 그의 처소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그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필요하시다면 길을 잘 아는 저를 써 주소서. 제가 기꺼이 앞장 서겠나이다.” 아, 아름다운 엘리야의 마음을 어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았겠는가? 어찌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겠는가?

마라토너 엘리야, 그는 위대한 중보자이자 은혜의 대표자였다. 주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그 주님의 마음을 따라 믿음의 무릎으로 기도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주님과 영적으로 교감하며 교제하는 ‘사귐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닐까? 그를 통해 중보신앙, 비젼신앙, 사귐신앙을 배우고 싶다.


적용 및 기도

엘리야의 중보신앙을 닮게 하옵소서
- 엘리야를 닮아 중보의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 엘리야에게 은혜로 주셨던 특심을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 침상에서라도 무릎꿇는 기도를 시작하겠습니다.

엘리야의 비젼신앙을 닮게 하옵소서
- 엘리야가 가졌던 비젼의 믿음을 제게도 주시기 원합니다.
- 제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영적 씨그널을 보기 원합니다.
- 날마다 허락해 주시는 기적의 삶을 누리고 체험해 가겠습니다.
  
엘리야의 사귐신앙을 닮게 하옵소서
- 엘리야가 체험했던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기 원합니다.
- 주님을 향한 사귐의 깊이와 영성이 더해가기 원합니다.
-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더 알아가겠습니다.
  
엘리야의 심정을 담아 기도합니다. 제 온맘을 얹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부: 엘리야의 절망과 회복

본문: 왕상19:1-14

붙잡은 말씀: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인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19:10, 14)


열왕기상 18장 QT를 묵상하고 쓰면서 내 다음 묵상의 제목은 자연스럽게 19장으로 넘어갔다. 18장에서 그 뜨겁고 충만했던 엘리야가 19장에 이르러서는 왜 하루 사이에 속수무책으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는지, 어떻게 엘리야는 절망과 시험에서 빠져 나오게 되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여러 신학적 해석과 명쾌한 설명이 이미 나와 있을 것이지만, 나는 10절과 14절에서 반복된 엘리야의 말을 붙잡았다. 이 말씀에 어느 정도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닐까?

엘리야의 말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다가온 관련 말씀은 로마서 7장24절에 나타난 바울의 탄식이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엘리야의 한탄과 바울의 탄식이 어쩌면 이렇게 유사할까? 물론 근원적 차이는 있다. 엘리야의 절망은 외적 환경에서 온 것이나, 바울의 탄식은 내적 영적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지만, 이 두 구절의 공통점은 ‘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둘다 오고갈데 없는 사면초가에 빠져있다. 절망 가운데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곤고한 사망의 몸이요 (바울), 또한 나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좇기는 한심한 신세였다 (엘리야).

그러면, 예수님은 똑같은 절망의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이것은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는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셨다. 당신의 상황이나 소원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했다. 이것이 주님의 승리의 비결이 아닐까?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만을 구하는 것만이 절망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절망 중에 곤고했던 사람들이 회복되는 것도 갑작스러운 국면으로 이루어짐을 본다. 특히 바울의 경우, 바로 그 다음 25절에서 영문도 모를 감사의 찬양과 함께 위대한 8장의 힘찬 승리 선언으로 이어진다. 그가 제시한 해답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7:25) 즉,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8:2). 그리고 이것은 ‘내’가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선언한다(8:3).

이것을 베이스로 해서 엘리야에게로 돌아가 본다. 엘리야의 근원적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저희’에 대한 엘리야의 착각이 보인다. 엘리야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사람은 ‘저희’(복수)가 아니라 이세벨이라는 여자 한 사람(단수)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일 힘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왜 그녀는 처음에 사자를 보내어 엘리야에게 알린 것일까? 이세벨의 힘은 남편 아합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합은 전날 갈멜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영광을 보았다. 최소한 그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요 능력의 종임을 눈으로 보았고 실감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세벨이 어떻게 엘리야를 죽일 수 있었겠는가? 힘을 가진 아합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은 불가능했다. 막말로 이세벨이 죽이려 든다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를 그냥 용인하겠는가?

베드로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날 밤에, 대제사장의 뜰 앞에서 그도 천추의 한을 남기지 않았던가? 한갖 여종 앞에서 그는 예수님을 세번 씩이나 부인하지 않았던가? 그 여종이 무슨 힘이 있다고?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아합을 설득하여 바알의 선지자들을 진멸했던 것이 불과 어제가 아니었는가?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살아계심을 엘리야를 통해서 보지 않았는가? 이세벨이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설계하신 대로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무엇을 염려할 것이 있단 말인가?

그의 두번쩨 착각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자기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7천이나 되는 사람들을 주의 용사로 예비해 두셨다. 왜 이것을 엘리야가 몰랐을까? 18장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회복을 이끌었고 그 결과로 바알의 선지자 450명을 진멸하며 승리를 이끌었지 않은가? 이미 국면은 전환되어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이 회복되어 갔던 것이다. 그가 묘사했던 절망의 상황은 18장이 아닌 17장에서의 가뭄 때의 일이었다. 그렇게 뛰어난 영성의 엘리야가 한순간에 어찌 이리 어두워졌을까?

베드로에게로 다시 돌아가 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이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은 직후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가르치셨고, 베드로가 즉각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예수님이 이에 대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얼마나 심각한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순식간에 칭찬이 책망으로 바뀐 것이다. 그 사이 사단이 베드로의 마음 속에 들어간 것이다. 불과 몇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엇이 베드로의 잘못일까? 예수님의 그다음 말씀이 정답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십자가에 대한 그의 반대는 사람으로부터 즉, 베드로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나왔던 것이다.

주님 없이도 나는 ‘주의 일’을 열심히, 아주 잘 할 수 있다. 주님 없이 나는 제자반에서 공부도 잘하고, 성가대로 열심으로 봉사하고, 간증도 잘 할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모본이 될 수도 있다. 때론 실제의 내가 이렇지 않는가? 안타깝게도 그것이 나로부터의 출발이었을 때, 그것이 내 의와 자랑이 되어버릴 때, 주님께서는 내 안에 설 자리가 없어짐을 본다. 예수님 때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사람들 아니었는가? 그들의 열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 스스로에게서 온 것이 아닌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2:17).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가차없이 채찍을 들었지 않은가?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엘리야의 이 모든 착각과 눈멈의 근본 원인은 ‘나’로부터의 출발 때문이 아니었을까? 엘리야의 특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분명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 특심이 그 자신의 열심으로 변질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없이 자가발전하는 열심으로 바뀐다면?

왕상19:10 및 14절에서 엘리야는 그의 특심을 기억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자신의 ‘특심만을’ 기억했다. 그 특심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주님의 자리는 어디이고 자신의 위치는 어디인지에 대한 은혜의 기억은 잠시 뒤로 한 채로.. 어느새 자가발전시킨 특심 하나만 가지고서 ‘하나님 없이’, 자기만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하나님을 향한 특심이 그의 자랑이자 의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어느 시점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과 환경을 먼저 쳐다보지 않았을까? 위대한 승리 후에 살며시 찾아오는 교만의 덫에 걸린 것이 아닐까? 그 결과로 자연스레 그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든 것이 아닐까?

이것이 엘리야가 범했던 우가 아니었을까? 그는 주님으로터의 출발로 시작했으나(18장), 어느 시점에서(19장 초반) 자신으로터의 출발로 바뀌어 버렸다. 굳이 교만이라는 말 보다는, 모든 은혜와 능력의 원천이 자신이 아니라 주 하나님이신 것을 잠시 잊었던 것이 아닐까? ‘은혜의 기억’을 잊은 것이리라. 내 열심, 내 기도, 내가 누렸던 기적을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잖는가?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고 행하셨던 주님과 그 은혜의 손길을 기억하라는 것이지 않는가?

교만은 나로부터의 출발이다.
나로부터의 출발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이다.
내 안에 선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나로부터의 출발은 사단의 속임수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사단의 간교한 전략은 나로부터의 출발을 꾀한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그분은 스스로를 선하다 여기지 않으셨다.
그분의 선하심은 오직 아버지께로만 오기 때문이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럼에도 그분은 선한 목자이시다.
그분은 아버지의 모든 선하심을 고스란히 물려 받으셨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다시 은혜를 회복하는 과정은 광야를 통한 여정과 호렙산에서였다. 광야에서의 여정도 주님은 함께 하셨다. 그러나 40주야의 험난한 그 길은 우리네 인생길의 여정과도 같지 않은가? 마침내 엘리야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주님을 다시 만난다. 감격적인 은혜의 체험이자 제2의 만남, 제2의 축복의 은혜였다. 완전한 은혜의 회복이었다. 아, 좋으신 주님!

(엘리야에게 주셨던 제2의 만남을 내 영이 내 마음에게 주는 독백으로 엮어본다.)

엘리야에게 주셨던 은혜는 무엇이었니?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인가?
지축을 뒤흔드는 지진인가?
모든 것을 사르는 불인가?
어쩌면 그도 처음엔 이런 것들을 구했을지 몰라.

네게 주시는 은혜는 무엇이었니?
때론 바람같이 임하시고
때론 지진같이 흔들어 주시고
때론 불같은 뜨거움을 주시도록 간구했지.
너도 외적 표적에 민감해 있었던 거야.

주님은 내적 혁명가란 말이야.
밖으로 보여지는 표적은 관심이 덜하시거든.
그래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주시지 않았잖아?
밖으로부터의 변화는 자기 것이 되기가 어려워.
진정한 혁명은 안으로부터의 변화인거야.

이제 알겠니?
그것은 세미한 소리에서 출발하는 거야.
네가 세상과 환경의 소란함에서 떨어져 있을 때,
네가 영으로 잠잠히 있을 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소리지.

은혜를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마.
네 안에 계신 주님에게서 찾아야 해.
그런데 네가 분주할 땐
주님께서 말씀하실 자리가 없잖니?
세미한 음성을 네게 주실 자리 말이야.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선 준비가 되어 있어야겠지?
물론 네 마음의 준비 말이야.
네 마음의 딱딱함이 부드러워져야 해.
네 마음의 돌들을 제거해야 해.
네 마음의 가시떨기를 쳐내야 해.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너 자신이야.
네 안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지?
가난함과 애통함으로 네 연약함을 끌어 안아야 해.
그리곤 주님을 바라 보아야겠지?
주님으로부터의 출발을 시작하는 거야.

이제 준비가 됐니?
엘리야처럼 무릎기도를 드릴 준비가 됐니?
엘리야처럼 광야로 향할 준비가 됐니?
엘리야처럼 옷깃을 여밀 준비가 됐니?
엘리야처럼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됐니?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야.
나는 알아. 네가 준비되어 있음을.
이것을 꼭 기억해.
너로부터의 시작은 교만의 파멸이야.
주님으로부터의 시작이 네 제2의 축복이란다.

김순희

2010.12.19 12:48:44
*.161.91.154

하나님의 열심과 사람의 열심.
하나님으로 부터의 시작과 나로 부터의 시작..
얼마나 자주 범하는 착각인지요.
늘 저도 이런 착각 때문에 남의 눈의 티는 기가막히게 잘 보는 현미경 같은 눈을 가졌고
자기 눈의 들보는 전혀 보지 못하는 장님 같은 눈을 가졌습니다. ㅠㅠㅠ

정순태

2010.12.19 14:34:18
*.216.63.190

지난 주, 6갑자 내공 중에서 거의 절반 정도의 막강 내공을 격체전공 수법으로 전해 주셔서 기사회생했습니다!
영적으로 한없이 높으신 형제님께서 갑자기 손전화로 격려를 다 해 주시다니요!!! 절대 감동~~~ 고맙습니다!
회사 일 잘 마무리하고 출국하셨지요? 도착하자 마자 올리신 게 이 글일거구요.
정상진 선교사님 부부(전 전혀 모릅니다만)와도 아름다운 교제 나눈 것 같던데, 부럽습니다.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늘 당당하게 살아가는 형제님께 많은 것을 배웁니다. 더 고맙습니다.

이선우

2010.12.26 15:22:02
*.222.242.101

리플퀸(^^) 김순희 자매님,
제가 느끼는 모든 것들을 이리 공감하시니 감사드립니다.

ㅋㅋ 순태 형님,
3갑자 내공을 전해주신 분은 제가 아니라 형님이셨지요.
통화드리면서 제가 많은 감동을 먹었습니다.
한국에서 하시는 모든 일들이 주님 안에서 뜻하신 대로 형통하시길 기도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 [분깃신앙] 주님만이 나의 분깃 (신약편) [3] 이선우 2011-04-29 969
58 [십자가 묵상] 부끄러움의 십자가 [1] 이선우 2011-04-10 806
57 [십자가 묵상] 시간의 해결자 [5] 이선우 2011-03-26 945
56 [사순절QT요19장] 나의 유월절 어린양 [3] 이선우 2011-03-12 1116
55 [분깃신앙] 주님은 나의 분깃 (구약편) [3] 이선우 2011-02-27 10586
54 [QT요21장] 어부에서 목자로 [3] 이선우 2011-02-12 945
53 [팔복 묵상] 핸디캡을 위한 팔복 [3] 이선우 2011-02-06 775
52 [QT삼상2장] 자라게 하시는 주님 [1] 이선우 2011-01-30 3686
51 [사귐신앙]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5] 이선우 2011-01-22 1460
50 [간증] 14살 선영 자매의 간증 [4] 이선우 2011-01-16 960
49 [QT왕하2장] (사진추가) 엘리사의 눈물 file [6] 이선우 2011-01-07 1218
48 [십자가 묵상] 버려두심 vs. 내어주심 [1] 이선우 2011-01-01 851
47 [사귐신앙] 모세의 사귐신앙 [3] 이선우 2010-12-26 1569
» [QT왕상18장,19장] 엘리야 묵상 [3] 이선우 2010-12-18 1226
45 [쉬어가기] 골프와 신앙(1) [2] 이선우 2010-12-11 1057
44 [QT행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누룩 [5] 이선우 2010-12-04 1868
43 [사귐신앙] 사귐의 지존(至尊) 하나님 [11] 이선우 2010-11-27 862
42 [QT삼상15장] 아말렉의 추억 [1] 이선우 2010-11-20 2780
41 [생활단상] A과장의 첫돌 잔치 [7] 이선우 2010-11-13 873
40 [QT마13장] 레이어는 가라 [2] 이선우 2010-11-06 1124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