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2011년 1월 9일 주일 아침, 예배 드린 직후에 L.A의 찻집에서 차를 한 잔 나누며 박목사님과 사모님, 김유상 형제님과 로빈과 함께 단란한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21살이 되어 자신을 스스로 'Senior'로 인식하는 로빈과 그의 대모(!)이신 사모님과 한 컷! 잘 어울리지요?^^
본문: 왕하2:1-18
붙잡은 말씀:
10절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12절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요..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고..
요약: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함으로 엘리사는 엘리야와 같은 성령의 능력을 받는다.
느낌 및 묵상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전수받는 이 이야기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 그림은 그들이 함께 하는 작은 여정으로 시작한다. 우리네 인생길도 하나님을 하나씩 알아가기 위한 여행길이 아니겠는가? 요단강 가의 길갈에서 서쪽의 베델로, 베델에서 다시 요단 근처인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 강가로, 요단의 서편 강가에서 강을 직접 건너 요단 동편에 서 있는 스승과 제자.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가 곡조에서처럼 요단의 동편은 엘리야를 떠나 보내는 피안의 자리였던 것이다. 이제까지 존경하고 사랑했던 스승을 하나님의 품으로 떠나 보내는 제자의 보이지 않는 슬픔이 아련히 느껴진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외에 다른 등장인물이 보인다. 그들은 선지학교의 제자들이었다. 엘리사와 같이 그들도 엘리야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다. 길갈과 베델과 여리고의 제자들은 차례로 엘리야와 엘리사 일행을 만나고는 마지막으로 50명이 요단 강가에 모였다. 비록 먼 발치에서이긴 하지만, 그들도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을 것이다. 엘리사도, 제자들도, 엘리야 자신도, 엘리야가 어찌될 것인지를 정확히 알았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하늘로 데려 올라가실 거라는 것은 이미 모든 제자들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진 사실이었다. 그들의 스승인 엘리야는, 에녹에 이어 두번째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할 것이었다. 그런데 15절 이후의 이야기에서 보면, 다른 제자들의 사실 인식은 심히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그들은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 가다가 어딘가에 떨어져 죽었을 것으로 오인했었다. 그래서 스승의 시신을 어떻게든 찾고자 했다. 내 일천한 믿음의 수준을 보는 듯하다. 반면, 엘리사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고 그의 믿음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엘리사와 나머지 제자들의 근원적 차이가 무엇이었길래 그러한 결과의 차이가 생겼는지 묵상해 본다. 먼저 이들의 관점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그 차이는 결단력과 절박감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사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은 남달리 특별났다. 농부로서 밭을 열심히 갈고있는 엘리사를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은 선지자로 부르신 것이다. 열두 겨리나 되는 소들을 부릴 만큼 그는 부자였으나, 모든 소유와 가족을 훌훌 털어버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엘리야를 좇았다. 이러한 결단력을 바탕으로 엘리사는 그야말로 짧은 시간에 엘리야의 수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영적인 절박감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엘리사의 절박함은 최후의 순간까지 스승을 따라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심정으로 표현된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2,4,6절)라는 그의 세차례 고백의 맹세는 절박감의 극치를 이룬다. 흔들림이 없는 일관된 집요함이다.
그 절박함은 엘리사에게 또한 큰 갈망을 낳게해 주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9절) 무슨 뜻일까? 엘리야가 떠날 그 자리와 직임을 엘리사는 그대로 물려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스승의 능력은 엄청났다. 그러나 이것은 스승 자신의 능력이 아님을 그는 어느샌가 깨달았을 것이다. 엘리야의 능력은 성령께서 주신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엘리야와 같은 능력을 힘입을 수 없다. 그의 갈망은 엘리야를 닮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어찌해야 엘리야와 같은 능력을 갖게 되는지, 즉 어떻게 해야 성령의 역사하심을 엘리야와 같이 입게 되는지? 이제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엘리야에게 그 비밀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스승과 같은 훌륭한 지혜와 경험이 없었기에, 갑절로 받아야 할 절박한 상황임을 엘리야에게 고한 것이다.
그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휘두르며 요단강을 다시 건넜다.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이 능력의 비밀일까? 그게 아니지 않은가? 엘리야가 가진 바 성령의 역사는 진정 무엇에서 비롯되었단 말인가? 물론 은혜시대를 사는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리라. 성령님으로부터 하늘의 능력을 힘입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1:8) 엘리야의 입에서 나오는 비밀의 해답도 다르지 않았다.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10절) 그렇다. 엘리사의 능력의 쏘스는 엘리야의 겉옷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이었다. 불수레와 불말들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갈라놓고 회오리 바람으로 올라가는 엄청난 광경.. 그 속에서 엘리사가 본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이었다! 엘리사의 외침을 들어보라.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그가 ‘체험한 것’은 두가지였다. 첫번째는 자신의 스승 엘리야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에 휩싸여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올라가는 스승의 모습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그 영광의 화염 속에서 엘리사는 깨달았을 것이다.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을 때에만이 나오는 것임을. 자신을 철저히 비운 다음에야 비로소 드러내지는 주님의 영광을.. 두번째는 엘리야에게 주어진 영광의 진정한 쏘스였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그가 ‘본 것’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불수레와 불말들이었다.(11절) 그러나, 그가 진정 ‘체험한 것’은 이스라엘을 지키는 병거와 그 마병이었으며, 나아가 그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이다.(12절)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엘리야는 불말들이 끄는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까?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것이 아님을 금새 알 수 있다. 엘리야가 타고 올라간 것은 회오리 바람이었다.(1절,11절) 열왕기서의 저자는 혹시 오해가 생길까봐 두 번씩이나 이를 재확인해 준다. 다른 말로, 엘리야와 엘리사 두 사람을 갈라놓은 불수레와 불병거는 엘리야가 타고가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나의 사랑하는 책’이 주된 원인이다. 2절의 가사 내용은 이렇다. “옛날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경험과 유대 임금 다윗왕의 역사와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일을 기억합니다” 이 찬송가 내용과는 달리,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갔지, 병거를 타고 간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말과 병거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엘리사의 탄성이 들리지 않는가?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그가 무슨 뜻으로 이런 탄성을 발한 것일까? 그는 없어진 병거를 아쉬워 해 한탄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그대로 있기에 환호성을 지른 것이 아닐까? 엘리야가 사라진 이후에도 여전히 보이는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것은 엘리사를 위해 그대로 거기에 남겨져 있었다! 그것은 엘리사가 본 하나님의 영광일 뿐 아니라,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적 선물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가 체험하고 확인한 것은 이스라엘을 든든히 지키는 하나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었다. 그 이후로 그 불말과 불병거는 ‘엘리사의 것’이 되었다. 물론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증거가 뒤의 6장에 그대로 나오지 않는가? 아람 군대보다 훨씬 더 많은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들을 엘리사의 사환도 그 때서야 눈으로 보았지 않은가?(왕하6:14-17)
엘리사가 체험하고 느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였다. 그리고 그 영광의 체험으로 인해 그는 비로소 스승 엘리야처럼 성령의 능력을 받은 것이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다른 제자들과 엘리사의 근원적 차이는 무엇일까? 앞에서 기술한 관점의 차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나타난 근원적 차이는 ‘체험’의 차이라고 나는 믿는다. 제자들도 엘리야의 승천을 멀리서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다른 제자들에게도 체험적으로 임한 것일까? 엘리사와 같이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체험’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오직 엘리사만이 하늘에서 임한 영광의 임재를 가슴으로 체험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임재의 체험으로 그는 차별화된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것이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이야기도 동일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은 빛과 함께 임한 예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들었지만, 같이 가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지를 깨닫지도 못하지 않았던가?(행9:3-7) 주님의 영광과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는 체험적 경험이야말로 하늘의 능력을 힘입는 최선의 길이다.
그 임재의 시점에 엘리사가 또한 영적으로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함으로 그는 크나큰 슬픔을 느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엘리사는 큰 슬픔과 격정 속에서 눈물을 뿌렸을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엘리사의 눈물이었다! 이후에 나오는 하사엘 앞에서 흘렸던 그의 눈물(왕하8:11)보다 훨씬 더 강도높은 눈물이었으리라. 그의 눈물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내 아버지여..” 그의 격정에 겨운 외침과 이 후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는 모습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극도의 슬픔에 잠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옷을 찢어 그 슬픔을 표현하는 길밖에 없었다. 스승을 잃은 슬픔이 비록 크지만, 주님의 영광을 대한 그 슬픔의 감동에 비할 수 있을까? 주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을 때 인간의 반응은 감정적으로 여러가지인 것 같으나 결국은 하나이다. 주님의 위대하신 영광 앞에서 그 무엇을 논할 수 있겠는가? 주 하나님의 엄위하고 거룩하신 임재 앞에서 그가 이어 깨닫는 것은, 죄악으로 가득찬 한 인간의 가증스러운 모습, 즉 자신의 가장 초라하고 누추한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엘리사에게는 슬픔의 눈물로, 세미한 목소리를 들은 엘리야에게는 치유와 사명 주심으로, 하늘의 사닥다리를 본 야곱에게는 두려움으로, 영광의 스랍을 본 이사야에게는 통회함으로, 부르심의 말씀이 임한 예레미야에게는 거대한 슬픔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기에 엘리사의 눈물은 위대한 주님의 영광 앞에서 내가 보여드릴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2011년 새해 첫 아침 이집트의 여행지에서 내게 주신 말씀은 고린도후서 4장 4-7절 말씀이었다. 모세의 사귐신앙(신약편)을 묵상하면서 자연스레 펼쳐진 이 말씀 속에서 발견한 것은 본문 QT에 대한 최종 결론이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하려 함이라”(7절) – 큰 능력의 원천은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질그릇 같은 내 안에 감추어진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내 능력이시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6절) – 내 마음에 항상 비추이는 영광의 광채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이기도 하다. 그분이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이다.(4절)
적용
능력을 구하기 이전에 영광을 구하자.
주님의 영광 안에 주님의 능력이 있다.
Product을 구하지 말고 Source를 구하자.
다윗과 같이 내 한가지 소원은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내 안의 눈물샘이 마르지 않도록 하자.
그분의 얼굴을 더욱 사모하자.
십자가 복음의 영광을 더욱 선포하자.
기도
주 하나님, 엘리사의 눈물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2010년을 잘 마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2011년 새해에는 주님을 향한,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를 더 드리기 원합니다. 그 은혜의 현장인 ‘엘리야의 하나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그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 주시옵소서. 엘리사와 같이 주님의 영광을 보면서 눈물로 외치게 하옵소서.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더 보게 하옵소서. 그렇게 은혜의 바다 속에 잠기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소원하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후기)
이 QT는 ‘바깥바람’을 많이 타면서 생겨난 글입니다. 첫 깨달음은 작년 12월 중순 서울에서 정상진, 홍성림 선교사와 식사를 하면서 나눌 때 주어졌습니다. 그 대화 중에 나도 모르게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그 따끈따끈한(?) 아이디어를 잊어버리지 말고 바로 글을 써 보려고 했으나 시간이 안되었다가, 가족들과 이집트 여행할 때 짬을 내어 1차 정리를 했습니다. 쓰다보니 QT 형식의 글이 되었고 추가적으로 여러 깨달음이 쏟아졌습니다. 최종 정리와 업로드는 이곳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하게 되는군요.ㅎㅎ 결국 독일 집에서는 한 것이 별로 없고, 한국과 이집트와 미국에서 바깥바람만 타고 생겨난 것이지요.^^ 마치 엘리야가 엘리사를 데리고 이곳 저곳 가던 여정과 흡사하다고 할까요?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에 4일간 있으면서도 그 흔한 슬롯 머쉰이나 블랙잭 테이블에 손조차 대지 않은 것이 제게는 대견스런 말씀의 능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엘리사가 ‘가졌던’ 불병거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의 보배를 내가 ‘품고 있음’을 뿌듯하고 감격적으로 느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그 존귀하신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모든 것을 비운 다음에 새로이 채우심 받아야 된다는 핵심, 쉽게 알려 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비록 아직은 너무나 요원한 일이지만 그래도 갈망하며 사는 한 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런데, 나성 총단 입성 및 수뇌부 극비 회동 결과는 공포하지 않으실 예정인가요?
형제님의 미국 여정 발자취가 매우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