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은 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이요 (마5:3)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 예배 때의 경험을 네게 들려주고 싶어.
영(靈)에 대한 것이야.
예배 시작할 때의 기도 중에 문득 떠오른 깨달음이었어.
너도 잘 알지?
영은 육(肉)과 반대되는 개념이야.
헬라어로는 프뉴마라고 하고, 히브리어로는 루아흐이지.
그래서 영은 하나님의 숨결(루아흐)이요,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네게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이라 할 수 있단다.
그러니까 이렇게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영은 주님께서 네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라고.
그런데 예수님은 영이 가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영이 가난함으로 복을 누리고, 천국을 소유한다는 말씀이셔.
가난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왜 가난해야 할 대상이 영일까?
원문에서 보면 그것은 다른 단어가 아닌 프뉴마로 표현되었지.
왜 그러셨을까?
이것이 요즘 내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의문이었어.
예수님을 믿음으로 네가 거듭난 경험을 생각해 봐.
그것은 너의 가난함으로 출발했던 것이 사실이었어.
네 죄를 인정하고 너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손벌림의 가난함이었지.
그래서 어찌 되었니? 네 영이 살아나지 않았니?
그 이후에 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영은 네 마음 뿐만 아니라 내면세계의 모든 활동을 주관해야 할 주체가 되었지.
영이야말로 네 내적 영역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거야.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 볼까?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고 하지, 왜 영이 가난해야 한다고 하셨을까?
그것도 팔복의 시작인 가장 첫번째 복에서 말이야.
Super in Spirit이라고 해야지, Poor in Spirit이라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니?
이 의문이 오늘 아침에 조금은 풀렸단다.
아주 조금..
내 경우, 그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였어.
그래, 네가 잘 아는 사랑장이지.
기도 중에 사랑장에 있는 내용이 내 심령에 펼쳐 졌단다.
사랑장의 내용을 성령님께 대입시켜 보라는 속삭임이 들렸어.
4절부터 8절의 말씀을 이렇게 말이야.
성령님은 오래 참고
성령님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성령님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가슴의 응어리진 무엇이 터지며 내 눈물샘도 같이 터졌지 뭐니?
그래, 성령님이 인격이심을 잠시 잊었던 거야.
그래, 내 영도 인격인 것이고.
내 영은 달리말해 성령님이셔.
내가 거듭날 때 일어났던 기적 중의 기적..
그것은 내 존재 안에 성령님께서 친히 들어오신 것이지.
더럽고 썩어 문드러진 나의 내면 안으로 몸소 오신 성령님..
그리고 이제껏 묵묵히 일하시는 성령님..
이것이 내 영이 살아났다는 진정한 의미 아니겠니?
삼위 중의 한 분이신 성령님의 인격이 내게 밀려 왔단다.
모든 근원의 시초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존하시는 아버지,
인간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사역을 마치시고 영광 받으신 아들,
그러면 성령님은?
아, 한시도 쉴 틈이 없으신 성령님..
하늘의 일곱 영으로 계시지 않고 지금도 이 땅에서 일하고 계시지 않니?
너와 나의 추한 마음 속에서 탄식함으로 기도하고 계시지 않니?
그 성령님이 바로 주님이신데..
바로 주님의 영이신데..
그래서 보혜사라고 불리시는 그 분이신데..
그 분은 진리의 영이시자 겸손의 영이시며 사랑의 영이시란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께 당신의 영광을 모두 돌렸듯이,
성령님이 취하실 영광은 모두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 돌려진단다.
왜냐하면, 그 분은 성부의 영이시자 성자의 영이시기 때문이야.
왜냐하면, 그 분 자신이 사랑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이야.
바로 그 분이 너와 내 속에 있는 영이란다.
그러니까 위의 노래를 이렇게 바꿔 불러도 되지 않겠니?
영은 오래 참고
영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영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제 의문이 조금 풀렸지?
가난은 영의 자발적 인자란다.
가난은 영의 속성이란다.
가난은 겸손이란다.
가난은 사랑이란다.
영이 가난할 때만이
즉, 영이 자신의 역할을 자유롭게 수행할 때에야
애통과 온유와 갈망이 비로소 따라 온단다.
그래서 팔복은 가난한 영으로부터 시작하는 거란다.
아, 가난한 영이여..
아, 가난한 성령님이시여..
스스로 가난하시어
모든 것을 내어 주시되
아무 영광도 취하지 않으신
나의 영이시여..
비천한 나를 위한
제 2의 성육신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