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9.18 큐티묵상 빌3:7-9 <그의 안에서 내가 발견되는 은혜>
(붙잡은 단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3:7-9)
쾰른에 있는 저에게도 한마음교회 특새의 말씀이 알알이 전해집니다. 오늘 접한 갈렙의 믿음(수14:6-14)은 예전에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말씀입니다. 제게 있어, 갈렙은 '온전함'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민14:24)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신1:36)
"...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수14:14)
갈렙에 대해 세 번이나 증거되는 말씀의 공통어는 '온전함'이지요. 그의 온전한 믿음, 온전한 순종을 묵상하면서, 제게 빌립보서 3장의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위의 붙잡은 말씀을 대하면서, '온전함의 경지'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마지막 네번째 단계인 주님 안에서 내가 발견되는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발견한 4단계는 아래와 같습니다.
.1단계: 주님을 위하여 - 내게 유익하던 것들을 해로 여김
.2단계: 주님을 앎 - 모든 것을 해로 여김
.3단계: 주님을 얻음 - 모든 것을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
.4단계: 주님 안에서 발견됨 - 온전한 믿음
1단계는
내가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이 때에는
내게 유익했던 것들을 해로 여깁니다.
2단계는
내가 주님을 더욱 알아 가는 삶입니다.
이 때에는
내게 유익했던 것들 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을 해로 여깁니다.
3단계는
내가 주님을 알뿐 아니라
주님을 얻는 삶입니다.
이 때에는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버리고 배설물로 여깁니다.
4단계는
내가 주님을 얻을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내가 발견되는 삶입니다.
이 때에는
내가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믿음이요 은혜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하고,
내가 주님을 알고,
내가 주님을 얻고,
내가 주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
주님이 나를 발견해 주시는 것.
내가 일평생 지향해야 할
온전한 은혜요 믿음입니다.
갈렙과 같이..
바울과 같이..
그 온전함의 길을 향해 가기를
내 온맘 모아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2012.9.21 큐티묵상 마5:5 <온유하다는 의미는?>
(붙잡은 말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5)
쾰른에 있는 동안, 교회 홈피에 올라와 있던 P집사님의 묵상 글이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온유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온유에 대한 귀한 묵상 내용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를 따라 온유함이 내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묵상해 봅니다.
'온유한 자'의 원어(호프 프라에이스)는 '가까이 하다' 또는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일반적으로는, 인내, 겸손, 사랑, 친절, 동정 등의 함축적 의미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원뜻에 맞게, 온유는 내 마음 보다는 '주님의 마음을 따르는 영성'이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온유는 막무가내 고개를 숙이고 친절하며 겸손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빼고 가장 온유한 사람이 누구일까? 요셉, 다윗, 다니엘일까? 의외로 제가 찾은 해답은 모세였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그런데, 모세는 혈기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엔 애굽 군인 둘을 가차없이 죽였고, 광야에서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낼 때 쓸데없는 혈기를 부렸습니다. 게다가, 시내산에서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십계명 돌판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온유함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닮아야 할 온유함이겠지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그 온유한 예수님은 시장터 같았던 성전을 채찍으로 과감히 청소하셨고,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질타하셨으며, 회개하지 않은 고을들에 화를 선포하셨으며, 열매를 맺지 못했던 무화과나무에게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제가 본 예수님은, 십자가와 죄인들에게는 털 깍는 자 앞의 양처럼 유순하지만, 불의와 죄 앞에서는 추호의 타협도 없는 불의 사자와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온유함이나 예수님의 온유함은 제가 처음 생각했던 '온순하고 부드러움'의 온유함과는 괴리감이 있는 것이지요. 즉, 평상시에는 온순하다가도, 화를 낼 때는 내는 거침이 없는 '견고함'이 온유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그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을까? 저는 그 해답을 1복과 2복에서 찾았습니다. 3복의 온유한 자는 1복과 2복을 누린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단계이니까요. 다시 말해, 1복의 가난한 마음과 2복의 애통하는 마음이 3복의 온유한 마음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겠지요. 아, 예수의 마음을 소유한 자만큼 온유한 자가 세상의 어디에 더 있을까요?
저는 이 온유한 마음을 뇌성마비자의 세계로 인식하였습니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언젠가 쓴 "핸디캡이 누릴 수 있는 팔복"의 자작시 중 3복에 대한 부분입니다.
복되도다! 온유한 사람들이여, 그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3복은 뇌성마비자가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뇌성마비자의 세계는 단순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모릅니다.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울고, 감정이 상할 때 화를 냅니다.
창조주가 부여한 본래의 감정대로 행함에 거침이 없습니다.
마음과 말과 행동이 일치합니다.
예수의 마음과 일치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의 마음이 나의 행동입니다.
뇌성마비자처럼..
온유함의 본질은 예수님의 마음 만을 따르는 단순함입니다.
1) 내 안과 밖의 일치로 인한 견고함과,
2) 죄나 불의에 대한 절대적 비타협,
3) 미래에 대한 나의 통제권을 포기함으로 두려움이 없는 상태
의 세 가지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오직 예수님의 마음을 내가 소유할 때만이라야 가능한 것이겠지요. 그 외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내가 온유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뇌성마비자의 세계라고 정의할 수 있구요. 내 중심의 속사람과 말과 행동이 일치함은, 내가 예수의 마음을 가졌을 때 뿐입니다.
뇌성마비자처럼...
주님의 온유를 닮고 싶습니다.
2012.9.22 QT묵상 수24장 <제3의 지도자 엘르아살>
(붙잡은 말씀)
...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으매 (수24:29)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수24:33)
오늘 오전 교회의 양육자 스쿨 시간에 제가 퀴즈를 냈습니다. 먼저 아래의 민수기 14장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너희 중에서 20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민14:29-30)
제가 낸 OX 퀴즈 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20세 이상 남자 중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많은 분들이 위의 민수기 말씀을 근거로 위 퀴즈는 '맞다'고 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한 정답은 X(틀리다) 였습니다. 제가 파 놓은 함정(?)에 걸린 것이지요.ㅎㅎ 사실은 위 귀절 가운데 암시가 있습니다. 그 비밀은 '계수'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민수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각 지파별로 계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남자 중 싸울 수 있는 사람, 즉 20세 이상의 남자를 계수했던 거지요. 그런데, 그 계수함에 예외를 둔 지파가 있음을 아시는지요? 예, 바로 레위 지파였습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의 남자는 군인으로 차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별도로 지게 된 것입니다. (민1:47-54)
그러니까 위의 OX 퀴즈가 O정답이 되려면 이렇게 써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계수함 받은 20세 이상 남자 중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즉, 레위 지파 중 20세 이상의 남자가 그 때에 있었다면 그(들)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도 있었겠다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예외가 되는 사람을 최소한 한 사람 찾아 냈습니다! 그가 바로 두번째 붙잡은 말씀의 엘르아살입니다. 아론의 셋째 아들로서 대제사장을 이어받은 이가 엘르아살이었지요. 출애굽 전에 그는 이미 장성하여 결혼했고 아들을 낳기까지 했습니다.(출6:25) 오늘 특새 본문(수24:14-25) 직후, 여호수아서의 마지막을 장식한 말씀이 엘르아살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위치가 중요했던 것이지요. 그러한 그를, 제1 지도자인 여호수아와 제2 지도자인 갈렙에 이어, 제3의 지도자라고 저는 부르고 싶습니다. 죽은 1대 대제사장인 아론의 뒤를 이어 2대의 대제사장이 되었고, 다른 지도자인 여호수아와 갈렙과 함께 그는 꿈의 가나안 땅에 조용히, 그렇지만 당당하게 들어갔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 자신에게 '특별한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갈렙은 다른 정탐꾼들의 보고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죽음을 무릅썼고, 여호수아도 모세의 지명된 공식 후계자이며 뛰어난 지도자로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역사 속에서 그들은 하이라이트를 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러면, 엘르아살은? 대제사장이라는 공식 직책 이외에는 이렇다 할 뚜렷한 행적이 없었습니다. 내세울 만한 '특별한 그 무엇'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론의 아들이기는 하나, 셋째 아들이어서 위의 두 형이 일찌감치 죽지 않았으면 대제사장의 직무를 맡을 생각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이 된 이후로도 그는 조용히 뒤에서 영적 지도자로서 남아 있었습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널 때, 또한 여리고 성을 돌 때, 그는 제사장들을 이끌고 조용히 뒤에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제 3의 지도자로서 가나안 땅을 밟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오늘 특새의 새벽에 이러한 엘르아살을 생각하면서 제게 큰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내 자격, 내 성품, 내 생각, 내 언어, 내 행위를 돌아볼 때, 나는 도무지 쓸모없어 버림받아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엘르아살과 같이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못난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택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너는 왕같은 제사장이라"(벧전2:9)고 주님께서는 나를 그렇게 인정해 주셨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그저 죄송하고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아, 사랑입니다.
그 한량없는 사랑이
물결처럼 제 가슴에 밀려 왔습니다.
오, 주님....
엘르아살을 대제사장으로 택해 주신 주 하나님,
아무 공로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저를
또한 택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랑 받을 자격 없는 저를
이토록 사랑해 주셨습니다.
주님, 이제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 사랑을 받으시옵소서. 아멘.
2012.9.24 큐티묵상 롬1:16-17 <부끄러움의 반대는?>
(붙잡은 말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16절)
(이 글은 자기 연민에 관련되어 고민했던 K집사에게 쓴 글입니다.)
K집사님, 부끄러움의 반대말이 뭔지 아십니까? 용기, 담대함, 편안함, 자연스러움 등이겠지요. 주일날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말씀 속에서 찾아낸 부끄러움의 반대말은 "믿음"이었습니다. 왜 믿음이 부끄러움의 반대어가 될까요? 롬1:16-17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끄러움 이후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당연히 믿음이지요. 네 번이나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16절에 1번, 17절에 3번이지요.
복음과 나를 Connect(연결)해 주는 단어는 이 두가지 뿐입니다.
1) 부끄러움
2) 믿음
이렇게 본다면.. 부끄러움이란 복음을 내가 접했을 때, 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일컽습니다. 반대로, 믿음이란.. 복음을 전적으로 내것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이겠지요. 복음과 내가 합쳐지는 것입니다. 그 연결점이 나의 '믿음'인 것이구요.
어찌보면 복음은 주님께서 나에게 선물로 주신 '제 2의 인격'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롬1:16-17 말씀에서 나에게 소개된 복음은,
1) 하나님의 능력,
2) 하나님의 의로서
나로 하여금 Connect 시켜 주시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해 주십니다.
(제 개인적 해석은.. 첫번째, 믿음으로 = 주님이 내게 주신 믿음의 선물, 두번째, 믿음에 = 나의 의지적 믿음)
그래서, 내가 복음을 믿는다는 의미는 이를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음 안으로 완전히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새로운 신세계로 내 온몸을 맡겨 이제는 복음이 인도하는 대로 내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쳇말로, 복음 속에 내가 올-인(all in)하여 서로 결합하고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복음을 만나게 되었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거기에 눈물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대개의 눈물은 자기 연민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믿는 것의 출발이 회개라고 한다면, 회개의 첫단추가 나의 눈물이니까요. 그리고, 내 경우 그 눈물의 시작은 자기 연민이었습니다. 나를 들여다 보니 어디 하나라도 쓸데가 없음을 발견했고, 그 '쓸모없음'을 성경에서는 '죄'라고 규정지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쏟아지는 자기연민의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내게는 자기 연민이 은혜의 시작이었습니다. 단, 그런 나와 복음이 만난다는 전제에서이겠지요. 이 둘이 서로 Connect 되는 것이 '믿음'... 물론, 훗날에 뒤돌아보니 이 믿음이야말로 주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은 모두 직구입니다. 그것도 목사님 말씀대로 돌직구이지요.^^ 변화구나 속임수 공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를 전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입장이 다르겠지요. 전해주는 사람은 가능한 받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 '부끄러움'으로 받지 않도록 조심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받는 사람이 '믿음'으로 이를 받아 들이려면 그 믿음의 선물은 주님으로부터 와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전에 나와 K집사님이 선물 받았던 믿음과 같이...
2012.9.25 QT묵상 눅23:33-43 <구원의 조건>
(붙잡은 말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34절)
관리들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니..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35절)
군인들도.. 네가 너를 구원하라 (37절)
행악자 중 하나는..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39절)
예수여,.. 나를 기억하소서 (42절)
샬롬~ 뮌헨의 좋은 아침에 오랜만에 생명의 삶 큐티를 씁니다. 특새 기간 다른 말씀들을 받느라 일상의 큐티를 멈췄었습니다. 이 말씀은 며칠 전 집사람과 함께 잠깐 함께 연구를 했던 차에 마침 시간이 되어 간단히 묵상을 다시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초기 장면에서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저자 누가는 제 3자의 입장에서 연극을 보듯이 하나씩 풀어 써 나갑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은 다섯 그룹이었습니다. 백성, 관리들, 군인들, 행악자1, 행악자2의 각 그룹들의 관심사와 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행태가 너무나 명확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을 하였고, 관리들과 군인들, 그리고 나아가 행악자1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비웃고 희롱하고 비방하였습니다. 행악자2만이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관리들, 군인들, 행악자1의 말 중에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구원'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비방과 조롱 속의 말 중에서, 그들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한결같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아, 모든 인간의 끊임없는 최고 최대의 관심사- 그것이 구원 아니겠습니까? 서서 구경하는 백성의 관심사도 결국은 구원이겠지요. 본문에서 그들이 생각하고 구현했던 '구원'은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 구원은 예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이면 스스로 너를 구원해 보라"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주문이요 기대치였습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방관자적 구원'이었습니다. 자신과는 별로 관련 없는, 그리고 심각하지도 않는, 그런 구원을 그들은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신자인 우리는 구원이 이러한 것이 아님을 압니다.
나를 위한 구원의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 조건은 단 하나, 죄사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죄란 그만큼 내 목숨을 쥐고 있는 최고 최대의 문제인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기도가 너무나 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기도가 어느 때보다 절절하게 내 마음에 들어온 것은, 내가 이전에 십자가 주위에 서 있었던 구경꾼(Peer group)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바로 그 백성이요, 관리요, 군인이요, 행악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제 마음에 이렇게 들렸습니다. "구경꾼, 방관자, 조롱자, 비방자에서 돌아서라. 행악자2가 되어 죄사함을 받으라."
행악자2의 고백이야말로 복음의 진수요, 복음을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입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죄의 정체성, 정죄의 무서움을 그는 정확하게, 그리고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정체성 앞에서 필요한 것은 그 해결책이겠지요.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놀랍게도 그는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고백 속에는 죄의 대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죄와는 전혀 관련없는, 즉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서의 예수님이 있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의 마지막 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프로세스였습니다. 직전에 나눴던 삼손의 기도와도 같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삿16:28) 아,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한 영혼의 구원을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잔잔한 미소가 보입니다.
그래서 그 행악자는 죄사함을 받았고,
이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기도는 그렇게 이루어 졌습니다.
행악자2에게,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나아가 부족한 나에게도...
죄사함의 은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아름다운 복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오늘도 붙듭니다.
복음이 나의 의요, 나의 능력입니다. 아멘.
2012.9.27 큐티묵상 <내 삶의 5대 프로세스>
(붙잡은 단어)
버리고, 품고, 지고, 맡기고, 드림.
오늘 "약속이 나의 목적이 될 때"라는 특새 말씀을 대하면서 떠오른 단어는 순종이었습니다. 그 신실한 약속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거듭남으로 구원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의 내 삶을 보면, 주님을 더 알아가고 주님과 더 가까와지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프로세스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이를 성화의 프로세스라고 해도 좋고, 순종의 프로세스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삶의 프로세스를 내가 잘 하고 있다, 또는 그 프로세스 안에 내가 잘 가고 있다, 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말씀의 조명 안에서 제가 느낀 부분이 그러하다는 작은 깨달음을 나눌 뿐입니다.
내 삶의 5대 프로세스를 나누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프로세스를 거치기 이전에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 거듭남이지요. reborn Christian, 즉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내가 다시 태어나려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니고데모의 우문처럼,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죽지 않고, 어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죽음에 대한 테마는 이전에 쓴 글이 여기저기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큐티글은 그 죽음을 철두철미 경험한 거듭난 신자에게 적용할 프로세스라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 글은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을 향한 목적 지향성의 약속과도 같은 것입니다.
거듭난 이후에는 내가 할 일이 사실상 별로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 삶을 이끌고 통치하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때론 이것이 실제 내 삶 속에서 제대로 잘 되지 못함을 발견합니다. 나는 왜 그런지 그 원인을 정확히 알고 있지요. 내가 은혜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거듭날 때 경험한 죽음을 매일, 매순간 현 시점에서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생명이 내 안에 있지만, '나'라는 장애물로 인해 생명의 활동이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새생명의 빛을 담은 질그릇입니다.(고후4:7) 질그릇이 깨져야 질그릇 안의 빛이 드러나듯, 내 자아가 깨져야 내 안의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제가 찾은 말씀 속에서는, 어찌하면 내가 죽고, 대신 예수님이 사실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 방법론을 제 나름의 5대 프로세스로 정리해 보았습니다.(신학적 근거는 없음.^^)
1) 버리고: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모든 것(빌3:8)
2) 품고: 한마음(빌2:2),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2:5)
3) 지고: 예수의 죽음(고후4:10), 자기 십자가(마16:24)
4) 맡기고: 원수 갚는 것(롬12:19), 모든 염려(벧전5:7)
5) 드림: 지체(롬6:13) 즉, 내 몸(롬12:2)
이를 내게 주신 명령어로 다시 써 봅니다.
1) 버리라! 예수와 관계없는 네 모든 것을..
2) 품으라! 한마음, 곧 예수의 마음을..
3) 지라! 예수의 죽음을 통한 자기 십자가를..
4) 맡기라! 네 원수 갚는 것과 네 모든 염려를..
5) 드리라! 예수의 지체된 네 몸을..
언젠가 5대 프로세스 각각에 대한 묵상글을 쓰고 싶습니다.(지금은 시간도, 역량도 안됩니다.ㅠ.) 그런데, 이것은 신자 각자에게 임한 성령의 조명이 다름으로 인해, 프로세스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제안한 순서도, '이것이 딱 맞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한 5대 프로세스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거대한 중심을 통해 끊임없이 돌아가는 원형 싸이클이니까요.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과 관계없는 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버리겠습니다.
한마음, 곧 주님의 아름다운 마음을 품겠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한 자기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내 원수 갚는 것과 내 염려를 모두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주님의 지체된 내 몸을 산제물로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