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과 마법 램프’ 이 이야기를 모르시는 분은 없겠지요. 몇 년 전 디즈니에서 만들었던 만화영화를 아이들과 같이 신나게 본 기억이 납니다. 천년의 잠에서 깨어난 램프의 수호신, 그 이름이 ‘지니’였던 것 같습니다. 지니가 거지인 알라딘에게 세 가지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하지요. 알라딘의 첫 번째 소원은 왕자가 되는 것이었지요. 왕자가 된 후 갖은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공주의 진정한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튼, 알라딘의 마지막 소원은 지니를 램프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었고, 지니는 이에 감동을 받아 알라딘의 ‘친구’가 되어 평생 같이 있게 됩니다.
솔로몬의 소원은 지혜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 간의 분규가 있을 때 왕으로서 재판을 잘 하기 위한 것이었죠. 하나님께서도 그를 가상히 여기셨습니다. 지혜뿐만 아니라 부와 영광을 함께 주셨지요. 여기서 저는 솔로몬의 소원을 다시 한 번 묵상합니다. 솔로몬이 구한 지혜가 정말 최선의 것인가? 솔로몬이 ‘더 좋은 것’을 구할 순 없었을까? 그러면서 문득, 다윗이라면 무엇을 구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보았습니다.
알라딘의 세 가지 소원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사실, 알라딘에게는 딱 한 가지 소원만 있으면 됩니다. 그것은 바로 지니가 그의 곁에 평생 같이 있으면서 그를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지니가 그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면 됩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라딘은 세 번째 소원에서야 비로소 ‘지니의 마음’을 얻게 되었지요. 바로 ‘지니 자신’을 구한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솔로몬의 소원은 알라딘의 첫 번째 소원(왕자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솔로몬은 왕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잘 하기 원했고, 그의 직무를 잘 하기 위한 하나의 ‘직능’으로서 지혜를 구한 것이 아닐까요? 그는 판결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칭찬하셨듯이, 훌륭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라면, 만일 솔로몬이 아니고 다윗이라면, 그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을까요? 다윗이라면, 알라딘의 세 번째 소원과 같이, ‘하나님 자신’을 구했을 것이라고 감히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같이 해 주시는 것, 이것이야말로 다윗이 평생토록 추구했던 것이니까요.
다윗이 특히 좋아했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목동 시절이었던 그는 자기 양들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사랑했지요. 또한, 목자로서 양들을 치고 보호해 줄 수 있는 도구들, 즉 지팡이와 막대기, 그리고 물매가 들어있는 목자의 제구(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죠)를 아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서의 수금을 좋아했겠지요.
젊었을 때의 다윗은 사울왕의 눈을 피해 늘 도망 다녔습니다. 이 때 다윗이 좋아했던 것 중의 하나가 에봇이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만이 입을 수 있는 특별한 예복이지요. 특히, 대제사장의 에봇 예복에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법으로 붙이되, 이 판결 흉패 안에는 ‘우림과 둠밈’을 넣어 하나님의 뜻을 묻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에게 에봇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귀중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왕이 된 이후 다윗이 좋아했던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궤였습니다. 왕권이 안정되자마자 그가 첫 번째 한 일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이었지요. 첫 번째 시도에서는, 사람이 죽는 사고가 나서 큰 낭패를 봅니다. 두 번째 시도에서야 그는 하나님의 궤를 무사히 다윗 성으로 옮기게 되었지요. 이 얘기는 "너도 다윗처럼 춤출 수 있느냐?" 에서 거론된 바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이 좋아했던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목동 시절 좋아했던 목자의 제구와 수금, 젊은 시절에는 제사장의 에봇, 왕이 된 이후엔 하나님의 궤... 이것들을 분석해 보면 그의 마음 속 진정한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을 바랬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축복(지혜, 승리, 부, 영화 등등)도 그에게는 중요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바랐던 소원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이 그와 함께 같이해 주시는 것이었지요.
이것이 솔로몬의 소원과 다윗의 소원과의 근원적 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영어로 얘기하자면, 솔로몬은 Product를 구했고, 다윗은 Source를 구한 것이라고 할까요? 두 사람의 근원적 자세를 조금 과장해서 말해볼까요? 솔로몬은 하나님을 대함에 있어 ‘경외’라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경외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 섬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곁에 늘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했고, 밤낮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마음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이 쓴 것 같이, 다윗의 하나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요일4:18).
막연하게나마 다윗의 소원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묵상은 했지만, 성경적 근거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새번역 성경으로 성경을 읽고있던 어느 날, 시편 27편의 말씀이 제 눈앞으로 큼직하게 다가왔습니다. 마치 누군가 돋보기로 확대하여 큼직한 글자로 해서 튀어나오도록 만든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제 눈을 덮고있던 비늘이 벗겨진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제가 찾고 찾았던, 그 바로 다윗의 소원이 여기에 적혀 있었던 것이지요. 새번역 시편 27:4 말씀이었습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저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믿음이 제 가슴 속으로 물밀듯이 소용돌이치며 들어왔습니다. 그의 일평생 단 하나의 소원을 보면서, 제 눈물과 콧물이 뺨을 타고 내렸습니다. 2006년 9월 21일 밤 9시경 롬폭 훈련소의 제 2층 벙크침대에서, 저는 그렇게 다윗 신앙과의 감격적 만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