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상 2:18-26
붙잡은 말씀:
11절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21절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26절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느낌 및 묵상
본문을 묵상하면서 11절, 21절, 26절에서 반복해 쓰여진 ‘자람’과 ‘여호와’라는 두 단어를 붙잡았다. 자람은 성장이다. 사무엘의 성장 과정에서 또한 영적 성장의 비결이 숨겨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한 맥락에서 내게 주어진 의문은 다음과 같았다. 1) 사무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2) 엘리의 두 아들과 사무엘의 근원적 차이점은 무엇일까? 3) 여기에서 여호와(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일까? 4) 이에 따른 영적 성장의 단계는 어떻게 될까?
엘리의 아들들과 사무엘은 외적으로는 똑같은 환경하에서 성장했다.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실로, 그곳에서 대제사장인 엘리 옆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돕는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사무엘은 어릴 적부터 제사장들이 입는 세마포 옷을 입었다. 이것은 엘리의 두 아들도 마찬가지였지 않겠는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의 중심지- 이곳에서 그들은 자라난 것이다. 그런데 외견상 거룩하고 성스러운 곳이어야 할 실로가 실제는 죄악과 부패가 만연한 곳으로 변질되었음을 본다.
그것도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를 드리는 과정 속에서 엘리의 두 아들에 의해서 자행된 부패였다. 이들이 어린 사무엘에게 어떻게 했을 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부패와 방종과 죄악을 향한 유혹의 손길.. 이들이 당연히 어린 사무엘을 이같이 유혹하고 꼬득이지 않았을까? 친아들조차 교육시키지 못한 엘리 대제사장이 사무엘을 제대로 양육했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부패하고 유혹이 만연한 실로에서 사무엘은 꿋꿋이 하나님만 섬기며 유혹에 물들지 않은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물론 외적인 해답은 어머니 한나에게 있었지 않겠는가? 엘리와 한나의 차이, 그들이 자신의 자식을 향한 교육과 양육의 차이- 이것이 말씀에 극명히 나타나 있지 않은가? 그들은 각각 부모의 믿음과 자식에 대한 커미트먼트가 근원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엘리는 대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을 정도로 처음엔 영성과 지도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그의 믿음은 점차로 쇠퇴해 간 것이 아닐까? 그가 낳은 두 아들은 아버지의 쇠락한 믿음조차 물려받지 못했다. 제사 지내는 노우하우 이외에 다른 무엇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일까? 반면, 사무엘은 한나의 기도로 태어났고, 또한 한나의 서원대로 일평생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 기도하는 어머니 한나가 사무엘을 위해 늘상 눈물의 기도를 드림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매년 1회 실로에서 만나 겉옷을 친히 갈아입혀 주며, 한나는 아들 사무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교육시켰지 않았을까?
부모의 신앙교육과 눈물어린 기도, 또한 나실인으로서의 성장이 어린 사무엘의 일생을 지배한 것이다. 이것이 엘리의 두 아들에게는 없었던 사무엘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차이점이었다. 또한 이러한 믿음의 유산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킨 사무엘은 믿음과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나는 본문에서 더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한다.
붙잡은 말씀의 또 다른 중심 단어.. 아, 그 이름 여호와.. 그들 둘 사이의 근원적 차별점은 하나님이 아닐까?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역사하시는 그분의 손길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엘리의 두 아들은 버리시고, 사무엘을 택하셨던 것이다.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기도의 용사로 만든 분은 다름아닌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그를 한나의 모태에서 조성하셨고, 그를 엘리의 후계자로서 성막의 대제사장으로,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택하셨고, 이를 위해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 안에서 성장케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사무엘을 미리 정하시고 택하셨다. 이것이 사무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사무엘을 택하시고 자라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그렇다. 내게도 주 하나님의 은혜는 이같이 동일하게 내려졌지 않은가? 주님은 나를 주님의 자녀로 미리 정하셨고, 정하신 나를 부르셨고, 부르신 나를 의롭다 하셨고, 의롭다 하신 나를 영화롭게 하셨다.(롬8:30) 할렐루야! 이와 같은 원리로 볼 때, 나의 영적 성장의 주체는 100% 주님이시다. “나(바울)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영적 성장은 오직 주님만이 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해 있을 때만이 성장은 가능한 것이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골2:19) 주님께서 자라게 하시므로, 내가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머리되신 주님.. 머리되신 주님으로부터 공급함을 받고, 머리되신 주님과 연합함으로 주님을 향하여 자라가자.
사무엘의 성장 과정을 통해 영적 성장의 3단계를 본다. 위의 세가지 붙잡은 말씀에서 어린 사무엘의 성장 단계가 숨겨져 있지 않는가? 1단계는 11절-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2단계는 21절- ‘여호와 앞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마지막 3단계는 26절- 점점 자라감으로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더욱 더 은총을 받는 것이다.
성장의 첫 단계는 주님을 믿되 아직은 사람을 의식하는 단계이다. 젖을 겨우 뗀 사무엘에게는 보호자인 엘리가 최고였고, 엘리의 말과 지시가 하나님보다 먼저였던 것이 아닐까? 성장의 초보 단계에서 이는 당연한 일 아닌가? 나의 우선순위가 주님 보다는 내 주위 사람이라는 얘기다. 두번째 단계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됨에 따라 주님이 나의 최고 우선순위로 바뀌는 단계가 아닐까?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갔다. 하나님 앞에서.. 이를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 하지 않는가? 주님 앞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코람데오의 정신.. 이것이 영적 성장의 2단계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세번째는 은총을 입는 단계가 아닐까? 은총을 받되,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더 은총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 자람은 은혜를 받은 만큼 자라가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가 내 안에서 왕노릇하면 할수록 나는 그만큼 더 성장한다. 주님의 은혜를 받는 만큼 사람들의 은혜도 같이 입어가는 것이다. 어린 예수님도 이러했지 않은가?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3단계를 거친 사무엘의 영적 성장은 3장에 와서 완성된 모습을 보인다. 실로의 성막 안에서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하나님의 등불이 놓여있는 성소 안이 그의 잠자리였던 것이다.(3:9) 이것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였다. 그의 24시간 활동반경은 모두 성막을 중심으로 된 것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성소 안 자기 처소에서 잠을 잤던 것이다. 낮에는 엘리를 도와 제사를 진행했고, 밤에는 그곳에서 잠을 자고..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찌 이를 기뻐하시지 않았겠는가? 주님의 임재는 주님과 밤낮으로 함께 함으로 시작된다.
적용 및 기도
두 아이의 부모로서 한나의 기도와 양육을 닮기 원합니다. 첫째의 영적 깨어짐과 둘째의 영적 성장을 위해 더욱 무릎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한 달에 최소 1회 아이들에게 영적 편지를 띄우겠습니다.
성장의 주체가 주님이심을 가르쳐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사무엘과 같이 새로운 영적 성장점으로 가기를 소원합니다. 특별히 코람데오의 정신을 닮아가겠습니다. 24시간 내 삶의 모든 영역이 주님 앞에 코람데오로 드려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선우 형제님께서 아주 귀한 묵상을 나눠주셨습니다!
성장의 삼단계 - 이런 교훈이군요!
첫 단계에서 허우적거리기에 여념 없는데,
언제쯤 되어야 둘째 단계에 발이라도 들여 놓을 수 있으려는지요................
머리 푹~~~ 숙이고 나갑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