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삼상15장] 아말렉의 추억

조회 수 2780 추천 수 113 2010.11.20 12:55:57
본문: 사무엘상 15:10~23

내용 요약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함으로 은혜의 길에 이르지 못한다.

붙잡은 말씀
2절 아말렉이..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11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22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느낌 및 묵상

본문의 핵심 구절은 22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로 생각된다. 그러면 왜 사울이 순종하지 못했을까? 사울의 무엇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을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으며, 사울이 미쓰한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본문에 많은 힌트가 나온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백성의 말을 더 중시하고 따랐다(9, 24절). 자신을 위해 승전비를 세움으로써, 그는 하나님의 이름 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데 더 열심이었다(12절). 그리고 그가 믿은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하나님, 즉 사무엘의 하나님이었다(15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보다는 탈취하기에 더 급급했다(19절).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었던 것일까? 물론 그랬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지 않았겠는가?

그의 근원적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13장14절에 그 해답의 일부가 있지 않을까?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사무엘의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새로이 구하여 사울 대신 왕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마음은 서로 통해야 맞는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 주어야 마음이 맞는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그가 얼마만한 관심이 있었을가? 이것이 사울의 근원적 문제가 아닐까?

주님은 무엇을 더 원하실까? 주님의 명령을 잘 알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일까? 아니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마음을 알고 더 사모하는 것일까? 은혜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이 중에 어느 것이 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가? 율법인가, 은혜인가? 그러기에 호세아도 선언하지 않았는가? “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사울의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했다는 것이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해 자신은 이를 철저히 지켰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셨다.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11절) 하나님이 보시는 순종이란 무엇인가? 첫째, 돌이킴이다. 둘째, 하나님을 좇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셋째의 순종은 첫째와 둘째가 먼저 선행되고 충족될 때에야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내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아신다. 말씀을 순종하려 하기 이전에 돌이킴과 하나님을 좇는 것이 먼저다. 다른 말로, 외적인 순종 이전에 내적인 순종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문제도 따지고 보면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기억했다. 그들도 혹시 하나님의 ‘명령만을’ 기억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하와는 그 명령하신 말씀조차 제대로 확신있게 뱀에게 설명을 못했지 않은가? “정녕 죽으리라”하신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바꾸지 않았는가? “먹지 말라”고 하셨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되(창2:15), 하나님이 주신 자유 안에서 생명과를 포함한 모든 아름다운 실과를 향유하고, 마음껏 하나님과 교제하며 충만한 삶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마음과 그분의 뜻에 관심이 있었더라면.. 그 동산을 친히 거니셨던(창3:8) 창조주 하나님과 정겨운 교제를 나누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마음을 좀더 배워 갔었더라면.. 아, 이것이 내 개인만의 아쉬움일까?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15장 초두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두 절로 구성되어 있다. 2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3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사울이 기억한 것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3절 말씀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2절 말씀이 아닌가? 2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아말렉에 대한 이전 일을 추억하신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아말렉에 대한 추억을 얼마나 심각하게 사울이 받아들이고 이해했을까? 출애굽기 17장과 신명기 25장에 나오는 아말렉의 이야기를 알아야, 아말렉을 깡그리 진멸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배경과 그분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 이르었을 때 첫번째 맞닥뜨린 대적이 바로 아말렉이었다. 여호수아는 전장에서 싸우고, 모세가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두손 높이 들린 기도를 하면서 승리로 이끌었던 유명한 이야기..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 만방에 드러나는 순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찌니라. 너는 잊지 말찌니라.”(신25:17,19) 하나님은 또한 맹세로 말씀하셨다.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출17:16).

어느 특정한 한 민족에 대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겠는가? 오직 한 민족, 바로 아말렉을 향해서만 하신 말씀이었다. 이 시점에서 아말렉의 죄악은 관영할 대로 관영했다(창6:5참조).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진중에 뒤쳐진 피곤하고 약한 사람들을 기습해서 노략했다(신25:18). 그들은 한마디로 뒷다리 잡고 뒷통수 때리는 야비한 민족이었다. 감히 어찌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몰래 뒤에서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아,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하심이 느껴진다.

영적으로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나의 영적 아말렉은 무엇인가? 내 연약함, 내 약점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정죄함이 아닌가? 그것은 내가 피곤하고 약할 때 뒤에서 가차없이 나를 공격해 왔지 않은가? 그 정죄의 근거는 무엇인가? 원수된 것, 곧 의문(儀文)에 속한 율법(엡2:15)이 아닌가? 그 배후에는 또한 죄의 어두운 결과인 사망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밤낮 참소하던 자(계12:10)인 사단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나의 영적 아말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말렉에게 진노를 발하시며 말씀하신다. 기억하라, 도말하라, 잊지마라, (내가 직접) 대대로 싸우리라.. 이렇듯 엄위하고도 중차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회고(추억)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것은 은혜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회고였다. 영적 아말렉을 이 땅에서 없애버려라! 그 이름을 도말하라! 이제 아말렉의 이름을 지상에서 도말할 위대한 사역이 사울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판장이 될 그 자리에 사울은 서 있었던 것이다.

이 QT 본문을 묵상하던 어느날 밤 집에서 침상에 편히 누워 이곳저곳을 뒤적이다가, 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말렉에 대한 추억이 눈에 들어 왔다. 아말렉의 추억이 무엇일까? 창세기, 출애굽기, 신명기 등 여기저기 살피던 중 신명기 25:17~19 말씀을 읽는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내가 감히 이 말씀을 누워서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지엄하신 명령과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주님의 아름다운 마음과 그분의 뜻을 깨달았을 때에, 나는 바로 무릎을 꿇고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었다. 아, 좋으신 주님!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울은 아말렉을 도말하는 이 사역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무엘상30장에서 아말렉은 아직도 존재한다! 아말렉 족속에게 공격을 당해 다윗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가족들이 납치되는 수난을 겪는다. 이후에도 아말렉의 이름은 수차례 등장한다. 하나님은 이후 죽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삼상28:18) 하나님의 말씀이 명확하지 않은가?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좇아 그분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아부어야 했던 것이다.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만방에 알리고 그 이름을 지구상에서 도말해야 했다. 이것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특별한 하나님의 배려이자 은혜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자 그분의 깊은 뜻이었다.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 보다는 백성들의 눈치를 보고 약탈물을 탈취하는데 더 급급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보다는 빨리 승전가를 울리고 개선의 나팔을 불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마음에 대해 그가 진정한 관심이 있었는가? 결과적으로 사울이 어떤 죽음을 맞이했을까? 블레셋과의 전장터에서 아말렉(!) 소년의 칼에 마지막으로 찔려 죽지 않았는가?(삼하1:10) 이 어찌 무서운 일이 아닌가? 진멸되지 않은 아말렉의 잔당에게 그는 죽음을 당했다. 사울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스스로 자멸한 것이었다.

15장 초두의 하나님 명령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만약 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그가 정확히 알았다면? 만약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숨겨져 있는 그분의 뜻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는 제사보다는 순종의 길을 선택했으리라. 온전한 순종을 이루려면 율법과 명령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숭고한 뜻이 숨겨져 있지 않은가?

참된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서 출발한다.
참된 순종은 그분의 아름다운 마음을 가슴으로 체험함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아멜렉에 대한 추억이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이렇듯 내게 주신 은혜를 알고 체험할 때 순종은 가능한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뜻을 깨달아 앎으로 시작한다.
아니, 그것 자체가 은혜이다.
은혜를 기반으로 하는 내적 순종이 선행될 때에야,
외적 순종도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적용

15장 2절과 3절을 대비해서 이렇게 과감하게 적용하면 어떨까?

2절은 은혜이고, (2절 없는) 3절은 율법이다.
2절은 영이요, (2절 없는) 3절은 의문(儀文)이다.
3절만 달랑 가지고는 순종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
의문으로 된 율법만을 가지고는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없듯이.

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야 은혜의 길이 열린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3:6)

예수님이 하신 일은,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이다. (골2:14)

할렐루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출17:16)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엡2:15)
주님께서 원수 의문의 율법을 도말하셨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후15:55)
여자의 후손인 주님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 (창3:15)
나의 영적 아말렉은 이미 사라졌고 힘을 잃었다!

어리석은 사울왕처럼 되지 말자.
아말렉의 추억을 끝까지 기억하자.
나는 아래 두가지 길 중 후자를 택하겠다.

제사인가, 순종인가?
제사를 택할 것인가, 순종을 택할 것인가?
의문인가, 영인가?
겉만 햝는 육신적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주님의 영의 세계로 들어갈 것인가?
율법인가, 은혜인가?
율법에 매여 종살이 할 것인가, 은혜의 왕노릇함에 나를 맡길 것인가?



기도
주 하나님, 사울과 아말렉을 통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말렉을 멸하고자 하는 주님의 숭고한 뜻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사울처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우를 범치 않도록 저를 주님 안에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 위대한 일을 이루시고자 주님께서 십자가 사랑으로 제게 친히 임재해 주심에 무한 감사드립니다. 제 영적 아말렉을 십자가에서 도말해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일과 주님의 마음을 제가 기억함으로, 저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과 소명을 감당해 나가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존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순희

2010.11.20 21:52:06
*.165.73.38

사울처럼 명령에 순종했다고 착각하는 순종이 될까 두렵습니다.
자신의 어떠함이 우상이 되어서 그 우상을 더 섬기는 순종을 자꾸만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우기는 실수를 얼마나 많이 하고 사는지...
내 속의 영적 아말렉을 멸절시키려면 말씀을 알되 하나님의 그 사랑의 맘, 오죽하시면 피와
물을 다 쏟으시면서까지 사랑하시는지를 온전히 알아야함을 깨닫습니다.
은혜의 왕노릇,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노릇...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 [분깃신앙] 주님만이 나의 분깃 (신약편) [3] 이선우 2011-04-29 969
58 [십자가 묵상] 부끄러움의 십자가 [1] 이선우 2011-04-10 806
57 [십자가 묵상] 시간의 해결자 [5] 이선우 2011-03-26 945
56 [사순절QT요19장] 나의 유월절 어린양 [3] 이선우 2011-03-12 1116
55 [분깃신앙] 주님은 나의 분깃 (구약편) [3] 이선우 2011-02-27 10586
54 [QT요21장] 어부에서 목자로 [3] 이선우 2011-02-12 945
53 [팔복 묵상] 핸디캡을 위한 팔복 [3] 이선우 2011-02-06 775
52 [QT삼상2장] 자라게 하시는 주님 [1] 이선우 2011-01-30 3686
51 [사귐신앙]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5] 이선우 2011-01-22 1460
50 [간증] 14살 선영 자매의 간증 [4] 이선우 2011-01-16 960
49 [QT왕하2장] (사진추가) 엘리사의 눈물 file [6] 이선우 2011-01-07 1218
48 [십자가 묵상] 버려두심 vs. 내어주심 [1] 이선우 2011-01-01 851
47 [사귐신앙] 모세의 사귐신앙 [3] 이선우 2010-12-26 1569
46 [QT왕상18장,19장] 엘리야 묵상 [3] 이선우 2010-12-18 1226
45 [쉬어가기] 골프와 신앙(1) [2] 이선우 2010-12-11 1057
44 [QT행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누룩 [5] 이선우 2010-12-04 1868
43 [사귐신앙] 사귐의 지존(至尊) 하나님 [11] 이선우 2010-11-27 862
» [QT삼상15장] 아말렉의 추억 [1] 이선우 2010-11-20 2780
41 [생활단상] A과장의 첫돌 잔치 [7] 이선우 2010-11-13 873
40 [QT마13장] 레이어는 가라 [2] 이선우 2010-11-06 1124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