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한 말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12:1-4)

4월7일 수요예배 때의 일입니다. 설교 본문은 마태복음 10:40-42절이었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42절의 말씀에서 ‘작은 자’가 바로 제자들이고, 나아가 나 자신임을 목사님의 설교에서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인 ‘나’에게 은덕을 베푸는 사람이 축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새기면서, 그날 아침부터 붙들고 있었던 위의 창세기 12장 말씀을 들추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린 이 유명한 축복의 말씀을 붙든 이유는, 그주 제자반 QT가 창세기 39장 초반에 나오는 요셉의 형통 이야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며칠동안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과 요셉에게 주셨던 축복과의 연관성을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설교 중에 창12장 말씀을 들여다 보면서 퍼즐이 풀렸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이 말씀의 매듭이 제게 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마10장과 창12장, 그리고 창39장의 모든 멧시지가 단 하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는 마치 세 조각의 다른 퍼즐이 하나로 맞물려지는 순간의 희열이라고나 할까요? ‘축복의 통로’라는 의미가 새롭게 제게 다가왔습니다. 예전의 비늘 덮인 제 눈이 떨어지면서 축복의 비밀, 축복의 흐름이 어떠한 것인지 눈에 보였습니다. 이제 저와 같이 제가 발견한 내용을 따라가 보시지요. (사실 다른 분들은 다 알고 계시는 내용인데, 저만 뒤늦게..^^)

그동안 비늘 덮힌 제 눈은 창12:3절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읽었습니다. “네가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네가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즉, 아브라함이 만나는 자마다, 아브라함이 그를 축복하면 그가 복을 받고, 아브라함이 저주하면 그가 이에 따라 저주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권을 받아, 다른 이에게 축복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우리는 다 왕같은 제사장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완전 거꾸로였습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저주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축복에 대한 주어와 묵적어가 바뀐 것입니다.

이후 창세기를 따라가 보니, 비슷한 축복의 내용이 또 나왔습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는 장면에서도, 아브라함의 축복은 동일한 내용으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민수기에도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민24:9)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는 내용 중 하나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저기 반복적으로 나타남을 발견하는 것이 제게는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저와 같은 착각을 했던 사람들을 성경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민수기 22장부터 시작되는 발락과 발람이었습니다.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 선지자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주도록 청탁합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부탁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민22:6) 발람이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발람이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지요. 저는 창12:3의 ‘아브라함의 축복’에 대응하여, 이것을 ‘발람의 축복’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면 발람의 축복은 무엇이 이상했던 것일까? 그 사상에 무슨 오류가 있었던 것일까? 그 해답의 근거를 찾기위해, 제사장들의 축복은 대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을까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성령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왕같은 제사장이기에, 제사장에게 주어졌던 축복권을 우리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모세를 통해 아론과 제세장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말씀 – 제사장이 백성에게 전해주는 축복의 말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6:24-27)

저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문장의 주어가 누구인지 보십시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것은 복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었습니다. 축복의 최초 수여자는 물론 하나님이시지만, 위 말씀을 자세히 보면 제사장은 의외로 복을 ‘빌어’주는 단순한 ‘통로’ 역할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주관자이자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일일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최종 결론부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를 보면, 발람의 축복이 왜 이상한 것인지 알겠지요? 하늘의 복은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과 발람의 축복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 위의 도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발람의 축복도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내려 주신 복을 내가 받아 그 복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축복의 나눔이었습니다. 나는 주님의 전권대사로서, 주님이 내게 주신 복을 내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어 줄 권리와 의무가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이 축복의 통로요, 복의 샘물로서의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사실 이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믿음의 조상들도 직접적으로 그들의 후손이나 다른 이들에게 축복을 주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창49장 야곱의 축복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축복의 선언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의 축복도는 발람의 축복도보다 복잡하고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①번: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신 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흐름은 완전히 다릅니다. ②번: 내 이웃들이 나를 축복합니다. ③번: 그 이웃들의 축복을 근거로 하나님은 나의 이웃들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구요? 예, 이웃에게 축복을 나눈다는 결과는 같습니다. 그러나 과정은 엄청 다르지요?

핵심은 ②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웃에게 내가 늘 뭔가를 줘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뭔가를 받아야 한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주는 훈련’은 수없이 많이 해 봤고 교육받아 왔지만, ‘받는 훈련’은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잘 준다는 얘기는 아님^^) 내가 그들에게 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게 주신 축복, 십자가 복음, 사랑과 배려, 물질과 마음의 나눔... 그런데 아브라함의 축복은 역설적으로 내가 그들의 축복을 먼저 받아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나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이지요.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 원리를 두고 묵상할 때마다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우선, 주님은 당신의 영광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나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부름 받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에서 살아 갑니다. 내 삶의 목표는 단 한가지,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놀랍고 귀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내 삶을 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내 이웃과의 나눔도 주님의 영광이라는 그 최종 목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가령 ‘내’가 주체가 되어 주님의 복을 내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영광이지, 결코 주님의 영광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주님께 영광이 될 것인가? 나를 통하여 그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면 될게 아닙니까? 내 삶의 고백, 내 삶의 현장 속에서 내 이웃이 보아야 할 것은 주님이 주신 복과 영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을 관찰하고 주시한 그들이 내 속에 주님이 계심을 깨달아 안다면? 내 삶 속에 주님의 통치하심이 나타나고, 그들이 이를 볼 수 있다면? 그 결과는 틀림없이 그들이 나를 축복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께서는 나처럼 그들에게도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축복의 나눔, 그것의 주체는 ‘내’가 아닌 주님이신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임하는 곳에 축복도 임합니다.

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저는 요셉의 경우를 대입해 보았습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창39:1-6)

저는 위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축복도가 요셉에게 그대로 적용됨을 보았습니다. ①번: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②번: 보디발(그의 이웃)이 요셉을 축복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요셉에게 함께 하심으로 인한 요셉의 형통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요셉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가정총무로 삼고,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맡겼습니다. ③번: 요셉에게 임했던 형통의 축복이 보디발과 그의 온집에 그대로 임했습니다. 보디발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요셉은 축복의 중개인이 된 것입니다. 보디발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을 통해 제가 배운 것을 정리해 봅니다.

1.
축복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내’가 부러 다른 이에게 주려고 하지말자.
주님이 주시도록 나는 주님을 돕자
나는 단순히 주님의 복을 소개해 주는 자다.
나는 단순히 주님의 복을 중개해 주는 자다.

2.
내 이웃이 나처럼 복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들에게 내 삶의 통치자이신 주님을 보여주자.
그들에게 내 삶의 목적이신 주님을 보여주자.
그래서 그들로 나를 축복케 하자.
그러면 주님께서 그들도 축복해 주실 것이다.

3.
내 이웃이 나를 축복함은 내게 영광을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들과 비교하여 무슨 별 볼일이 있겠는가?
그들이 본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시다.
그들은 내게 복을 주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4.
그러므로, 나는 복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축복의 통로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복을 중개하는 전권대사이다.
그들로 너를 축복케 하라!
오, 주여.. 영광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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