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자유 게시판에 올린 “빚쟁이 삼총사로부터 자유하기”와 중복된 내용입니다. 그 중 간증 내용을 중심으로 다시 편집했습니다. 이미 읽으신 분들은 내용이 중복되므로 따로 보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웨이브4기가 제게 귀중한 것은 1부와 2부의 성령 체험도 체험이지만, 이 시기에 마음의 죽음을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죽음은 일생동안 제 영혼의 고백록과도 같은 것입니다. 샬롬~
**
정죄함으로부터의 자유는, 1979년 제가 주님을 영접한 이후에 맛본 큰 기쁨 중 하나였습니다. 웨이브2기때 처음 경험한 그 자유함으로 온 세상을 가진 듯 뛸듯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함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때때로 내게 찾아오는 곁길로 감과 넘어짐이 있을 때마다, 나는 곤고한 자가 되어 바울과 같이 외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이는 내 외적 죄의 행위라기 보다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성이 살아나며 드러내어지는 내 육신의 추한 욕망으로 인한 것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때는 격한 분노로, 어떤 때는 참을 수 없는 욕정으로, 어떤 때는 가식적 위선으로, 어떤 때는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하이드’(지킬과 하이드의^^)의 형태로 드러나는 내 안의 모습들.. 그럴 때마다 저는 빚쟁이 삼총사의 정죄에 치이고 고통받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먼저, 그렇게도 저를 괴롭혔던 빚쟁이 삼총사의 정체를 소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미 완결된 빚 청산에 대해서 중간에 끼어들어 찝적거리는 제3자입니다. 쩝.. 뭔가 중간에 서서 슬쩍 어부지리를 취하려는 심보가 아닐까요? 다 끝나버린 나의 죄에 대한 정산을 다시 하자고 달겨드는 못된 선수들이지요. 이들은 최후 정산이 아직 남아 있으니, 자기네하고 중간 정산이나 해 보자고 난리입니다. 그때그때 기회를 보아 나의 죄값을 두고 치근덕거리며, 내게 정죄의 화살을 쏘아 보냅니다. 그들은 바로 로마서에 나오는 율법과 양심과 사단입니다. 물론 사단이야말로 진정 못된 원수이고, 율법과 양심은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나를 정죄의 사슬로 몰아간다는 관점에서 (나에게!) 못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채권자도 아니면서 채권자인양 행세하고, 내게 빚 독촉하고 눈 부릎뜨며, 독설과 으름장과 협박에.. 삼총사의 좌우 스트레이트와 훅, 어퍼컷으로 돌림빵을 당할지면, 내 몸은 어느새 만신창이 그로기 상태가 됩니다. 아, 그렇게도 나를 못살게 굴었던 지긋지긋한 빚쟁이 삼총사여.. 잊어버릴만 하면 찾아오는 빚쟁이 삼총사의 정죄의 화살들이 내게는 얼마나 아프고 따가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엔 워치만 니의 영성 책자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 “율법과 은혜”였습니다. 워치만 니에 의하면, 율법에서 은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뭔가 신비적 체험을 해야 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한때 그 드라마틱한 체험을 하기 위해 기도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과 똑같은 또 하나의 믿음의 과정이었습니다. 어떤 신비적 체험이나 기적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주님의 이루심을 바라보고, 감사 감격함으로 이를 믿고 받아드리는 고백이면 족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똑같은 경험을 체험했음을 봅니다. 로마서 7장 24절의 절망에서 8장 1절의 위대한 승리의 선언으로 이어짐을 봅니다. 그 중간에, 그가 발견한 해결책을 그는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7장 25절이 그 해결점이었습니다. 아, 주 예수 그리스도.. 그가 찾은 해답이었습니다. 그에 따라오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 이어서 힘차게 쏟아져 나오는 정죄함이 없다는 8장의 선언.. 어디에도 신비한 구석은 없었습니다. 나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리 쉬운 것을 그동안 얼마나 어렵게, 오랜 동안을 헤메었던지..
그것은 1995년 웨이브 4기 시절의 어느날,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제게 주신 단순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아래 두가지였습니다.
첫째, 주님을 영접한 이후의 내 삶의 실상과 허상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 말씀이 내가 180도 바뀌어 ‘착한 사람’이 된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새것이 된 것은 맞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영접함으로 죽었던 내 영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영의 중심에 성령님께서 또한 내주하시게 된 거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내 마음, 특히 내 마음 중심에 있는 죄성은 사라지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사실! 이것을 제가 간과했던 것입니다. 내 죄성(Sinful nature)은 내가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나의 ‘연약함’ 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연약함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지저스 슈퍼스타’라는 그룹 안에 들어감으로, 나는 스스로 ‘선한’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내 속에 있는 그 연약함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 연약함을 애써 부인하고 잊어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영과 육이 동시에 존재하며 싸우는 ‘영적 전쟁터’가 된 사실을 짐짓 모른체 한 것이지요. 나는 그저 무조건 선하며 또한 강해지고 싶었습니다. 내 스스로 선함과 강함의 ‘슈퍼스타’가 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아, 주님 안에서는 본래부터 슈퍼스타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허상이었습니다. 내가 그동안 추구했던 것은, 주님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된 노력과 믿음과 기도와 열심이었습니다. 그 주님조차 내 강함의 도구로 쓰고자 했던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도다..(전12:8) 아, 주님이 없는 내 모든 것은 헛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롬7장의 주제요, 크리스쳔의 삶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둘째, 이 영적 전쟁을 이길 수 있는 비결입니다. 바로 그것은 내 연약함의 대표자인 죄성, 즉 내 옛사람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옛사람이 짐짓 죽었다고 예전에도 생각했으나, 이것은 나의 착오였습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서만’ 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죽일 수 없습니다. 이같이 육(肉, Sarx 또는 Flesh)으로 표현되는 나의 옛사람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례를 받았을 때, 이미 보여주신 표징이었습니다.(롬6:1-7) 법(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가 나를 주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롬6:14) 저는 이것을 ‘마음의 죽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죄성이 활동하는 그 장소가 바로 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자아의 죽음이라고도 합니다. 예수 십자가에 내 마음(죄성)이 같이 죽을 때만이, 비로소 나는 영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순서는 바뀜이 없습니다. ‘나’의 죽음이 먼저고, 영적 삶이 나중입니다. 영적 시련과 분투의 롬6장과 7장이 먼저 나온 연후에, 승리의 8장이 이어집니다. 십자가가 먼저요, 부활이 그 뒤를 따릅니다.
롬7:24에서 표현한 그 절망의 바닥에서, 저는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 바라 보았습니다. 십자가가 나의 유일한 해답이요 소망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게 있어서,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의 바닥으로부터 헤어나오는 유일한 길은 예수 십자가, 그 십자가를 부여잡고 주님이 지고가신 골고다의 언덕을 나도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주님께로의 진정한 '회귀(回歸)'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내려 놓습니다. 내 모든 것을 속속들이 포기합니다. 내 마음 깊은 곳의 착한 소원까지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눈물의 고백이 나옵니다. 만물의 찌꺼기보다도 못한 나를 그럼에도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격합니다. 그토록 모질게 괴롭혀 왔던 내 마음 중심에 있는 나의 죄성을 십자가 앞에 내어 놓습니다. 못을 박습니다. 그리 씨름했던 마음이 십자가 앞에서 저항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죽어갑니다. 승리의 선언을 하신 주님을 따라, 나는 '마음의 죽음'이라는 새로운 해방으로 비상합니다. 고운님, 하늘님(성령님)은 '마음이 없는' 나를 보듬으시사, 한무리 빛과 같이 내 속 깊은 곳(속사람)으로 오십니다..
빚쟁이 삼총사는 늘 제 뒤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그들은 제가 잘못될 때마다 그 즉시 가차없이 청구서를 내밉니다. 중간정산, 즉 정죄의 청구서였습니다. 마음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로, 저는 빚쟁이(특히, 사단)의 청구서가 하나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별것 아닌 휴지조각(!)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정죄의 화살을 쏘아대도 따갑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죽은 나무토막과 같기 때문이지요. ㅋㅋ 시체가 고통을 알까요?
그리고 중요한 한가지 더.. 마음의 죽음은 일회성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 일상 속에서 또한 매순간 일어나야 하는 일과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바울이 고백한대로, 주님 안에서 날마다 죽는 경험을 해야 하겠습니다.(고전15:31) 마음의 죽음을 깨달음으로 제 삶의 방향성과 지향점이 바뀌었습니다. 나의 중심이 그리스도로 옮아감을 체험합니다. 때로 쓰러질 지라도, 마음의 죽음을 선언하며 나는 쉽게 일어섭니다.
이 경험을 노래한 것이 아래 ‘마음의 죽음’이라는 시였습니다. 참고로 이 시는 2008년 4월 제가 대만에 있을 때, 은명교회 이민재 목사님과의 교류시에 처음 쓰여진 것입니다.
*
칠흑같이 어두운 삭망의 밤,
나는 그렇게 절망의 나락에서 나옵니다.
휘이적 휘이적
내 등뒤 십자가는 왜 그리 무거운지
기나긴 언덕길 허덕이며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빛 한점 없는 민둥산의 산정에서
나 홀로 낮아짐으로
가로 세로 놓여진 그 십자가에
내 마음을 얹습니다.
꽝, 꽝, 꽝..
세 개의 대못이
양 손목과 발목에 박힙니다.
누운 십자가는 내 마음을 안고
하늘을 향해 일어섭니다.
한 분 십자가의 죽음을 따라
내 마음도 같이 죽어갑니다.
그리 씨름했던 마음이
살려달라 떼쓰듯 애걸합니다.
절규의 피를 흘립니다.
한없이 부서져 갑니다.
아스라한 여명의 빛이 스밀 때까지..
고요함 가운데 한 소리 들립니다.
다 이루었다..
지성소와 성소를 분리했던 성전 휘장이
한순간 갈라짐같이
유혹자의 텃밭이었던 내 마음이
죽음에의 해방으로 비상합니다.
매일 매일 매순간 순간
마음의 죽음으로
나는 그렇게
새로운 부활의 역사를 씁니다.
그토록 한스런
마음의 죽음으로
이제사
고운 님 하늘 님
한무리 빛 되어
내 속 깊은데로
함박 오십니다..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