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눅7장] 용서받은 여인의 사랑

조회 수 938 추천 수 90 2012.07.27 19:20:45
2012.7.27 눅7:26-50  용서받은 여인의 사랑

붙잡은말씀: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7:44-46)

생명의 삶의 오늘 큐티 제목은 "용서받은 여인의 사랑"이네요. 본문에서 바리새인 시몬과 죄많은 여인 이외에 제 3의 인물을 발견합니다.^^ 그의 이름을 편의상 '회바'(회심한 바리새인..^^)라고 합시다. 시몬과 회바와 여인의 예수님을 향한 각기 다른 태도에서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1) 시몬의 경우
시몬은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리곤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향한 특별한 '그 무엇'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자신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랍비 예수'를 초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식사 이외에 그가 해드린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2) 회바의 경우 (44-46절에 나타난 가상의 인물)
회바는 바리새인입니다. 시몬과는 달리, 그는 예수님을 향한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도 언젠가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마음 속으로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식사 대접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극진히 모셨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 오셨을 때, 발 씻을 물을 주어 예수님이 발을 씻게 해 드렸습니다. 환영과 감사의 표시로 예수님의 얼굴에 입 맞추었습니다. 식탁에 앉으셨을 때, 머리에 비싼 감람유도 부어 드렸습니다. 아, 예수님의 흡족한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그도 이것으로 소임(?)을 다했으니 이제 만족입니다.

3) 여인의 경우
여인은 그 동네에 사는 죄많은 여자였습니다. 그녀도 회바 처럼, 언제인가부터 예수님을 향한 특별한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정말이지 사모하고 사랑했습니다. 단지 직접 뵌 적이 없을 뿐더러, 예수님을 초대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 눈도 있었지만, 감히 나같은 죄인이 어떻게 예수님을 초대해? 하는 생각이 더 강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같은 동네의 시몬이 예수님을 초대한다고 들었고, 그 날이 왔습니다. 설레임 속에 먼 데에서라도 예수님의 얼굴이라도 한 번 뵐 요량으로 구경꾼들 사이에서 있었습니다. 아, 사랑하는 예수님! 그가 들어와서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의 마음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께 접근해서 그의 발치에 섰습니다. 어느새 그녀의 눈물이 흥건합니다. 그 눈물이 어찌나 많았던지, 예수님의 발에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져 어느덧 흥건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떨어진 눈물 때문에 예수님의 발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쌀이 찌푸려졌습니다.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그녀... 당황하여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위에 뭐라도 닦을 것이라고는 없었습니다. 할 수 없어 그녀는 자신의 긴 머리칼로 눈물을 홈칩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발은 여전한 듯 합니다. 송구스러워, 그 발에 계속적으로 입을 맞춥니다. 그제야, 그녀는 예수님의 눈길을 느꼈습니다. 웃는 듯 마는 듯 예수님은 발치에 있는 그녀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 사랑... 그녀는 그 눈빛에서 사랑을 느꼈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예수님... 사람들의 따가운 눈충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젠 죽어도 좋아. 예수님을 만났으니.. 뭘 더 드릴게 없을까? 그때 그녀는 늘 품안에 고이 간직했던 그 무엇이 번뜩 생각났습니다. 그녀의 전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조그만 옥합이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 이걸 드릴거야. 원래는 머리에 붓는 것이지만, 감히 예수님의 머리에 부을 생각도 못합니다. 그냥 옥합을 꺼내어 발 위에서 그 옥합을 깨뜨립니다. 향유입니다. 그윽히 퍼지는 아름답고 고결한 향내가 장내에 가득합니다. 그녀의 냄새입니다. 그녀의 향기입니다. 그녀를 구원한 예수님께 드리는 그녀의 헌신입니다. 예수님은 어느새 활짝 웃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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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 사람 중에 어떤 모습일까? 나는 회바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 무엇이 있었지만, 내가 가진 것 중에 일부를 드립니다. 발 씻을 물과 감람유 그리고 입맞춤, 그리고 가능한 맛있는 식사 대접을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나는 이것저것 다 했습니다. 예수님도 만족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 그렁그렁한 나의 눈 가에 비친 주님의 모습이 그렇게 묻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절)
이 말씀은 시몬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회바를 두고 하신 말씀일 겁니다. 왜? 죄가 있어야 사하지요. 자기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의 죄를 어찌 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회바는? 그가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그의 죄가 적게 탕감 받았을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적고 많고가 아닌, 모두다 한결같이 부패하고 더러움이 가득한 죄인들일 뿐입니다. 헤바와 여인과의 차이는 깨달음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되, 50 데나리온이 아닌 500 데나리온,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무한대의 채무을 빚진 자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것이겠지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그의 인생 말년,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했던 여러 말 중에서, 저는 노사도의 이 고백을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지.. 이 얼마나 위대한 선언인지.. 과거에 그가 죄인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물론 과거에도..) 주님의 부르심과 회심의 체험을 한 이후,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 현 시점에, 주님의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바울은 자신을 늘상 본문의 죄많은 여인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나의 경우를, 내 마음 중심을, 이 말씀에 다시 한 번 비추어 봅니다.

발 씻을 물 대신
내 눈물로 그 발 씻어 드립니다.
형식적 입맞춤 대신
내 머리칼로 그 발에 입맞춥니다.
머리에 부을 감람유 대신
내 가진 향유 옥합 그 발 앞에 깨뜨립니다.
오, 주님!
나를 받으시옵소서.
사랑합니다...






(부록- 지난 큐티 노트 모음입니다.)

며칠 전 어느 분과 통화하던 중, 매일의 제 큐티 노트를 홈피에 올려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주셨습니다. 이 홈피가 모바일 환경(스마트폰)에서 로그인이 가능하고, 글쓰기와 댓글이 가능하다면, 저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아직은 안됩니다.ㅠ.ㅠ.) 대신에, 주간 큐티 모음을 이런 식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대표 큐티를 제목으로 하되, 나머지 큐티 모음을 부록으로 붙이는 식으로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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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7.19 눅5:27-39  암환자 비유

오늘 생명의 삶 큐티... 이 아침에 저는 31절을 붙잡았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아래 어느 암환자의 고백을 먼저 들어 보십시요.^^

"이전에 나는 암 환자였습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수도 없이 많은 암 덩어리를 내 온 몸에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위, 간, 폐, 췌장, 직장, 방광, 혈액, 뇌에 이르기까지 이 지긋지긋한 암은 내 온 몸을 싸고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의사에 의해서 그 모든 암이 전부다 치료가 된 것입니다! 그분은 정말이지 명의 중의 명의였습니다. 이제 나는 암에서 자유로와졌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내가 잊지 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암에는 완치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지요. 내 몸에 있는 암 덩어리들은 내 몸을 아주 떠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암세포들은 단지 아주 약해져서 내 몸 곳곳에 잠복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아시겠지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나는 조심해야 합니다. 암세포는 내 몸이 약해질 때 언제든지 나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내 몸의 건강에 늘 힘써야 합니다. 암은 전이도 됩니다. 그러니까 내 몸의 어디에 탈이 날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치료가 다 된 정상인처럼 보일 지라도 나 자신은 내가 건강한 정상인이라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아직도 환자이지요. 그리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그 의사 선생님을 만나 검진 겸 자잘한 치료를 계속해서 받습니다. 각종 예방약도 이것저것 복용하고 있습니다. 왜? 나는 끊임없이 치료가 필요한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도 그분이 필요합니다."

주님에게서 죄사함의 은총을 받고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나.. 오늘의 현재를 사는 나는 과연 의인일까? 아니면 죄인일까? 이 우문을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며 나의 치료자되어 주신 주님 앞에 오늘도 무릎을 꿇습니다..




2012.7.21 눅6:1-12  안식일과 안식

생명의 삶 큐티 나눔입니다. 어제와 오늘 본문에서 저는 '안식'이라는 단어를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일을 하셨습니다. 어제의 본문이 이를 명확히 보여 줍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고, 제자들은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다가 비난을 받았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눅6:5) 안식일은 안식을 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내가 주님께 나아올 때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은 나를 편히 쉬게 하십니다.(마11:28) 아, 안식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내게 안식일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된 나에게 '평지설교'를 들려 주십니다. 네가지 복과 네가지 화는 안식의 관점에서 내게 귀한 교훈을 주십니다. 나의 안식은, 내가 부요하고 배부르고 웃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음으로 오는 것일까? 아니겠지요. 내 마음의 안식은 오히려, 내가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핍박받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내 마음의 최종 푯대는 주님을 향한 것이겠구요. 주님으로 인해 내가 가난하고 주리고 애통하며 핍박을 받을 때, 나는 내 마음 가운데 천국을 소유합니다.(눅6:20) 이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안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안식일의 주인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벌써부터 주님의 날이 기다려집니다..^^




2012.7.22 창12:1-2  나에게 복은 무엇일까?
(독일 한마음교회 찬양대원들에게 쓴 제 이메일 내용입니다.^^)

샬롬~ 오늘 오후 찬양 연습 시간 말미에 말씀드린 대로, 주일 설교에서 제가 받은 은혜를 간단히 나누고자 합니다. 별 건 아니고, 제목에서처럼 나에게 복의 의미는 무엇인지 새삼스레 다가오는 것이 있어서요.

오늘 지형은 목사님의 설교 본문은 창세기 12장 2절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무엇이 복일까?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오늘을 사는 나에게 무엇일까? 왜 아브라함은 복(복의 근원)이라고 하나님은 선언하셨을까?

그 해답이 사실 바로 뒷절에 나와 있지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이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 사람들 중,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신다는 뜻이지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아브라함은 복의 통로가 된다는 얘기네요. 아브라함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복을 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통해서 다른 이들이 복이나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이 받는 것은?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즉, 아브라함이 복을 받아서 복의 근원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단지 하나님께서 다른 이들을 복 주시는 데 사용되는 판단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복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으로 삼으신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 다른 이들을 복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허탈합니까? 아니면 영광입니까? 예, 저는 이같이 큰 영광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귀절에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생각을 하면서, ‘제사장의 축복권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제게 왔습니다. 예전의 기억으로 찾아낸 것은 민수기 6장..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2-27)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축복 내용을 보면, 복의 수여자는 제사장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복을 ‘빌어’ 주지만, 실제의 그 복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역할이나 제사장의 역할이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민수기의 축복을 들여다 보다가, 그 축복의 내용이 세가지임을 알았습니다 .
1) 하나님이 복을 주심 (지키심)
2)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심
3) 하나님이 평강을 주심

이 말씀을 보면서, 제게 이런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복은 은혜다!” 제사장의 축복 내용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부어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인데, 이 똑같은 것을 세가지 다른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즉, “복 = 은혜 = 평강”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은 오직 하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긍휼, 나를 불쌍히 여기심, 사랑의 기름 부으심... 이것이 합하여 내게로 주어진 것이 ‘은혜라는 복’이 아닐까요?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복이 변화, 발전되어, 예수님 시대에는 팔복 강화로, 이후 사도 시대에는 은혜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요??

이 생각이 스치면서, 뭔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제게 밀려 왔습니다. 이전엔 막막하게.. 복이라면 뭔가 답답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케케묵은 것이라고 치부해 왔던 나에게.. 주님이 내게 주신 복은 다름아닌 은혜라는 것을...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은혜의 중심이 복음(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복, 내 입장에서 보면 은혜.. 이리 쉬웠던 것을.. 왜 복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얼굴을 돌려 버렸는지? 그렇게 주고 싶어 하셨고, 그 복의 통로로 나를 사용하시고자 했던 것을..

이제야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제게 주신 깨달음으로 이렇게 제 표현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우야,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단다.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복을 주기 원한단다.
그래, 이게 내가 너에게 주는 은혜인 것이야.
이제 너는 나에게 은혜를 입은 나의 분깃이야.
네가 나 대신 복의 통로가 되어다오.
네가 나 대신 복의 근원이 되어다오.
너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내가 은혜를 베풀고 싶어.
그들에게도 내가 복을 주고 싶어.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아니?
그들이 너에게 잘해 주는 거야.
그들이 너에게 잘해 주는 만큼..
그들이 너를 불쌍히 여기는 만큼..
그들이 네게 은혜를 베푸는 만큼..
그들이 네게 축복을 해주는 만큼..
그만큼..
그들도 그렇게 나의 복을 받을 거야.
그들도 그렇게 나의 은혜를 입을 거야.
왜?
너는 나의 사신이니까.
너는 나의 분깃이니까.
너는 나의 자녀이니까.
너는 나의 사랑이니까.




2012.7.23 눅6:39-49  돌감람나무였던 나

큐티는 했지만, 오늘은 따로 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ㅎㅎ OO님의 열심에 감동이 되어...^^

저는 44절을 붙잡았습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을 절망의 멧시지가 아닌 희망과 구원의 멧시지로 제게 들려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의 바탕을 바꾸기 전에는, 나의 원소속을 바꾸기 전에는 좋은 열매를 맺기가 불가능하다는 주님의 말씀에 감격합니다. 다른 말씀의 예시들이 이 말씀을 뒷바침해 줍니다. 열매를 맺지 못했던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처럼 올리브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까? 돌감람나무인 내가 그들 중에 접붙임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으면 됩니다.(롬11:17) 즉,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포도나무의 가지로 붙어 있는 한, 나는 포도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것이지요.(요15:5)

그래서 나의 거듭남은 일회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연속성으로 지속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이신 주님에게서 한 발자욱이라도 떨어진다면 나는 길가에 버려진 가지와도 같기 때문이지요. 내 바탕, 내 원모습으로는 그 어느 것도 스스로 이루거나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열심으로 일하시어 나로 열매맺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2012.7.25 눅7:11-23  불쌍히 여기심

원래 오늘 아침 일찌기 뮌헨 출장 계획이었으나 그쪽 사정으로 갑작스레 취소되었습니다. 그래서 변함없이 이 아침에도 묵상케 하신 주님께 감사.. 오늘 큐티 본문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는 장면과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네요. 이 두 부분의 상관관계를 찾는 것을 오늘 묵상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22절 말씀을 먼저 붙잡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여기서 제가 주목한 것은 각 부분의 주어와 동사입니다. 동사를 원뜻에 맞게 수정해 보았습니다. 맹인 -> 보게 됨, 못걷는 사람 -> 걷게 됨, 나병환자 -> 깨끗함 받음, 귀먹은 사람 -> 듣게 됨, 죽은자 -> 살아나게 됨, 가난한 자 -> 복음을 전파받음... 주어와 동사의 관련성이 보이십니까? 주어들은 한 마디로 약자 그룹이지요. 동사는? 어떻게 되거나 받는 것이지요. 즉, 동사 중에서도 수동태입니다. 문법적으로 얘기하자면, 사역동사를 피동형으로 바꾼 수동태 문장입니다. 사역동사를 쓰면 이렇게 되지요. 누군가가 보게 하고, 걷게 하고, 깨끗케 하고, 듣게 하고, 살리고, 복음을 전파한다. 원래의 주어가 행동의 주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사역자(사역동사의 실제적 주어)는 주어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그 뒤에 숨어있는 사역의 주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약자 그룹을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바꾼 실질적 동인, 변화의 큰 손, 그 분은 과연 어떤 때에 움직이실까? 주어인 약자 그룹이 무엇을 하고 있을 때, 그 분은 그 자비로운 손길을 뻗어 역사를 일으키실까?

이 의문을 마음에 간직하고, 전반부의 나인성 과부 얘기를 들여다 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셨는지 추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붙잡은 두번째 말씀은 13절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첫번째 발견- 주께서... 누가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예수라고 표현했지 '주'라고 쓰지 않았었는데.. 두번째 발견- 불쌍히 여기사.. 세번째 발견- 울지 말라..
복음서 기자로서의 누가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왜 이 장면에서는 그가 예수님을 객관적으로 예수라 표현하지 않고 '주님'으로 썼을까? "불쌍히 여기사" 이것 때문이라고 저는 감히 생각했습니다. 불쌍히 여기심- 이것이 주님께서 큰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자비로움의 손길을 펼친 최초 동인이 아닐까? 보게 하시고, 걷게 하시고, 깨끗케 하시고, 듣게 하시고, 살리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는 그 동력의 시발점- 그것이 불쌍히 여기심이 아닐까? 사역동사의 주어인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게 한 최초의 발화점... 이것이 불쌍히 여기심이 아닐까?

그러면, 약자 그룹인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주님의 동인이 불쌍히 여기심이라면? 당근! 나는 불쌍히 여기심을 받도록 구해야 할것이 아닐까?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내 손을 벌리는 것이다. 어떻게? 세번째 발견이었지. 나인성 과부와 같이.. 아들을 잃은 슬픔에 가득한 하염없는 눈물.. 아, 주님은 그녀의 눈물에 진정 주목하셨단 말인가? 그렇다. "울지말라"- 주님의 말씀이시다. 울지 말라는 말씀은 이런 뜻이 아닐까?
"네가 우니까 나도 슬퍼지는구나.
네 눈물에 나도 눈물이 나오는구나.
그래, 네 슬픔에 나도 함께 하마.
그러니, 이제 울지 말아라.
내가 친히 네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 주마."

눈물만큼 내가 가진 강력한 무기는 없다. 주님께 내 눈물을 보이자. 내 약함으로 인한 나의 슬픔을 숨기지 말자. 약자 그룹인 나는 수동태의 삶이다. 주님이 나의 주어요, 사역의 동인이시다. 아니, 주님만이 내 삶의 주어이시다..




2012.7.26 눅7:24-35  들러리 인생

오늘 전반부(24-30절)의 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을 보면서, "들러리"라는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들러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일의 주체가 아닌 곁따르는 노릇이나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네이버 사전) 전통 서양 스타일의 결혼식에는, 신부도 들러리가 있지만 신랑도 그러합니다. 세례 요한은 말하자면, 신랑(예수님)의 들러리로 나선 셈이지요. 들러리는 통상 가장 친한 친구가 주인공을 위해 봉사하는 역할입니다. 그래서 신랑의 들러리가 영어 표현으로는 "the best man"입니다. 주인공인 예수님도 그를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그보다 큰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지요.

세례요한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그가 한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신부를 취한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 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9-30) 여기서 '그', 즉 신랑은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주인공인 신랑이 가장 멋지게, 아름답게, 영광스럽도록 도우는 들러리는 뭣땜에 기쁠까? "신랑의 음성을 들을 때.." 그 때 들러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아, 신랑 멋져!" 이 한마디면 족하겠지요.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표현대로 "예수님은 내 안에서 흥하여야 하겠고, 내 자아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렇게 나도 매순간 외쳐야 하겠지요.

사실, 은혜시대를 사는 나의 영광된 역할은 세례 요한보다 더 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내 교만일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보다 내가 더 크다고..^^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28절) 천국에서 나는 지극히 작은 자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나는 세례 요한보다 큽니다. 왜일까? 내가 그보다 더 큰 이유가 단 한가지 있습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메시야로 사람들 앞에서 선포했지만, 그는 예수님을 '갖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큰,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뛰어났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베푸신 은혜시대의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모세가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직 그 세대의 사람들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내 안에 영으로 거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 하나님의 아들을...

세례 요한도, 엘리야도, 모세도, 다윗도, 아브라함도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11:13) 아, 약속 중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 이를 내가 누리고 살아감이 어떤 때는 믿기지가 않습니다.ㅠ.ㅠ. 오직 은혜시대를 사는 나만의, 아니 우리만의 특권입니다. 오, 주님... 경배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영광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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