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구약편
모세는 하나님과 깊이 사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하듯, 모세와 얼굴을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출33:11)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모세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 가운데 예언자가 있으면 나 주가 환상으로 그에게 알리고, 그에게 꿈으로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을 충성스럽게 맡고 있다. 그와는 내가 얼굴을 마주보고 말한다. 명백히 말하고 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나 주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민12:6-8)
모세는 80세 되어서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120세까지 살았던 그의 일생을 흔히 3단계로 나누지요. 40세까지 애굽의 왕족으로 있을 때의 혈기왕성한 시절이 1단계, 하나님의 부르심 전까지 미디안 광야로 피신해 있던 시절이 2단계, 이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이끌었던 마지막 시기가 3단계입니다. 즉, 1단계 - 성장기간 40년, 2단계 - 훈련과 연단의 기간 40년, 3단계 - 사역기간 40년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의하면, 혈기왕성한 1단계 시절에도 그는 믿음이 투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큰 실패를 경험합니다. 자기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죽임으로 살인자가 된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자기 손을 빌어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 그는 생각했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굽에서 도망쳤습니다.
2단계 시절은 아픔과 성숙의 시간이었습니다. 연단과 훈련의 기간이었지요. ‘갇힌 자’의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믿음의 선진들도 이러한 연단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기 전에 적어도 20여년간 하란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종으로,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면서 13년여를 인고의 세월로 보냈지요.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10년간 피난생활을 했습니다. 바울사도도 회심한 이후 안디옥 사역 전까지 아라비아와 다소에서 3년 이상의 연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연단의 기간이 길든 짧든 크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모세에게 40년이라는 세월은 그를 강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연단하는 기간이자, 자기의 죄를 뉘우침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묵상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1단계의 혈기왕성한 살인자 모세는, 3단계에서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勝)’한(민12:3) 겸손의 사람으로 180도 변모합니다. 훈련과 연단의 이 시기에 쓰여진 글이 시편 90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90편에서 모세는, 인간의 유한하고 허무한 삶에 비해 하나님은 영원하심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로 보아, 이 시를 지은 시점은 그가 이미 80이 가까이 되었을 때라고 생각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서 보낸 40년간은 ‘수고와 슬픔’으로 점철되었지만,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었고(1-6절),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7-9)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의 소망을 갈구합니다(13-17절).
인간의 한계수명 80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전적으로 무능함을 깨달은 그때에서야,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떨기나무 불꽃을 통해서지요. 가장 낮아지고 낮아져서 더 이상 낮출 데가 없을 때에서야,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높이고자 하셨습니다. “나는 입이 뻔뻔하고 둔한 자입니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이 같은 겸손함과 온유함은 지난 40년간의 훈련과 연단으로 인한 결과였겠지요. 이로써 모세는 지도자로서의 공적생활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개인적 사귐의 관계도 시작하게 됩니다.
사귐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사건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체험하는 장면입니다.(출33:17-23) 참 대단한 일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한 형상을 모세 앞으로 지나게 하시고,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단지 그의 등을 보았지요.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지날 때에 하나님이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하나님의 손으로 덮으셨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통해 그 분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상하신 배려 덕분입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날개깃 은밀한 곳에 거하는 체험과도 같지요. 시90에 이은 91편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저가 너를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시91:1,4)
그러면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을까요? 물론 이는 모세의 간구로 인한 것이지만(출34:18), 사귐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를 허락하셨을까 하는 것이 제 의문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다름 아닌 중보기도의 힘이었다고 믿습니다. 다른 각도의 질문을 하나 더 해봅니다. 모세는 40일 금식을 하나님 앞에서 몇 번 했을까요?
모세는 십계명의 돌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두 번 올라갔습니다. 첫 번째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의 인도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것을 보고, 모세가 돌판을 깨뜨렸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산에 올라 하나님을 뵐 때마다 40일 밤낮이 걸렸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출 24:18, 34:28) 그러면 두 번일까요?
아닙니다. 한번 더 모세는 40일 금식을 했지요. 바로 산에 두 번 올랐던 중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우상숭배로 범죄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드린 것입니다.(신9:18) 이 사건들은 공백이 없이 계속 연이어서 일어났기 때문에, 실제 모세는 3번의 40일, 즉 120일간을 쉬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4개월간이나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살았다니...
첫 번째와 세 번째의 40일 금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권능 아래서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40일 금식은 모세가 자진하여 자신의 의지로 한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멸을 막기 위해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4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이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생명책에 적힌 자기의 이름을 지워서까지라도 용서를 구하는 중보의 기도였습니다.(출32:32)
하나님이 얼마나 이 기도를 기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 이후로, 하나님은 회막에서 모세와 대면하실 때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말씀하셨고, 급기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의 간청을 허락하셨습니다. 모세가 본 하나님의 영광은, 그가 하나님과 얼마나 깊은 사귐을 가졌는가 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한 모세의 간청 속에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는 그의 열망과, 이를 통해 사귐을 갖고자하는 그의 간절한 바램이 내포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모세의 사귐신앙을 통해 제가 배운 점을 정리해봅니다.
(1) 40년간의 연단 속에서 얻어진 영적, 인격적 성숙과 단련
(2) 자기 백성만을 생각하고 이들을 위해서는 영생의 삶도 포기하고자 하는 숭고한 희생정신
(3) 이를 실천에 옮겨 실행한 끊임없는 중보기도
(4) 하나님과의 사귐을 바라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는 그의 열망
모세에게 사귐신앙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부: 신약편
모세의 사귐신앙은 신약에서도 화두가 됨을 봅니다. 1부 구약편이 사건 위주의 사귐신앙이라면, 2부 신약편은 모세에 대한 신약의 해석을 중심으로, 오늘날 성령시대를 살아가는 더 고차원적(?) 사귐신앙이라고나 할까요?
마태복음 17장에 나타난 변화산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직후, 세 제자와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지요. 그 모습이 변하여,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얘기를 나눕니다. 이어서,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으면서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소리가 났습니다.
여기서 제 관심은 예수님과 모세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사귄 사람 모세도 예언자 엘리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준비하고 예비하기 위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3장에 이러한 모세의 위치가 명확하게 잘 나타나 있지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한 사환이었습니다.(히3:5)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이시므로, 예수님이 모세보다 더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과 같습니다.(히3:3)
그러면 나의 위치는 어떻습니까? (여기서 ‘나’는 성령시대를 사는 우리 크리스챤 모두를 지칭하지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심으로,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에 이어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된 후사가 되었습니다.(롬8:14~17) 이제 나는 하나님의 양자로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아빠’(간지럽긴 하지만, 아버지의 가장 친근한 애칭)라고 부르며 ‘사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세는 또한 ‘영원한 안식’의 상징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랜 기다림으로 그렇게 보고 싶었던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신34:1~5) 그것은 모세의 불순종 때문에 일어난 자업자득이었지요. 그 유명한 므리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어 원망했을 때, 하나님은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에게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라고 말하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론 물은 나왔지만, 모세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음으로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했지요.(민20:2~13)
이렇게 되어, 모세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부족으로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히3:7-19) 그러나, 나(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히14:9-11) 나의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모든 시험을 이기신 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나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히14:14-16) 이 은혜의 보좌야말로 나와 하나님 간의 사귐의 중심지입니다.
이번에는 모세의 수건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돌판을 받아 내려왔을 때, 그리고 그 이후 하나님을 뵙고 나올 때마다, 그의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는 빛나는 얼굴을 한 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나서 수건을 씁니다. 하나님을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 수건을 쓴 채로 있었지요.(출34:33-35)
우리말 성경으로는 수건을 언제 쓴 것인지 애매합니다. 처음에 저는 모세가 수건을 쓴 시점이 백성들과 이야기하기 직전이라고 생각했으나, NIV 영어성경을 보고나서는 시간적 순서가 명확해졌습니다. NIV성경 출34:34-35입니다.
And when he came out and told the Israelites what he had been commanded, they saw his face was radiant. Then Moses would put the veil back over his face until he went in to speak with the Lord.
그러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얘기한 이후에야 수건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에서 이를 명쾌하게 밝혀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쓴 것입니다.(고후3:13, 새번역이 좀 더 명확함) 그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는 백성들 앞에서 모세의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얼굴의 빛남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랄뿐 아니라, 백성들에게는 늘 빛나는 얼굴로 나타내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의 광채는 한시적이었습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해서 광채가 사라져가는 사실을 숨기기는 어렵지요. 성령시대를 사는 ‘나’에게는 모세의 수건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기 때문이지요.(고후3:14) 주님께서는 나의 얼굴에 덮어진 수건을 벗겨주심으로 진정한 영적 자유함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15절)
우리는 모두 가식과 숨김의 수건을 벗어버리고,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주님의 형상과 같이 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릅니다.
주님의 영이 하신 일이지요. (16절 의역)
이 얼마나 멋있는 말씀인지요? '나‘는 주님의 거울이요, 주님의 형상입니다! 모세의 영광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영광은 더 넘치고 길이 남을 것입니다.(고후3:8-11)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고후4:7)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후4:6)
성령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 모세의 사귐신앙은 기본적인 디폴트입니다. 나는 기본조차 되기에도 까마득한 존재이지만, ‘나’라는 질그릇 안에 계신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나에게 사귐신앙을 주신 주님을 찬양드립니다.
하나님과 사귄 사람 모세를 좇아
아니, 그 모세를 넘어
주님과 사귀게 하옵소서.
주님은 나의 거울
주님은 나의 형상이시듯이,
나는 주님의 영광의 거울
나는 주님의 영광의 형상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그만 일만 있어도 무릎꿇는"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항상 보여 주셨던 우리의 자세입니다.
좋은 묵상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