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앙의 3법칙①] 바라봄의 법칙

조회 수 2802 추천 수 97 2010.07.13 19:04:10
1부: 밑그림과 덧그림


독일 첫 주재 시절인 1990년 어느 시점에, 가족들과 함께 파리 소재 루브르 박물관에 간 적이 있습니다. 봐야 할 것이 많았지만, 제게도 단연 놓치면 안 될 것이 모나리자 그림이었지요. 여러 회랑을 거치고 거쳐 모나리자가 전시되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의 그 실망이란! 우선 그림이 생각보다 훨씬 조그마했고 그나마 높은 데다가 아예 두터운 유리 박스 속에 잠겨져 있었습니다. 또한, 다른 데는 한산했던 곳이 이곳은 시장터를 방불할 정도로 북새통이었습니다. 그래도 볼 수는 있었기에 까치발을 하면서 열심히 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왜 모나리자를 보려면 루브르에 가야만 했을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 원본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원본을 봐야만 진정한 작품성과 예술성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전문가들도 원본을 봐야지만 작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밑그림’을 볼 수 있겠지요. 모나리자의 모조품이나 복제품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 중 일반인이 보기에는 원본과 차이가 거의 없는 모조품도 꽤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인정한 원본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다빈치가 원래 그렸던 ‘밑그림’이 있는 그 그림이 진짜이지요. 그의 혼과 나아가 성품이 담겨져 있는 그림은 오직 한 장, 루브르에 있는 그 그림 뿐입니다.

어떤 그림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작가는 구상을 먼저 합니다. 다음에 이 구상한 것을 화판에 옮겨 밑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밑그림은 스케치로도 하지만 직접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합니다. 밑그림이 다 완성된 후에야 작가는 한숨을 돌리며 당초 구상하고 기획한대로 잘 되었는지 중간점검을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밑그림 위에 ‘덧그림’을 추가합니다. 세세한 터치와 첨가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밑그림 위에 덧칠을 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하나의 그림이 작품으로 완성이 됩니다.

완성된 그림은 밑그림과 덧그림이 어우러져 보입니다.
일반인은 덧그림을 위주로 보지만,
전문가는 덧그림 뒤의 밑그림을 위주로 해서 봅니다.
일반인은 작품만을 주로 보지만,
전문가는 작품을 만든 작가의 디자인와 의도를 찾아봅니다.
덧그림은 외적으로 그대로 보이지만,
밑그림은 섬세하게 관찰하고 연구해야 드러납니다.
덧그림은 아무나 볼 수 있지만,
밑그림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보입니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덧그림과 밑그림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히11:3).
보이는 것
즉, 나타나 있는 것은 덧그림입니다.
그 뒤에 보이지 않는 것
즉, 나타나지 않는 것이 밑그림입니다.

영적 세계의 밑그림은
하나님이 디자이너이자 작가이십니다.
비젼의 믿음은
그 밑그림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비젼의 믿음은
덧그림의 속과 뒤에 숨겨있는
밑그림을 찾아내어 보는 것입니다.
비젼의 믿음은
겉으로 나타난 현상세계가 아닌,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그 분의 뜻을 쫓는 것입니다.
밑그림 속에 깃들어 있는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을
깨닫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민수기 13장에 나타난 이야기를 예로 들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 중에 가나안을 정탐할 정탐꾼들을 보냈습니다. 돌아온 12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내용이 10명과 2명으로 갈라집니다. 10명은 덧그림만을 보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의 2명은 덧그림뿐만 아니라 밑그림까지 보았던 것입니다.

덧그림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난 사실(Fact)입니다.
가나안의 덧그림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크다
장대같이 큰 아낙자손도 살고 있다. (민13:27-28)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민13:31)“

밑그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비젼의 믿음만이 가나안의 밑그림을 봅니다.
비젼의 믿음만이 밑그림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민14:8-9)“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덧그림만 보고 온 10명의 정탐꾼들을 더 신뢰했습니다. 민주주의의 병폐인 ‘다수결의 원리’를 따른 것이지요. 밑그림도 같이 본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백성들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허사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광야에서의 죽음의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 밑그림을 볼 수 있는 비젼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비젼의 믿음을 가진 여호수아와 갈렙은 광야에서 살아남아 영광스런 가나안 땅을 밟게 됩니다. 디자이너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만큼 그들의 믿음도 커지는 법입니다. 그들이 본 밑그림대로, 하나님은 그들을 지도자로 삼으셔서 신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힘이 강하나 하나님이 없는 가나안 땅의 족속들을 파죽지세로 물리칩니다. 강한 것처럼 덧그림으로 보였던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의 ‘밥’이었습니다.




2부: 바라봄의 법칙


영어 비젼(Vision)의 원뜻은 단순히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눈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내 비젼의 도구는 나의 눈입니다. 그래서 시력(視力)을 영어로 Eye-vision이라고들 합니다. 즉, 시력은 눈으로 보되 얼마나 잘 볼 수 있느냐를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척도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도 눈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6:22-23)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눈은 빛을 통해서 봅니다. 빛이 없으면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의 눈은 빛이 비춰주는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눈의 한계이지요. 빛이 보여주는 것 중에서 가시광선(可視光線)만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빨주노초파남보의 7가지 색깔의 빛만 볼 수 있지, 빨간색 바깥의 적외선이나 보라색 바깥의 자외선은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 뿐인가요? 우리 눈은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도 보질 못합니다. 매크로의 세계로 우선 가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눈의 한계에 비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 나아가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 그 무수한 은하계로 이루어진 우주 전체를 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1초에 30만km를 가는 별의 속도로 몇 천년을 가도 도달못하는 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태양과 같은 별들이 우주 전체로 몇 십억개나 된다고 하니 우리 눈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마이크로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작아도 우리 눈으론 볼 수 없지요. 물속의 작은 생명체인 플랑크톤, 그보다 더 작은 박테리아를 보기는 불가능합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되지 않느냐고요?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인 분자는 어떻습니까? 이 분자를 더 쪼개면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원자들이 있습니다. 현미경으로도 볼 수가 없습니다. 원자의 세계는 물질의 세계가 아닌 에너지의 세계라고 합니다. 신비함으로 이루어진, 진동과 파장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물질세계가 이럴진대 영의 세계는 어떠할까요?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이것에 대해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도마에게 못자국난 손과 옆구리를 확인시키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20:29).” 오늘날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성령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여기에서 ‘새로운 눈’ 또는 ‘제3의 눈’을 봅니다. 이를 통상적으로 영안(靈眼) 또는 ‘믿음의 눈’이라고 부르지요. 같은 이야기이지만, 저는 좀 더 구체화시켜 ‘비젼의 믿음의 눈’ 또는 줄여서 ‘비젼의 눈’ 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을 좀더 확대시키면, ‘육신의 눈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비젼의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 힌트를 얻어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현재적 비젼의 눈은 앞장(밑그림과 덧그림)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밑그림을 보는 눈입니다. 어떠한 사건이나 사실을 살필 때,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보는 눈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얘기할 비젼의 눈은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미래의 소망과 소명을 비젼화 시키는 눈입니다. 미래를 ‘당겨 바라보는’ 바라봄의 법칙이지요.

비젼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히11:1).
누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일까요? 누구의 비젼일까요?
내가 그냥 바라는 것들일까? 즉, 나의 비젼일까?
그가 그냥 바라는 것들일까? 즉, 그의 비젼일까?
비젼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젼은 바로 ‘주님’이 바라시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나아가, 주님이 내게 주신 나의 비젼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나의 비젼은 주님이 나를 향해 바라시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비젼은 선물거래(先物去來)와 같습니다.
현재의 시세(時勢)가 아닌 특정시점에 대한
미래의 시세가격을 매도자와 매수자가 미리 약정하여
그 가격으로 오늘 현재에 거래하는 것이 선물거래입니다.
즉, 미래의 일을 ‘당겨서’ 팔고 사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는 매도자 절대 우위의 세계입니다.
내가 매수자라면, 주님은 매도자가 되십니다.
매도자되신 주님은 선하시고 정직하신 분입니다.
매수자에게 가장 좋은 길을 미리 예비하셨습니다.
매수자는 매도자의 배려하심대로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라봄의 법칙이자, 바라보는 자의 행복입니다.

비젼의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에 되어질 일,
미래에 일어날 주님의 뜻하심과 계획,
미래에 주님이 바라시는 그것들을
내가 오늘 현재의 시간으로 끌어당겨 오는 것입니다.  

미래에 주님이 설계하신 것들을
‘미래의 창’으로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간으로 당겨와서
‘현재의 비젼’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바라봄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볼 때에 절망과 애통함이 나옵니다.
이어 해결자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갈망이 나옵니다.

나를 바라봄은 현재적 바라봄입니다.
절망의 바닥과 눈물의 애통이 있은 후에야
비젼의 믿음이 태동합니다.
미래적 바라봄은 나의 현재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여
해결자되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은
주님의 설계하심 속에 담겨진
청사진을 꺼내어 미리 보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재적 고백 속에서
주님이 하실 일을 미리 당겨 보는 것입니다.
* * * *

여기서 잠깐 ‘바라봄의 법칙’을 체험한 제 경우의 짧은 간증을 하고자 합니다. 웨이브 6기의 롬폭 훈련소 시절, 2006년 11/15(수)일부터 11/20(월)일까지의 일이었습니다. 11/15(수)일 딸 아이의 수능일로 저녁 금식기도를 하면서 조금 몸이 안 좋았습니다. 그날 밤 따라 숙소동의 환풍기가 고장 났는지 밤새도록 돌아갔습니다. 제자리는 환풍구를 정면으로 받는 곳이라 밤새 춥다고 느끼면서 잤는데, 다음날 아침 (11/16) 목구멍이 칼칼했습니다. 목 부근이 약간 부은 듯 했고 입천장도 따끔따끔 아팠습니다.

그래도 다른 덴 크게 불편함이 없어서 일을 하고 난 다음날 11/17(금), 목이 완전히 부어오름을 느꼈고 침을 삼키기가 어려웠습니다. 아침에 간호사를 만나 감기약이라도 타려 했지만 그날따라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낮에 일을 할 때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목은 점점 부어올라 저녁때는 말하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지요. 침을 삼키는 것이 큰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몸도 으실으실하여 저녁샤워도 거르고 윗층 제 침대에 일찍 누웠습니다.

11/18(토)일 아침에는 일어날 수도 없었고, 식사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구멍이 양쪽으로 붙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편도가 엄청 부어올라 있었습니다. 불현듯 겁이 더럭 났습니다. 1997년 영국 유학시절 편도선염으로 한 달간을 꼬박 앓은 기억이 나면서, 그 때의 증상과 똑같음을 발견했습니다. 한국 동료 분들이 문병을 왔고 먹을 것도 가져다 주었습니다. 완전히 끙끙 앓아누웠습니다. 눈물이 찔끔찔끔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거의 종일을 제 벙크 침대에서 있으면서 물, 꿀차, 오렌지로 버텼습니다. 오후 늦게 아스피린을 누가 구해주어 잠자기 전까지 세알을 먹었습니다.

그날 저녁 아픈 중에도 히브리서 11장을 읽으면서, 비젼의 믿음과 바라봄의 법칙을 묵상했습니다.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치유를 요청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바라봄을 내 비젼으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현재적 나의 절망과 애통을 베이스로 하여, 미래적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이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픈 중에도 치료해 주시는 주님의 비젼이 강하게 다가 왔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의 아픈 현재 모습을 바라보지 않고, 다음날 아침 편도선의 붓기가 완전히 빠져 침도 잘 삼키고 말도 제대로 하는 나의 미래 모습을 당겨서 바라보도록 노력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치료하시도록 간구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주님만이 이 고통을 치료하실 수 있는 분임을 고백하고 영광 돌렸습니다.

11/19 주일날 아침, 저는 작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전날 밤을 푹 자고 눈을 뜬 순간, 내 혀는 부었던 목구멍을 자동으로 찾아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목구멍의 붓기가 간밤의 몇 시간 사이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아, 아, 하고 헛기침을 해봅니다. 목소리가 됩니다! 침을 삼켜봅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침삼킴이 크게 무리 없이 넘어갑니다! 편도의 붓기가 70%정도 빠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전날 취소했던 면회 계획이 일정대로 진행되어 면회소에서 사람들도 잠깐 만났습니다. 오후 1시에는 전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예배를 채플에 가서 드렸습니다. 오후 늦게부터는 도서관에서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주님의 눈물을 체험했습니다 (후에 나옵니다^^).

그날 저녁시간엔 정상적으로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편도의 붓기는 90% 이상 빠졌고, 11/20 월요일부터는 일터에 나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간호사를 만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를 적용시킴으로 감격적인 치유의 경험을 하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 * * *

바라봄의 법칙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누구를 통하여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바라봄, 즉 주님께서 주시는 내 미래의 모습들을 현재의 비젼으로 바라보되, 이를 이루시는 주님을 통하여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장에서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히11:6). 또한, 모세를 예로 들면서 모세가 ‘상주심’을 바라보았다(26절)고 설명합니다.

비젼의 믿음은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 즉 ‘아는 것’입니다.(히11:6)

바라봄의 법칙은
주님 안에서 되어질 미래의 소망의 모습을
현재의 시간으로 당겨와서
구체적으로 바라보되,
이를 이루시는 하나님은
나의 미래를 가까운 현재로 바꾸심으로
내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인내로써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떼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히12:1-2, 새번역)

결론은 이것입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3부: 비젼의 3단계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에 대해 정의부터 출발하여 선진들의 믿음들을 통한 사례를 하나하나 보여줍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감동이 더합니다. 이 믿음은 ‘현재적 믿음’ 이라기보다는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는 ‘바라봄의 믿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한 믿음을 ‘비젼의 믿음’이라고 명명해 봅니다. 영어로는 Visionary Faith라고나 할까요?

믿음장의 결론은 [바라봄의 법칙]에서 설명드린 대로 12장 1~2절입니다. 이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11장에서 상세히 얘기한 선진들의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믿음의 모델이자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본받되,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경주를 경주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12장 2절의 첫 부분이 개역성경에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로 되어있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정확한 번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새번역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라고 되어있지요. NIV 영어성경은 이 부분을 ‘Jesus, the author and perfector of our faith' 라고 씁니다. 새번역과 정확히 일치된 내용입니다.

비젼의 믿음은 오직 한 사람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 분에게 ‘나의 눈’을 확고히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믿음의 창시자(Author)입니다.
그 분이 비젼의 믿음을 태초에 만드셨습니다.
그 분은 스스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앞에 놓여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기꺼이 참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분은 친히 나에게
비젼의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그 분은 믿음을 완성하신 분(Perfector)입니다.
나에게 믿음의 완성은 영원한 숙제이지만,
내가 어디로 향해야 내 믿음이 좀 더 나아지는지 압니다.
믿음의 완성자는 한 분이신 그 분이시기에,
나는 그 분을 평생토록 따르렵니다.
그 분은 존귀하신 이름,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한 분이시랍니다.

저는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에게서 또한 ‘비젼의 완성자’로서의 그 분의 진면목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를 통해서지요.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단순한 주님의 손길 속에서, 그분은 각 사람의 비젼을 도와주시며 완성하여 주심을 봅니다. 그 중 마가복음 7, 8, 9장에 나타난 세 가지 치유사건을 통해, 나를 향하신 주님의 멧시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우선, 전체적 사건 개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첫 번째 사건 (막 7:31-37)
   .대상자 :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
   .간구자 : (그를 아는) 사람들
   .간구내용 : 손을 얹어주시기를 간청함
   .예수님 :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심
   .멧시지 : 에바다 (열리라)
   .결과 :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게 됨

(2) 두 번째 사건 (막 8:22-26)
   .대상자 : 눈 먼 사람 (소경)
   .간구자 : (그를 아는) 사람들
   .간구내용 : 손을 대주시기를 간청함.
   .예수님 :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안수하심
   .멧시지 : 무엇이 보이느냐?
   .결과 : 첫 번째 안수 때- 사람들이 보임.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니는 것 같다.
          두 번째 안수 때- 뚫어질 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됨

(3) 세 번째 사건 (막 9:14-29)
   .대상자 : 귀신들린 아이
   .간구자 : 아이의 아버지
   .간구내용 :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했던 귀신을 쫓아내 달라
   .멧시지(1)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멧시지(2) :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예수님 :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결과 :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감.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심.

위의 사건 개요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각 사건마다 주님께서는 병자들이나 병자들을 위해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멧시지를 주셨습니다. 즉, 그들이 비젼의 믿음에 이르도록 먼저 도와주신 이후에야, 병자들을 깨끗하고 완전하게 치료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중 ‘멧시지’ 부분에 주목했습니다. 멧시지는 단순하고 짧지만, 수많은 함축적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이 멧시지는 비젼의 완성자이신 주님께로 이르는 단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제가 생각한 ‘비젼의 3단계’를 따라가 보시지요.

*** 비젼의 1단계 : 에바다 (여는것)

비젼의 1단계는 ‘에바다’입니다. ‘열리라’는 뜻이지요.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의 소원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말을 똑바로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로 인도되어 왔을 때, 예수님은 그의 문제점을 즉각 알아차리셨습니다, 그의 들리지 않는 귀가 우선 뚫려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닫혔던 그의 귀가 ‘열려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열려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죽었던 그의 비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순히 말씀 만으로도 그를 고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를 우선 조용한 곳으로 따로 데려가십니다. 그가 스스로 집중하여 예수님의 손길을 따라 같이 느끼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에바다’ 멧시지에 그의 비젼이 먼저 열립니다. 닫혔던 그의 영혼이 깨어납니다. 그리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게 되었습니다.

닫혔던 비젼의 문은, 나의 영혼이 열림으로 비로소 같이 열리게 됩니다. 죄로 죽었던 나의 영이 소생함으로 비젼의 믿음은 시작이 됩니다. 어떤 이에게는 또한 막혔던 다른 것들도 ‘열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고정관념, 미움, 오해, 무관심, 닫힌 생각, 굳은 마음 등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겠지요. 아무튼, 내 속에 있는 어떤 막힌 것이 풀리고 열림으로, 비젼의 길은 시작이 됩니다. 알리바바의 ‘열려라 참깨’ 대신에 ‘에바다’를 주님께 외치십시요. 에바다 주님을 만나십시요.

*** 비젼의 2단계 : 무엇이 보이느냐? (보는것)

예수님은 두번째 사건에서도 눈먼 소경이 잃었던 ‘비젼’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먼저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조용히 마을 바깥으로 나가셨습니다. 소경 자신이 비젼을 찾겠다는 의지도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집중하여 예수님의 손길을 따라 느끼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안수하신 후 물어보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는 무언가를 보려고 그의 눈에 자신의 온 에너지를 집중하였습니다. 평생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그에게 정말 힘든 일이었겠지요. 예수님의 침이 발려있는 그 눈을 치켜뜨려고 노력했습니다. 아, 희미하게 뭔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아니,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이기는 보이는데 희미하기만 하군요. 예수님, 주님의 도움이 더 필요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고개를 끄떡이시며 다시 안수해 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두번째 똑같은 질문에 그는 이제 두 눈을 뚫어질 듯이 치켜세웠습니다. 무언가를 ‘더’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아, 보이기 시작한다! 모든 것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저 멀리 푸른 창공과 마을 밖의 수풀과 주위에 서있는 제자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안수를 해주셨던 예수님의 인자한 미소가 보였습니다.

나도 이같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젼의 2단계는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묻습니다. 오늘날 나에게도 주님은 끊임없이 물어보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주님은 내가 ‘무엇’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 ‘무엇’을 보는 것이 바로 비젼의 2단계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밑그림과 덧그림’, 그리고 ‘바라봄의 법칙’이 이 2단계의 툴(Tool)이라고 믿습니다.

*** 비젼의 3단계 : 주여, 나의 부족함을 도와주소서! (신뢰함)

세번째 사건은 아이의 아버지가 주인공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이미 온갖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귀신들린 자기 아들을 어떻게든 고쳐 보려고 갖은 노력을 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가장 최근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들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귀신이 워낙 세서(?), 제자들도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희망인 예수님께 제발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아이보다는 오히려 아이의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그를 도와 비젼의 믿음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사건의 사실(Fact)만 예수님께 열심히 설명합니다. ‘밑그림’이 아닌 ‘덧그림’만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원하셨던 것은, 아들을 고치고자 하는 그의 간절함에 더하여 예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와 비젼이었습니다.

그는 막판에 이렇게 간청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저는 이것을 ‘가정법의 믿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비젼의 믿음에는 ‘가정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확고한 ‘증거’(히11:1)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어정쩡한 그의 ‘가정법의 믿음’을 박살내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니라.”

그는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믿음은 가정법이 없다는 것과 믿음의 완성자는 바로 눈앞의 예수님이라는 것을..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말은 사실 논리적 오류가 있습니다. 앞에선 ‘내가 믿나이다’고 해놓고, 바로 뒤에는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신뢰했던 사실 자체가 그의 ‘믿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젼의 3단계는 아이의 아버지와 같이 나의 부족함을 주님께 맡기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의 부족함을 도와주소서.” 이렇게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비젼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에, 나의 부족한 비젼을 완성자이신 그분께서 넉넉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비젼의 3단계를 정리해 봅니다.)

비젼의 1단계는 여는 것입니다.
닫혔던 나의 비젼을 여는 것입니다.
닫혔던 나의 속내를 주님께 엽니다.
죄의 속박으로 구속된 내 영혼을 엽니다.
듣지 못했던 나의 귀가 뚫리고,
느끼지 못했던 나의 가슴이 열립니다.
굳게 잠겼던 나의 가식과 편견을 허물어 엽니다.
“열리라”고 말씀하신
에바다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비젼의 2단계는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영적 개안입니다.
세상의 눈이 아닌 비젼의 눈으로,
덧그림이 아닌 밑그림을 봅니다.
바라봄의 법칙으로 영안을 뜹니다.
미래에 내가 바라는 것들을
현재의 시간으로 끌어당겨 봅니다.
오늘도 나에게 끊임없이
“무엇이 보이느냐?” 도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비젼의 3단계는 신뢰함입니다.
나의 비젼에 가정법을 배제합니다.
‘나의 나됨’을 주님 앞에 완전히 내려 놓습니다.
내 시간표를 접고 주님의 시간표에 나를 맡깁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렇게 비젼의 믿음을 완성하신 주님의
팔에 순종함으로 나를 얹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을 신뢰하셨듯이
나도 주님을 그같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의 부족함을 도우소서” 라고
겸손히 무릎꿇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비젼의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라!




4부: 절망과 갈망의 싸이클

(묵상한 말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행13:22)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16:7)

(같이 묵상한 말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27:10)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16:9)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3~6)


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씀이 수없이 많지만, 사도행전 13장22절 말씀은 특별합니다.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소개된 것도 그렇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연약한 한 인간을 지칭하여 말씀하셨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그만큼 다윗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셨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러나 결론적으로, 오늘날 은혜시대를 사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압니다. 다윗을 비롯한 구약의 선진들이 그렇게 목마르게 바라던 메시야를 우리는 보았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구약의 어느 누구보다도 천국에서는 큰 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마11:11참조)

다윗의 어느 부분을 보셨길래 하나님께서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다윗의 전 생애를 둘러 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서 크나큰 치적을 이뤄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거인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장수로 화려하게 등장했으나, 곧 사울의 미움을 받아 도망길에 오릅니다. 이후 유다의 왕이 된 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일궈냈고 대내외적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입지를 크게 높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평생 동행하실 것과 다윗의 후대 왕조가 영원히 견고하게 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왕되신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실수와 논란거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자식 농사는 형편 없어서, 이복누이를 강간했던 아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 아들을 죽이고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킨 아들도 있었습니다. 왕권의 후계 다툼이 치열했습니다. 부하들 간의 권모술수도 난무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실수 투성이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과정에서 사람이 죽었으며, 충성된 부하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엄명을 무시하고 인구조사를 강행하다가 7만명의 무고한 인명을 상실했습니다.

다윗을 깎아 내리거나 정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뛰어나기는 하나,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외적’ 증거를 찾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증거는 의외로 다윗의 외형적 업적이나 능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해답은 ‘중심’이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중심을 이해하려면 사무엘상 16장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있다 자부했던 사무엘 조차도 간과한 부분이 무엇인지는 차기 왕권을 위한 기름부음 받을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어느정도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새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다윗은 그 중 막내 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이 막내로서 우리 식의 막둥이로 귀여움을 독차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경우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는 집안에서 무시받고 잊혀진 존재와도 같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무엘의 제사에 참석하도록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에도 양들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들 중 한사람에게 기름 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무엘이 이새에게 그의 아들을 전부 부르라고 분부했을 테지만, 이새는 일곱 아들만 데리고 버젓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전통은 철저한 장자 적통의 문화입니다. 혹시라도 장자가 유고시는 둘째가, 둘째가 또 유고시는 셋째가.. 이렇게 내려가다 보면 결국 막내까지 내려올 차지는 거의 없었겠지요. 그렇다 할지라도 이새가 다윗을 제사에 데려가지 않은 것은 뭔가 다윗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다윗은 어릴 적부터 부모의 버림을 받다시피 하면서 자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시편에서 불쑥 고백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시27:10) 예나저나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대하여 자신을 버렸다고 막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천하의 효자라고 불리웠던 다윗이(삼상22:3-4 참조), 어찌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실제 사실이 그랬다면? 이것이 다윗이 처했던 현실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부모는 그를 버렸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로도, 다윗을 향한 가족들의 냉대는 그리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새는 여전히 막내 아들에게 군대간 형들의 뒷치닥거리나 시켰고 (참조 삼상17:14 이하; 윗 삼형제가 징집을 갔으므로 다윗 외에 시킬 아들이 네명이나 더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시켰음, 이에 양치느라고 바빴던 다윗은 양들을 형들에게 맡기지도 못하고 다른 목동에게 맡겨야 했음), 또한 다윗을 대하는 첫째형의 태도는 볼상 사나울 정도로 쌀쌀맞게 화만 냈던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가족 간에 왕따도 보통 왕따가 아닙니다.

집안에서 냉대와 버림받은 다윗의 낙은 양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었지 아닐까요? 사람은 편견이 있지만, 양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목자를 충성스럽게 따릅니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는 시편23편에 잘 나타나 있지요. 이런 환경 속에서 다윗이 자연스레 발견한 것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었을까요? 시편 27편10절의 뒷부분을 보면 명확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다윗의 믿음의 태동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중심’으로 돌아가 봅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본 사무엘이 생각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어 이새의 모든 일곱 아들들이 다 지나가도록 하나님이 택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 밖에서 양을 치고 있었던 다윗이 선택되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제 범위를 좁힐 수 있겠지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중심’이 다윗의 것과 그 형들의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퀴즈를 냅니다.^^  위의 일곱 형들을 다 버리고 유독 다윗 만을 택하셨는데, 그 다윗의 중심에 무엇이 있길래 그러셨을까요? 형들과 차별화된 다윗의 유별난 점은 무엇일까요?

이 퀴즈 문제의 답은 ‘없다’라고 믿습니다. (물론 관점을 달리하면, ‘있다’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다윗과 그 형들과의 ‘질적 차이’는 없습니다. 인간이 뛰어나 봤자 얼마나 뛰어나겠습니까? 다윗 자신의 표현을 빌려 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2-3) 인간 중 어느 누가 스스로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윗, 아브라함, 모세 등 믿음의 선진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은 한결같이 죄악 중에서 하나님을 배반했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를 비교한다는 것은 ‘도토리 키재기’와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나, 다윗의 형들이나, 그 ‘마음의 중심’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입니다.(마15:19)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에 틀림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참으로 오묘하지요? 모든 인간들이 다 똑같이 불의하고 더러운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택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하심은 이같이 부족한 저에게도 똑같이 미쳤습니다. 다윗에게도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기라”(롬9:15). 이 말씀이 진정한 정답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겠습니까?(롬9:21) 다윗이 남달라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택하심의 긍휼을 입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잘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전적으로 주님의 긍휼하심의 은혜 안에서 건져올림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죄악이 가득한 인간의 완악한 마음 속에서도 구원의 ‘가능성’(Potential)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기에, 원죄의 굴레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지라도 우리 모두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3:11)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영혼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갈구하고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도 똑같은 이치 아닙니까? 나의 죄인됨과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주님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믿고 받아 들임으로 구속의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닙니까?

이제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진척시켜 보겠습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쬐끔은(!) 다윗의 유별난 차이를 보신 것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그의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미래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다윗의 마음 속 중심에 담겨있는 미래의 잠재적 가능성까지도 보셨을 것입니다. 또한 그 잠재적 가능성을 통하여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킬 설계도와 청사진을 예비하셨을 것입니다. 당장은, 그의 마음 중심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조그마한 갈망도 보셨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16:9) 저는 그 해답이 이 말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중심은 ‘남달리’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미 그 배경은 나누었지요? 가족의 왕따가 영적으로 보기엔 다윗에게 큰 보약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과 나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정체성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후 목동으로서 양들을 치며 묵상 중에 자연스레 태동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 이 조그마한 차이를 하나님은 크게 보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다윗을 통해서 나타난 그의 ‘중심’을 두가지로 대별하여 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소년 다윗의 중심이라기 보다는, 후일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의 훈련과정을 거친 다윗의 성숙한 신앙 모습이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절망과 갈망의 두가지였습니다. 절망은 나에 대한 절망이요, 갈망은 주님께 대한 갈망입니다. 이것이 제가 본 ‘바라봄의 법칙’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생애는 바라봄의 법칙을 잘 이룬 모범적 전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망과 갈망.. ‘두가지 다른 차원의 바라봄’ 이라고나 할까요? 이제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절망입니다.

절망(絶望)의 사전적 의미는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버림, 또는 그런 상태’입니다. 다윗은 깊은 절망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시편을 읽다보면 그 절망의 깊이에 깜짝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그는 부모, 형제, 상사(사울왕), 자식, 친척, 동료, 부하, 친구 등 주위 사람들의 배신을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과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과 통회함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상하고 낙심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모든 일의 결과로 그에게 다가온 것은 바닥을 모르는 절망이었습니다.

그 절망의 밑바닥을 잘 표현한 시편이 22편이라고 생각합니다. 22편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실제 다윗의 절망을 리얼하게 표현한 것으로도 보여 집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1절) 그는 자신을 또한 벌레로 비유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6절) 절망은 환경과 자신의 상태를 깨달음으로 나옵니다. 이같이 극심한 고통의 절망을 통해서 다윗은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자기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항복 선언이었습니다.

절망의 열매는 애통의 눈물입니다. 절망은 애통을 낳고, 애통은 눈물을 낳습니다. 참 절망을 경험한 자는 눈물샘이 마를 사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눈물의 골짜기요(시84:6), 눈물의 시내요(시119:136), 눈물의 양식(시80:5)입니다. 다윗의 눈물은 어땠을까요?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8) 아, 주님의 눈물병.. 그는 자신의 눈물을 주님께서 일일히 기억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과장이 들어갔다 치더라도, 밤마다 눈물로 띄우는 침상이라니요? 주님께서 다윗의 눈물을 어찌 기뻐 받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절망의 끝은 상한 심령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시109:22) 아, 여기에 오늘의 화두인 ‘중심’이 나옵니다. 중심의 상함-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의 상한 중심을 보셨습니다. 다윗은 또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그것은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 그에게는 또한 죄에 대한 철두철미한 깨달음과 뉘우침이 따릅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3,5) 어떤 의미에서는, 죄에 대한 절망이 없이는 구원에 대한 의미도 없습니다.

둘째, 갈망입니다.

갈망(渴望)의 사전적 의미는 ‘간절히 바람’입니다. 갈망의 의미를 말씀에서 좀더 찾아 봅니다. 시편에서 간절한 바람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재미있는 대목이 두 군데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42:1)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갈급함.. 이것이 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6) 군대가서 보초 서본 남성들은 이 구절이 실감날 것입니다. 밤새도록 두 눈 부릎뜨고 지키다 동이 터오르기 직전의 새벽녘.. 이제나 저제나 아침이 오기를 목 빼고 기다리는 파숫군의 심정, 이것이 갈망입니다.

갈망의 갈(渴)은 ‘목마를 갈’입니다. 목마름을 넘어서 일정 시간이 넘으면 목이 탑니다. 목이 타다가 일정 시간이 넘으면 혀가 타 들어갑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갈급함은 물이 없어 ‘목이 타는’ 갈급함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음부에서 고통 중이던 부자가 한 말을 기억하시나요?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눅16:24) 부자가 애타도록 기다렸던 한 방울의 물.. 이것은 혀가 타는 갈급함이었습니다. 이럴 정도의 갈급함이 또한 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망은 누구를 향한 갈망일까요?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42:2) 비슷한 톤으로 다윗은 선언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시62:1,5) 구원과 소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것도, 그의 마음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하나님만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한편, 유다광야에서 쓴 그의 시, 63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절) 그렇습니다. 아, 주님을 향한 내 영혼의 갈망! 이것이 진정한 다윗의 갈망이었습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3절) 아, 그것은 또한 그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갈망이었습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바꿔서 얻으려고 했던 숭고한 갈망이었습니다. 63편 후반부에서 그 갈망의 결과를 봅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5절) 목숨을 내어 놓는 갈망의 결과는 영혼의 만족으로 이어 집니다. 또한 기쁨과 찬송이 따릅니다.

지난 2009년 연말에 가족들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 왔습니다. 여러 인상적인 추억거리 중 하나가 광야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유다 광야와 사해 쪽으로 이어지는 네게브 사막을 돌아 보면서, 상상했던 광야의 의미가 몸으로 다가왔습니다. 광야에서의 생명은 물을 따라 생겨 납니다. 먹을 것은 없어도 살지만, 마실 것이 없으면 생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물은 이들의 첫번째 생존 조건입니다. 실제로 오가는 길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덥고 햇빛이 따가와서, 광야의 갈증이 어떤 것인지 실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물을 향한 갈증의 정도처럼, 주님을 향한 나의 갈망도 이러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제 다윗이 경험한 절망과 갈망의 싸이클을 바라봄의 법칙으로 정리해 봅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은 오늘날 나에게도 그대로 미치십니다.
나는 토기장이의 진흙과 같은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은 남다른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저는 다윗에게서 그의 절망과 갈망을 보았습니다.
절망과 갈망은 구원의 핵심 요소이자,
그리스도인의 평생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절망과 갈망은 바라봄의 두 축입니다.
절망과 갈망의 망(望)은 말뜻 그대로 바라봄입니다.
나를 향해서는 절망이요, 주님을 향해서는 갈망입니다.
나에 대한 절망이요, 주님에 대한 갈망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이루는 양대산맥입니다.

절망은 바라봄을 끊는(絶) 것입니다.
절망은 ‘나’에 대한 바라봄을 완전히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에 대한 소망은 하나도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로부터의 출발을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은 나의 모든 것에 대하여 주님께 드리는 항복 선언입니다.

갈망은 주님에 대한 바라봄을 극대화(渴)하는 것입니다.
전심을 다해,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바라보는 것입니다.
목이 타고, 혀가 타 들어가는 심정으로 목마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철저하게 주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망은 주님을 향하여 바라보되, 내 목숨까지 내어놓는 것입니다.

절망과 갈망은 따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같이 맞물려 움직이는 바라봄의 싸이클입니다.
절망과 갈망의 싸이클이 반복될수록 나는 성숙해 갑니다.
절망과 갈망의 싸이클이 심화될수록 나는 주님과 더 가까와 집니다.

절망과 갈망의 싸이클은 팔복의 전반기 싸이클이기도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진정 가난한 자는 절망의 밑바닥을 알고 경험한 자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절망을 경험한 자만이 애통의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절망에서 갈망으로 옮아가는 자가 온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을 갈망하는 자만이 진정한 배부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듯이,
나의 목표는 주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고,
나아가 주님이 나를 아시는 바 되는 것입니다. (갈4:9)
다윗이 그랬듯이,
나의 최종 목표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행13:22)

나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후기)
헉헉.....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ㅎㅎ

위 4부의 글을 바라봄의 법칙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제가 임의적으로 명명한 ‘신앙의 3법칙’ 중 첫번째입니다. (두번째는 일치의 법칙, 세번째는 나눔의 법칙이죠^^) 원래 비젼신앙으로 시작했던 것이 결국 비젼의 핵심인 바라봄의 법칙으로 통합한 것입니다. 2부의 중간에 나오는 치유 간증은 아직도 제 가슴 속에 감격으로 유효합니다. 3부 비젼의 3단계는 다음에 올릴 “주님의 눈물”에 인용이 됩니다. 4부 다윗신앙은 올 연초에 쓴 것입니다. 저는 “바라봄의 법칙”의 롤모델을 다윗에게서 찾았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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