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앙의 3법칙②] 일치의 법칙

조회 수 820 추천 수 75 2010.08.11 20:54:38

(총3부작인 일치의 법칙은 완결된 1부, 2부와 미완성된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부에서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여기저기 인용했습니다. 하람맘님 지적하신 바와 같이..ㅋㅋ)


1부: 물 위를 걸으라!
(베드로가 인생의 말년에 영적 아들 마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아들 마가야, 지난 번 들려준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 이번엔 예수님과 물 위를 걸었던 신기한 경험을 얘기해 줄 차례구나. 내 일생에서 어쩌면 제일 신났던 경험일거야.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거든. 내 친구들도 다들 나를 부러워 했었지. 조금 싱겁게 끝나기는 했지만..

그 날 말이야. 내 동생 안드레, 야고보 형제, 빌립, 도마 등 우리 제자들은 빈들에서 게네사렛을 향해 배를 띄웠지.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 갑자기 기도하러 혼자 근처 산속에 남아 계시겠다는 거야. 그러시면서 우리 보고는 먼저 배를 타고 벳세다로 건너가 있으라는 거지. 예수님이 걱정은 되었지만, 늘 그러시는 분이니까 어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우리는 저녁 느즈막해졌을 때에야 배를 띄웠어. 배가 출발하기 무섭게 갈릴리 바다에는 풍랑이 세차게 불어왔어. 맞바람이 치면서 배는 잘 가질 못하고 있었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자정이 훨씬 넘었을 때였을거야. 다들 노를 잡고 힘겹게 파도와 싸움을 하고 있던 중, "유령이다"라는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온 거야. 친구들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보니, 웬 시커먼 물체가 바다 위에 떠 있었지 않겠느냐. 이게 꿈인가 하여 두 눈을 부비고 다시봐도 뭔가 시커먼 것이 그대로 있는 거야. 아니, 그것은 우리 쪽으로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어. 배 안에서는 난리가 났지. "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여기저기 구원을 향한 기도소리도 들렸어. 다들 이제는 유령에게 잡혀 죽게 생겼구나, 라고 생각했지. 왜, 하필 이런 때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을까? 한순간의 의문이 내 머리 속을 스쳐갔어. 주님이 계셨으면 저런 유령 따위는 걱정도 없었을텐데. 그런데 그 주님이 안 계시니..

어느새 그 유령은 배와 지척 간으로 다가왔어. 비바람이 매섭게 치는 가운데 보이는 것은 희미하지만 사람의 형태였어. 다들 생각했지, 그래 어차피 유령도 사람의 형태로 되어 있거든. 그런데 그 유령 쪽에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온 거야. 나는 그때 뒷쪽에 남아 있어서 잘 들리지가 않았어. 앞쪽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어. 뭐라고 그러는 거야? 빌립이 앞쪽에다 소리쳤어. 예수님이래! 앞쪽의 누군가가 답해 주었어. 아, 유령처럼 서 있는 앞의 시커먼 물체가 주님이시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는 동안 나도 앞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제는 서 있는 그 사람의 윤곽이 잡히더군. 빗줄기와 풍랑 때문에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여자가 아닌 남자의 모습이었지.

"아니야, 예수님을 가장한 유령일거야. 예수님이 이렇게 빨리 오실 수 있겠어? 그리고 생각해봐, 사람이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 있겠느냐구? 아이고,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 도마가 그렇게 얘기하자 배 안은 금방 슬픔의 도가니로 바뀌어 버렸어. 그렇지만 시커먼 물체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어. 아마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앴어. 그렇게 혼돈의 순간이 있은 후에야, 평상시 눈썰미 좋은 야고보 동생 요한이 외쳤지. "예수님이다, 예수님 맞아. 저기봐, 얼굴의 구렛나루도 보이잖아. 분명, 주님이셔." 저쪽에서 요한의 외침에 대답하는 소리가 이제는 희미하게 들려왔어. "그래, 나다. 두려워말아라."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 그것은 분명 예수님의 목소리였지. 와, 살았다! 여기저기 감격과 환호성의 소리가 들려왔어. 나는 생각했지. 그래 맞아,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서 우리한테 오신거야. 잠깐이지만 우리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능력을 잊고 있었던 거야.

나는 신이 나서 외쳐댔어. "주님, 주님이시라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해 주십시요." 분명 주님이시라면, 나도 물위를 걸을 수 있게 해 주실거야, 라는 단순한 생각이었어. 저쪽에 계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 "그래, 이리로 오라."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친구들한테 부탁해서 배 밖 파도위로 첫 발을 디뎠어.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었느냐구? 아무 다른 생각은 없었어. 앞에 서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았지. 주님이 거기 계시니까. 그 주님만 바라보고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계속해서 조금씩 걸어간 거야. 파도가 넘실대는 그 물 위를 말이야! 사실 내 발 밑이 물이라는 생각도 그 순간엔 잊어버리고 있었어. 오직 나를 향해 팔을 벌리고 웃음짖는 주님의 얼굴만 바라보며 한발 한발 나아간거야. 그래, 그거야. 바라봄의 법칙!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불가능이 없어.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는 거야. 주님만 바라보라!

그런데, 그게 있지. 주님만 바라보고 계속 간다는게 말처럼 쉽지 않더라고. 한순간 성난 파도가 일자 나는 정신이 번쩍 났어. 아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야. 물위를 걷고 있잖아. 우선은 우쭐한 생각이 들었어. 친구들 중에 내가 최고라는 빵빵한 기분, 그거 알지? 아차 하는 순간에 교만이라는 놈에게 내 몸을 맡긴거야. 그러고나서, 현실을 확인한 나는 내 발 밑의 파도를 보기 시작했어. 내가 갈리리 바다 한 복판 깊은 곳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내 발은 물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지 뭐야. 어, 하는 사이 어느새 내 몸은 허리까지 빠져 들어갔어. 순간적으로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어. 앞에 계신 주님께 죽어라고 소리쳤지. "주님, 살려 주세요!" 공포와 절망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지. 단지 주님께 살려달라고 전심을 다해 소리지는 것 밖에는.. 내가 평상시에 물 속에서 얼마나 자맥질을 잘 하는 지는 마가 네가 알거야.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어. 물 위를 걸었다는 자만심 속에서 물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갈 때는 오직 캄캄한 죽음의 절벽 밖에는 보이지 않더군.

예수님이 어느새 다가와 허우적거리는 내 손을 잡아 주셨어.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손을 잡았는지도 몰라. 어떻게 예수님이 빠져가는 내 몸을 끌어올렸는지도 정확히 기억이 안나.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몸이 이미 물 밖에 있었고 나는 예수님의 손을 꼭 잡고 물위에 떠 있었어. 배 쪽에서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박수와 환호성이 들려왔지. 정신이 없어 예수님께 감사의 말씀도 올려 드리지 못했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주님의 책망어린 말씀만이 내 귀를 맴돌았을 뿐이야. 믿음이 적은 자여! 그래, 나는 아직도 멀었어. 주님만 바라보지 못하고 한갖 세상의 파도 앞에서 의심만하고.. 쳇, 이게 무슨 꼴인가? 친구들 앞에서 개망신만 당했잖아. 몇 발자욱 물위를 걸었던 그 기적은 어느새 뒷전에 두고 나는 곧 부끄러움에 젖어 버렸어.

어느덧 예수님과 함께 나는 배 위로 올라와 쑥스럽지만 친구들의 박수와 함께 축하를 받았지. 모두들 예수님께 경배의 절을 드렸어. 동생 안드레가 옆에서 자꾸 물 위를 걸었던 기분이 어떠냐고 채근했지만, 그냥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내 생각은 계속 딴 곳으로 향했어. 왜 내가 실패했을까? 어떻게 했으면 그 때 계속 물위를 걸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자문해도 그 당시에는 뾰족한 해답을 발견할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다시 이 문제를 주님께 여쭤 보기에는 좀 그랬고.. 그러다 훗날, 성령님이 내게 임하시고 깨달아지는 부분이 있었단다. 그것은 뭐랄까? 글로바 형제가 엠마오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처음엔 알지 못하고 있었다가 나중에서야 눈이 밝아져 주님인 줄 깨달은 것과 같은 이치였지. 그것은 내가 또다시 물위를 걸었던 두번째 기적의 사건을 간과했다는 거야.

첫번째 기적은, 내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 나아가면서 물위를 걸었던 거야. 명백하지? 나와 친구들 모두 그 첫번째 기적에만 집착해서 두번째 기적은 까맣게 잊고 있었지. 그게 뭘까? 그래,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함께 다시 내가 물위를 걸었었다는 사실이야! 주님의 손을 잡고 배로 돌아오기까지 물위를 걸었던 그 순간의 기적 말이야. 왜 이것이 잘 기억이 나질 않았을까? 그건 말이야. 우선은 그 기적의 주체가 내가 아니고 주님이 하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아. 사실 그 때는 내가 한 일이 별로 없었거든. 나는 단지 주님의 손만 잡고 있었던 거야. 주님이 걸으시는 대로 내 발걸음도 물위를 걸어 나도 모르는 사이 배 위로 올라오게 된 거지. 그런데 그 거리는 내가 애쓰고 노력했던 첫번째 기적을 행한 그 거리와 똑같앴어. 그리고, 필요하다면 나는 주님과 함께 훨씬 더 긴 거리를 아무 장애도 없이 분명 더 걸을 수가 있었어.

마가야, 이제 이 두가지 기적의 근원적인 차이를 어느정도 깨달을 수 있겠니? 첫번째 기적 때는 내 의지로, 내가 주체가 되어, 주님을 내 기적의 도구로 사용한 거야. 바라봄의 법칙은 정말 좋은 것이지. 하지만, 내가 행위의 주체가 될 때 바라봄으로만은 한계가 있어. 결국 나는 내 자유의지로 이것도 택할 수 있고 저것도 택할 수 있지. 내 주위의 환경,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에 따라 굳건한 것처럼 보였던 나의 믿음은 교만과 의심이라는 장애 앞에 언젠가는 쓰러지게 된단다. 이미 내가 첫번째 기적에서 체험했던 것과 같아. 어쩌면 이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때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인지도 몰라. 내 자유의지가 작용하고 유혹자가 호시탐탐 나를 노리는 한 말이야.

그러면 두번째 기적은 어떨까? 먼저 두번째 기적은 무엇으로 시작이 되었을까? 그것은 전적인 내 의지의 포기로 시작이 되었어. 내 노력과 스스로의 행위를 완전히 멈추고 주님께 항복하여 두 손을 벌릴 때였어. 다급한 내 외침(주님, 살려주세요) 속에는 처음에 내걸었던 어떤 형태의 가정법(주님이시라면..)도 없었단다. 물위를 걸어보겠다는 애초의 욕심 따위도 아예 없었지. 그냥 아무런 욕구와 조건이 없이 주님께 나를 던져버린 거야. 내 지정의(知情意)의 전체를 주님께 맡겼다고나 할까? 주님이 내 손을 잡아 일으키셨을 때, '나'는 사라지고 주님만이 홀로 행동의 주체가 되신 거야. 나는 주님의 손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가지일 뿐이었어. 주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 기억나지? 바로 그거야. 그때서야 나는 포도나무이신 주님께만 온전히 붙어있는 가지가 된거야.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바라봄의 법칙인지도 몰라. 아니, 바라봄의 법칙을 넘어선 일치의 법칙이라고 하면 어떨까? 내 모든 것을 주님과 일치시키는 거야. 주님께서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잖니? 일치의 법칙이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완전히 하나된 것처럼 나를 주님과 하나로 일치시키는 거야. 내 손이 주님의 손을 잡음으로, 또한 주님의 손이 내 손을 잡아 주심으로, 나는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가 되는 거야. 두번째 기적으로 돌아가 볼까? 내가 주님의 손을 놓지만 않는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물위를 걸을 수 있었겠지. 주님은 언제나 내 손을 붙잡고 계시거든. 나를 사랑하시고 목숨까지 주신 그 분이 어떤 순간에라도 내 손을 뿌리칠 리가 만무하지 않느냐? 정말 내 쪽만 문제 없다면 말이지.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말이야.

오늘도 얘기가 길어졌지? 이제 정리를 해보자꾸나. 첫번째 물위를 걷는 기적은 내 욕심과 조건으로부터의 출발이었어. 주님을 바라보았지만 세상의 파고는 내 바라봄보다 더 높아서 나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어. 두번째 물위를 걷는 기적의 출발은 나를 포기함으로 비롯되었지. 주님의 손을 잡기위해,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주님이 내 손을 잡아 주시기 위해, 나는 내가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놓아야 했어. 그것이 욕심이든 교만이든 명예이든 상관이 없는거야. 주님과의 일치를 위해서는 먼저 나를 철저히 비워야 해. 왜냐하면 내가 먼저 비워진 연후에야 주님이 채우실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곤 내 손을 주님께 벌려야겠지. 우리 주님은 비워지고 겸비한 나를 향해 늘 손을 내밀고 계신단다. 주님의 손과 내 손이 만나 서로 잡고 있을 때, 신비적 일치의 기적이 시작되는 거야. 바꾸어 말하면, '내'가 비워진 그곳에 '주님'으로 채워지는 거야. 바로 주님과 나의 하나됨, 일치의 법칙이야.

아들아!
너는 바라봄의 법칙을 넘어
일치의 법칙으로 나아가야 하느니라.
그러나 네가 해야 할 일은 별로 없단다.
주님께서 네 안에서
일치의 법칙을 운행하시도록
주님께 네 모든 것을 맡기려므나.
아들아, 사랑한다.




2부: 일치를 향한 여정


제가 일치의 법칙을 깨달은 때는 2009년 초였습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넘어선 일치의 법칙- 이것은 그 이후 제 마음 속에 늘 품고 있었던 묵상의 제목이었습니다. 일치를 향한 주요 구성요소는 무엇이며, 어떻게 일치에 이르게 될까? 일치를 향한 나의 자세와 내적 발전 단계는 어떠할까? 이런 의문점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해답(정답이 아님^^)을 정리해 봅니다. 이것이 일치의 법칙 제2탄으로 ’일치를 향한 3단계의 여정’입니다.

우선, 제가 말씀드린 일치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일치라고 하니까, 뭔가 거창하고 고상한 경지로 가는 것 아닌가? 라는 착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일치가 된다면, 주님과 똑같은 경지로 올라 갈까요? 그럴리도 없지만, 설사 그럴지라도 영의 원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막10:18)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하심은 성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전적으로 옮아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들의 선하심은 100%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 당신께서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은,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셨지요. 따라서 내가 할 일은, 주님처럼 철저하게 나를 낮추고, 100% 주님으로부터 내려받음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나의 낮아짐은 나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나의 낮아짐은 주님의 주님 다우심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어떠함을 확연히 깨닫는 것입니다.
그 차이에 압도되어 그냥 무릎 꿇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 앞에 “화로다“ 외쳤던 이사야처럼,
주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 못하겠다던 세례 요한처럼,
주님의 발 앞에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처럼,
주님의 옷을 송구함과 부끄럼으로 조심스레 만졌던 혈루증 여인처럼..

오, 주님!
저도 그렇게 낮아지게 하옵소서.
저도 그렇게 낮아지고 싶습니다.
한 알의 썩어져 가는 밀알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제게 또한 거룩한 욕심이 있습니다.
주님을 닮아 가고자 하는 영적 소망이 있나이다.
주님의 성품을, 주님의 영광을 닮고 싶나이다.

감히, 주님과의 일치를 소망하나이다.
일치를 향한 제 소망은 이것입니다.
아, 그 영광의 스랍..
아, 그 영광의 신들메..
아, 그 영광의 발등상..
아, 그 영광의 옷자락..
저도 그들처럼 그 끝자락을 만지게 허락하옵소서.
저도 그들처럼 그 끝자락에 입맞추게 허락하옵소서.
그렇게 주님과 일치하기 원합니다.
이것이 제 소망입니다.

이러한 일치의 소망과 단계를 묵상할 때마다, 제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팔복이었습니다. 팔복의 말씀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여정의 이정표이자 가이드라고 생각합니다. 그 팔복 중 저는 특별히 제3복과 4복과 6복 및 7복을 붙잡았습니다. 이 네가지 복이 제게는 일치를 향한 길로 연결됨을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네가지 복은 일치를 향한 각 단계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1단계- 인식의 전환, 2단계- 배움과 분별, 3단계- 일치를 향한 여정입니다. 2009년12월29일 갈릴리의 팔복산 구릉에 올랐던 그 감격을 다시 한번 회상합니다. 이제 저를 따라, 제가 생각한 ’일치를 향한 3단계 구릉’을 함께 밟아 보시지요.


1단계는 인식의 전환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3복의 온유한 자- 이것이 일치를 향한 1단계에서 보여주는 인간형입니다. 우선적으로, 3복은 1복과 2복을 통과한 이후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1복(심령이 가난한 자)과 2복(애통하는 자)을 경험하지 못하면 3복에도 이르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에 온유라는 단어의 비밀이 있습니다. 온유는 심령의 진정한 가난과 애통의 골짜기를 통과한 자가 얻는 복입니다. 즉, 자신의 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비밀을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따르되, 예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기로 작정한 사람이 온유한 자입니다.

온유는 어떻게 생길까요? 저는 하나님과 나와의 차이를 인식함으로 온유함이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차이를 가장 근접하게 느꼈던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그는 여러 차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영광을 보았고, 40년간의 광야 훈련을 통하여 스스로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유한 자’였습니다. 그의 깨달음은,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이자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단순한 차이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길과 뜻이 인간인 내 것과 근원적으로 다름(높음)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가치의 패러다임 쉬프트 즉, 인식의 전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식의 전환이되, ’근원적, 혁신적’인 전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55장은 이러한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내 것과 얼마나 다른 지를 명시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는 다름과 높음, 그리고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을 정도로 하나님과 나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의 길을 어떻게 생각해 왔을까? 나의 길은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길은 저 쪽 어딘가, 내 길의 연장선 상 어느 끝쪽에 있다고 나는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가갸거겨’라는 길이라고 칩시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길은 ’하햐허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내 길을 개혁하고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뜯어고쳐 가다보면, 언젠가는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길이 보일 것으로 오인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길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증거합니다. 그것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하햐허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르되, 아예 내 지성과 상상을 ’초월’한 길이었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표기된 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 지구상의 언어가 아닌, 내게는 차원이 전혀 다른 은하계 너머의 별종의 소통체계와 같다고 할까요? 내가 알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길이 하나님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다르되, 아예 근원과 출발이 달라서 전혀 새로운 세계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예는 어떨까요? 3차원이라는 한계 속에서 살고있는 인간이 4차원 또는 그 이상의 세계를 알 수 있을까요? 2차원에 존재하는 개미가 3차원에 살고있는 인간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 세계를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 아닙니까?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을 나의 잣대 안에서 인식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나는 나의 한계 가운데 하나님을 잡아두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개미와 같은 존재인데, 내 눈으로 저 너머의 세계를 내 나름대로 판단하고 인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인식하는 그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닌 허상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1단계의 인식의 전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숫자를 가지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숫자로 표현한다고 칩시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가장 큰 숫자를 대도, 이것으로는 하나님의 크기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 ’무한대’(∞)라는 숫자가 있지 않느냐구요?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무한대는 내가 처한 한계 상에서,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큰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크기는 무한대라는 숫자 저어~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잣대 속에 있는 ’그 무한대’로 하나님을 제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기고만장한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땅끝까지 날아갔다고 착각했지만, 실제는 부처의 손아귀 안에서 놀고 있었다는 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저 내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알 수 없다는 이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크고 높아서, 내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하거나 형상화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길과 생각이 내 길과 생각과는 근원적으로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면 됩니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그 무엇과 비교하거나 인식하려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기대와 인식, 내가 움켜쥐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을 표현하는 아래 두 단어의 차이를 분별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상대와 절대, 초과와 초월입니다.

하나님은 상대적 하나님이 아닌 절대적 하나님이십니다.
상대는 나로부터의 출발이요 가정이지만,
절대는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초과의 하나님을 넘어선 초월의 하나님이십니다.
초과는 나로부터 밟아 올라가는 것으로,
나의 무한대를 향한 나의 바벨탑을 쌓아가는 것이지만,
초월은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기준을 들이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 초월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단계는 배움과 분별입니다.

1단계에서 나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초월성을 인정하고, 겸비함으로 나로부터의 출발을 버렸습니다. 이제 주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자연스레 나는 주님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집니다. 주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 그 주님의 나에 대한 기대는 무엇인지에 대해 더 알고 샆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2단계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4복은 저에게 일치를 향한 2단계를 보여 줍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먼저, 4복은 3복의 온유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그 온유한 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를 때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의는 무엇일까? 내가 추구해야 할 의는 나의 선한 행위일까? 아니면, 내가 이뤄낼 수 있는 훌륭한 믿음일까? 이런 것들은 나로부터 출발했던 것이라고 선언했지 않았습니까? 왜 그랬을까요? 나는 철저히 유한하고 무익한 자임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 앞에서 한갖 스러져가는 모래알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을 다시 들여다 봅니다. 아, 그럼에도 내 마음은 아직도 영적 전쟁터임을 봅니다. 내 마음은 내외적으로 총칼이 난무하는 배틀 필드입니다. 외적으로는 유혹자 사단의 화전과 맞서 싸워야 하며, 내적으로는 내 마음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죄성과 겨뤄야 합니다. 마음은 영과 육의 대결장입니다. 그런데 나의 마음은 본래 내 편이 아니랍니다. 이러함으로 나는 한 평생 내 안의 연약함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영으로 마음을 제어해야 합니다. 나아가, 영으로 마음을 ’죽여야’ 합니다. 나의 죄성이 날마다의 삶 속에서 죽음을 경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주님을 더 알아감으로 해결됩니다. 주님을 더 체험하는 만큼, 일치를 향한 나의 여정도 진보해 갑니다. 주님만이 나의 진정한 해결자 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의 의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고 믿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의이자 나의 전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만이 나를 살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배부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께서 주시는 의로 내 영이 충족되었을 때 만입니다. 그러기에, 일치를 향한 2단계는 주님을 향한 나의 배움과 분별입니다. 주님을 점점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알아가되,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을 하나하나 배워가며, 나아가 그 배움을 근거로 나를 향한 그분의 기대를 체험해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주님을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아니, 주님 만을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이 세상 지식과 학문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이제까지 쌓은 나의 이룸과 명예와 영광을 해로 여깁니다.
나로부터 출발한 내 믿음과 선한 소원까지도 다 버립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3:8)

배움의 길에는 끝이 없습니다.
주님을 배우고 체험하되,
그분의 계시인 말씀을 배워 갑니다.
그분의 영과 성품과 마음과 생각과 뜻과 길을 배워 갑니다.
그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체험해 갑니다.
그분이 내게 주신 나의 소명과 사명,
나를 향한 그분의 뜻과 기대하심을 깨달아 갑니다.

주님의 뜻은 선하십니다.
주님의 뜻은 기쁨이 가득합니다.
주님의 뜻은 온전하십니다.
이제 주님의 그 뜻을 분별하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롬12:2)


3단계는 일치를 향한 여정입니다.

1단계의 인식의 전환을 거쳐, 2단계의 배움과 분별의 단계를 거친 연후에야, 3단계로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3단계도 최후의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최종적 구원과 일치는 주님의 재림 때에서야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단계는 일치를 향한 끝없는 여정이라고 믿습니다. 어차피 나의 인생은 여행길이니까요. 여행길이되, 관광 여행이나 방랑 여행이 아닌 순례의 여정인 것이지요. 순례의 여정이되, 특별히 일치의 여정이어야 하겠습니다.

3단계에서의 팔복의 말씀으로 저는 두가지 복을 붙잡았습니다. 욕심이 많아졌지요?^^ 6복의 마음이 청결한 자와 7복의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3단계는 다시 두 단계로 세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3-1 단계는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달리 말해, 순수와 거룩의 단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하다는 뜻의 헬라어 카타로스(Kataros)는 깨끗하다는 뜻에 더하여, 순수하다는 의미를 더 강하게 담고 있습니다. 먼지나 잡티 등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함의 결정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오염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또한 거룩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표현한, 두 마음이 없는 순수한 ’한마음’이 청결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양다리를 걸치지 않는 사람, 즉 오직 한 쪽(영과 진리)에만 올-인하는 사람입니다. 삶의 이중성의 고뇌를 벗어난, 진정한 의미의 ’자유자’이기도 합니다.

영의 세계는 단순한 세계입니다.
내 앞에 갈림길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 갈림길은 단지 두 갈레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좁은 길이냐, 넓은 길이냐?
은혜냐, 죄냐?
영이냐, 육이냐?
주님이냐, 사단이냐?
그 사이 중간은 없습니다.
선택의 결정권은 내게 달렸습니다.
나는 둘 중 하나만 선택하면 됩니다.
이것이 영의 세계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7복은 6복의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된 이후에야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주님과 나와의 화평이요, 둘째는 이웃과 나와의 화평입니다. 그러기에, 일치를 향한 3-2 단계는 주님과 나와의 화평입니다. 이 화평은 주님 쪽에서 이미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주님이 이루신 이 화평을 깨닫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2: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주님과의 화평은 일치를 향한 내 영적 발돋움입니다. 이것은 또한 주님께서 나를 향하신 명령입니다.

일치를 향한 여정.. 그 마지막 길은, 주님과 내가 손에 손 잡고 함께하는 ’화평의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키워드는 교제와 순종이라고 믿습니다. 주님께서 요15장에서 가르쳐 주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진정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가지가 포도나무에 한결같이 붙어있기 위해서는, 포도나무가 주는 진액과 영양분을 항상 받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지는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다른 양식은 없습니다. 가지가 할 일은 단 한가지입니다. 포도나무에 줄기차게 붙어있기만 하면 됩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있는 나도 마찬가지이겠지요. 교제와 순종을 통해 끊임없이 주님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고 소통함으로, 일치의 여정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아시지요? 내가 알든 모르든, 나는 만유인력의 영향권 아래 지배받고 있습니다. 나는, 지구라는 거대한 혹성이 주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오늘도 직립보행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만유인력은 풍력, 수력, 자력 등 지구 내의 다른 어떤 힘보다도 더 큽니다. “너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요10:29) 아, ’만유’보다 크신 주님! 저는 여기서 ’영적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주님이라는 거대한 실체에 딸려있음으로, 내가 지배받는 법칙입니다. 주님을 따라 움직이고 지배받는 만유인력입니다. 주님이 계시는 위치에 따라, 나는 때론 거꾸로, 때론 옆으로, 때론 직립으로 서 있게 됩니다. 주님이 가라시면 가고, 오라시면 오고..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만유인력이 작동합니다. 주님이 지배하시고 통치하시는 내 내면의 영역이 더 넓어져 갑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이 나의 마음과 지각을 지배하게 됩니다.

주님,
순수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거룩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주님과의 화평을 누리겠습니다.
주님의 만유인력 안으로 들어 가겠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향해 꼭 쥐신 손,
영원토록 놓지 않으시는 그 손을 향해
저도 손 내밀겠습니다.
오직 그 손만을 향해,
손에 손 잡고..
그렇게 걸어 가겠습니다.

아, 화평의 사람..
아, 일치의 여정을 향하여..


(이제 결론을 정리해 봅니다.)

나의 내면세계를 크게 세가지로 나눠 봅니다.
첫번째 레이어는 지각의 세계입니다.
지각은 내적 세계로 들어가는 창구요, 외적 세계를 향한 문입니다.
두번째 레이어는 마음의 세계입니다.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이 합쳐진 광활한 밭과 같은 곳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영의 세계입니다.
영은 거듭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주님과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영은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은 지각을 다스립니다.
또한, 지각은 마음에 영향을 주고, 마음은 영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기에 각 레이어는 양방향으로 서로 소통합니다.

일치를 향한 여정은 나의 거듭남으로 처음 탄생합니다.
내 영이 살아남으로, 비로소 나는 일치를 향한 여정을 떠납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일치를 향한 여정의 첫 걸음마입니다.

1단계는 지각(1st 레이어)의 변혁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1단계를 인식의 전환이라고 일컫습니다.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님 다우심을 깨달음으로,
그렇게 주님과 나와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2단계는 마음(2nd 레이어)의 변화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2단계를 배움과 분별이라고 일컫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배워 감으로,
나를 향한 그분의 기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3단계는 영(3rd 레이어)의 일치입니다.
일치는 이루었다 할 것이 아닌, 나의 영원한 지향입니다.
그래서 3단계를 일치를 향한 여정이라고 일컫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교제와 순종함으로 붙어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새로운 ’만유인력’ 되심으로,
아, 손에 손 잡고 주님과 함께 가는 여행이랍니다.

일치를 향한 3단계는 개별의 독립적, 일회적 단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호 순환, 심화, 반복하는 싸이클입니다.
그렇게 일치의 싸이클이 심화될 수록 나는 주님과 더 가까이 갑니다.

오, 주님!
저로 주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저로 주님과 일치하게 하옵소서..
아멘..




3부: 영적 연대로서의 교회

(이 글은 제목만 정해놓고 아직 못 썼습니다. 제게 주신 깨달음이 아직은 부족한 탓입니다. 일치의 법칙의 최종적 모습은 주님의 신부로서의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우주적 영적 연대로서의 교회의 모습은 제가 바라는 이상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한 몸이 되어 온전히 일치된 교회의 모습.. 새예루살렘이라고도 불리우지요. 언젠가 이 글을 완성할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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