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50:15-21
요약 : 선하신 하나님은 정직한 요셉을 통하여 당신의 선하신 설계하심에 따라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이주시키셨다.
붙잡은 말씀
20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느낌 및 묵상
본문과 요셉의 일생을 통해서 아래 세가지의 깨달음을 주셨다.
1) 요셉의 신앙 승리는 모태신앙이 기반이었다.
2) 요셉에게 주신 형통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3) 내 인생은 선하신 설계자에 의해 계획되고 설계되었다.
첫째, 요셉의 신앙 승리는 모태신앙이 기반이었다.
요셉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신앙의 성장을 이루었을까? 17세에 형제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감을 당하고 나서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 역정은 한마디로 드라마틱한 인간 승리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면의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과 인도하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그의 신앙의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보디발의 아내의 세찬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것은 그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위대한 신앙 유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후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로부터 그의 믿음은 분명 출발했던 것이리라. 믿음의 대물림 – 이 큰 자산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속칭 이를 ‘모태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나는 이것이 모태신앙의 승리라고 생각해 보았다.
왜 그럴까? 요셉을 포함한 4대족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 횟수를 비교해보면, 왜 요셉의 모태신앙이 중요한지 드러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8번, 이삭에게 2번, 야곱에게 7번 나타나셨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어릴적 꿈으로만 간접적으로 멧시지를 주셨지 한번도 나타나신 적은 없다. 물론 횟수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요셉의 신앙 바탕이 이미 튼튼히 세워져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이삭의 경우와 야곱의 경우가 대조적으로 재미있다. 이삭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은 반면, 야곱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이별하면서 자기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였다. 이삭은 자신을 바치려고 했던 아버지와 함께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이것이 그의 평생 신앙의 밑바탕이 되었지 않았을까? 모태신앙이 확고한 이삭에게 굳이 하나님께서 자주 나타나실 필요가 있었을까? 반면에, 야곱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지 못했던 마마보이였다. 아버지 이삭은 첫째 아들 에서에게 정을 더 많이 준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야곱에게는 신앙의 대물림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고향을 일찌기 떠나서 홀로 인생을 개척해야 했으니, 하나님께서 그만큼 자주 나타나셔서 당신의 뜻과 길을 제시해 주셔야 했지 않았을까?
요셉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창37장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37장부터 사실상 야곱의 이야기는 끝나고 요셉의 이야기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런데 성경은 엉뚱하게 선언한다. “야곱의 약전(略傳)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17세의 소년으로서..”(창37:2) 야곱의 약전을 소개하는 가 싶었는데, 실제 뒷얘기는 온통 요셉에 대한 얘기로 채워져 있지 않은가? 이것이 무슨 뜻일까? 뒤집어서 얘기하자면, 이후에 나올 요셉의 얘기가 야곱의 얘기라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자면, 37장부터 50장까지의 얘기는 ‘요셉행전’이 아니라 ‘야곱행전’이라는 뜻이 아닐까? 왜 그럴까? 요셉이 야곱 쥬니어(Junior)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요셉은 야곱 쥬니어였다. 야곱의 모든 인생 이력과 신앙 경력이 모두 요셉에게 그대로 대물림된 것이다. 아울러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이삭 할아버지와 아브라함 증조 할아버지의 믿음의 유산들을 한꺼번에 물려 받았을 것이다. 위의 열 아들보다도 훨씬 더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던 요셉, 어릴 적에 채색옷을 입었던 요셉은 철저한 모태신앙의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리라. 그러니까 이러한 모태신앙을 기반으로 해서, 애굽의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꿋꿋하게 이겨나갔던 것이 아닐까?
야곱이 특별히 중점을 두어 요셉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과 정직함이 아니었을까? 선하신 하나님은 야곱의 일생의 기둥이었다. 변개치 않으시고 신실하시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야곱의 일생을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셨지 않았는가? 그 하나님 한분에 대한 신앙으로 지금까지 일평생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어찌 그 하나님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하루에도 몇번 요셉을 그의 무릎팍에 앉히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얘기를 해주지 않았을까? 어린 요셉의 가슴 깊이 새겨진 하나님의 이미지는 야곱에 의해 완성된 것이었으리라. 환난과 역경 중에서도 요셉은 그 선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을 갈구했을 것이다.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요셉의 일생에 같이 하시어, 그의 마음 가운데 선함을 창조하시고 그의 악한 환경을 선으로 변화시켜 주셨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직함이었으리라. 야곱이 못다한 아쉬움.. 그것은 정직함이었다. 그의 전반기 인생은 속고 속임 당하는 부끄러움의 연속이 아니었는가? 처음부터 정직함이란 그의 마음 속에는 아예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러기에 노년의 그가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정직함이 아니었을까? 야곱이 요셉에게 이렇게 들려주지 않았을까? “아들아, 너는 이 애비가 살아온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네 마음의 깊은 곳까지 감찰하시는 분이 아니냐? 너는 철두철미 정직해야 한다. 다른 이들은 무론하고 너 자신조차도 속이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 가거라.”
요셉의 어릴적 행동을 보면 야곱의 말대로 정직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시껄렁하고 이상한 꿈조차 그는 숨기지 않았다. 꿈을 고해봤자 형들의 미움만 살 것을 알면서도 정직하게 그가 꾼 꿈을 그대로 알렸다. 또한 형들의 과실을 아버지에게 고했다.(창37:2) 자고로 고자질은 어떤 형태든 환영을 받지 못한다. 특히 고자질 당하는 본인들은 오죽했겠는가? 요셉은 형들의 미움 살 짓만 골라서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자질을 아버지 입장에서 보자. 이것은 정직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야곱은 이같이 쥬니어 야곱인 요셉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모태신앙이 만능은 아니지만, 어릴적부터 부모의 신앙으로 교육받은 모태신앙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다. 보디발의 아내를 물리친 그 위력은 얼마나 대단한가?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 속에 선과 악의 확실한 선을 그어 주셨다. 선은 주님으로부터의 출발이요, 악은 나로부터의 출발이지 않은가? 아담과 하와가 따 먹은 선악과처럼, 보디발의 아내는 그가 생명을 걸고서라도 넘어서면 안될 금단의 실과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배워왔던 선하신 하나님과 정직의 가치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만큼 그 가치에 진정 올인한 것이었다.
둘째, 요셉에게 주신 형통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복(福)이 아닐까 싶다. 복 받는다는 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것이 형통의 복이라면? 내가 가는 곳마다 형통이 넘친다, 문제는 없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복이 넘친다. 게다다 나만 알 뿐 아니라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가 형통의 복을 받았음을 안다. 이것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던 요셉에게 그대로 벌어졌던 일이 아닌가? 크리스쳔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요셉이 누렸던 형통의 복을 다 받아 누리기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창세기39장에서 요셉에게 주신 형통의 복을 가만히 살펴보면 두 가지로 구분이 됨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 형통의 종류는 두가지가 있다. ‘형통한 자’(2절)와 ‘범사에 형통’(3절)한 두가지다. 사람이 형통한 것과 일이 형통한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다. 요셉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형통의 복은 진정 무엇일까? 나는 둘 중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우선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다. 이것이 외양적으로 나타난 결과가 무엇일까? 주인인 보디발이 보기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으므로 그가 범사에 형통한 것을 목격했다. 보디발이 그 집 전체 살림살이를 맡기자, 요셉에게 주신 형통의 복이 그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까지 미쳤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사실인가? 사실(Fact)은 요셉이 형통한 자였는데, 외양적으로 비친 것은 요셉이 하는 일이 형통한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내가 형통한 자가 되야 하는가, 아니면 내가 하는 일이 형통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더 원하는가? 솔직히 나는 스스로 형통한 자가 되기 보다는, 남이 보기에 내가 하는 일이 형통하게 보이는 것을 더 원해왔지 않은가? 이것이 세칭 형통하다는 정의가 아니었는가? 그렇지만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형통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진정한 형통의 복은 내가 형통해야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일이 형통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4절) 형통은 은혜를 입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님 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직장의 상사와 동료에게 나는 은혜를 입고 있는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요셉은 보디발을 섬기되 하나님께 하듯이 섬겼다는 말이 아닐까? 나는 정말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께 하듯 하고 있는가?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요셉이 누린 형통은 결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형통한 자 요셉을 통해 혜택을 받은 사람은 엉뚱하게도 그의 주인인 보디발이었지 않은가? 보디발의 집과 소유가 복을 받았고, 그에 따른 수혜자는 요셉이 아닌 보디발이었다. 물론 요셉도 가정 총무로 승진(?)이 되어 몸과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종의 신세를 면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가 바랬던 것은 아버지가 계신 고향 땅으로 하루빨리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는가?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형통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더 비참한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이것이 정말 요셉에게 주어진 형통일까?
그렇다.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었다. 그가 형통한 원인은 단 하나였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다.(2절) 그리고 그 형통은 요셉 자신을 위한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표징으로서의 형통이었다. 그 형통은 요셉 자신을 복되게 해 준 것이 아니라 그의 주위를 복되게 해 주었다. 다시 말해, 내가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나 자신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복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받는 것이다. 나는 형통함의 축복만 받으면 된다. 왜일까? 이미 형통 그 자체가 주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형통은 무엇일까? 형통은 주님의 선하심이 내게로 흘러들어, 내가 주님의 선하심의 영향력 아래 온전히 놓여지는 것이라고 묵상한다. 요셉이 그랬듯이, 선하신 주님께 은혜를 입어 주님을 닮아감으로,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하게 된다.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심, 이것이 곧 나의 형통이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주님의 선하심이 내게로 전가되어 내 속사람이 선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복 중의 복이 아닐까? 주님 자신과 주님의 선하심 이외에 내가 더 바랄 복이 있겠는가? 내 주위에 주님의 선하신 영향력이 미치고 내 주위가 그로 인해 복을 누리게 된다면? 아, 이것이 형통의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형통은 빛과 같은 것이라고 묵상한다. 빛은 빛 자체로서 이미 충만하다. 그래서 빛 외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빛은 비추기 위해 존재한다. 다른 이들을 비추고 복을 끼침이 빛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형통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셋째, 내 인생은 선하신 설계자에 의해 계획되고 설계되었다.
요셉의 일생을 보면서 인생의 설계자되신 하나님을 본다. 설계자이시되, 선하신 설계자이시다. 요셉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의 주연은 물론 요셉이다. 그의 형제들, 보디발과 그 아내, 바로와 애굽 관원들은 모두 조연이었다. 그러나 각본없는 드라마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위대한 드라마의 집필, 편집, 각색, 연출, 감독 등 모든 것을 기획하시고 집행하신 그분의 손길을 느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주연같은 조연인 요셉의 형제들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그들은 분명 요셉에게 악을 행하였다. 그들이 괴로와하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에 애통함을 느낀다. 13년간이나 되는 기나긴 세월의 아픔이자 고통이었다. 정죄함에 시달리면서 인생을 그렇게도 어둡게 살아왔던 그들.. 누가 더 고통을 당했을까? 요셉일까, 형들일까? 단언컨대, 형들의 마음 고생은 요셉과 비교해 만만치 않았으리라. 아버지 앞에서 제대로 고개를 들 수도 없고, 눈동자 같이 살피시는 하나님은 감히 바라볼 수도 없었다. 아, 얼마나 기나긴 회한의 세월이었던가.. 이 모든 것이 동생에게 행했던 한 순간의 못된 짓 때문이었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그 동생이 버젓이 살아있고, 그것도 대국의 총리가 되어 이제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동생의 눈물도 보았다. 모든 것이 해피엔딩이지만 형들의 입장에선 아직도 불안하고 두렵기만 하다. 동생의 지난 13년간의 눈물, 그 서럽고 억울했던 종살이와 옥살이 얘기도 들었다. 과연 동생이 그들의 과오를 진심으로 용서해 주었던 것일까? 이제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부친 야곱도 죽었으니, 동생의 복수가 이어질 것이 아닌가?
이것이 요셉에 대한 형들의 기대치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복수라는 것이 어떻게 왔을까? 용서함으로 왔지 않은가? 그것도 단순한 용서가 아니다. 감동의 눈물과 진심어린 위로와 함께 온 선한 용서였다. 어떻게 요셉이 그리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기획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45:5)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45:8)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45:9) 요셉을 처음부터 끝까지 인도하신 분은 다름아닌 선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선하신 그분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미리 정해지고 설계되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형들의 악함은 물론 나쁜 것이고, 정죄와 심판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은 이러한 악행 조차도 당신의 온전하신 설계에 따라 선으로 바꿔 놓으신다. 요샙의 신앙 방향은 설계자 하나님을 향한 해바라기였다. 그의 하나님은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선한 설계자 하나님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시25:8) 먼 훗날 다윗의 고백이다. 선하심과 정직함.. 이것이야말로 요셉이 어릴 적부터 교육받고 훈련받은 그의 모태신앙의 기반이 아니었는가? 아, 선하시고 정직하신 하나님!
그러기에 바울도 선언했지 않은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선은 피곤함을 모른다! 내가 ‘갇힌자 신앙’을 처음 접했던 시점은 2006년 7월경이었다. 그때 당시 갇힌자 요셉을 처음 성경에서 만났을 때, 참으로 안타까와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것은 요셉의 13년 고생의 기간 중 마지막 2년의 암울한 세월에 대한 것이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야속하게도 요셉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요셉으로 하여금 2년의 허송세월(?)을 더 감옥 속에서 보내게 만들었다. 하루, 이틀, 사흘, 한달, 두달, 석달, 일년, 이년.. 이제나 저제나 술 맡은 관원장에게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인내의 시간은 만2년이나 더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2년의 세월이 하나님의 선하신 설계하심으로 인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온다. 그것은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지막 훈련의 시간이었다. 만일 그때 술 맡은 관원장에 의해 그가 감옥에서 바로 구출이 되었다면? 요셉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그 관원을 더 의지했지 않았겠을까? 요셉은 억울함을 신원하고자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지 않았겠을까?(40:15) 그렇다면 바로의 꿈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이주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 그 마지막 2년의 암흑의 세월은 요셉의 훈련을 최종 완성시키는 보약이었다.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요셉의 이야기를 좀더 구속사적 관점에서 역사적 반경을 넓혀본다. 하나님의 설계하심은 이미 일찌감치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창15:13) 아브라함의 후손을 애굽으로 이주시키고 그 곳에서 400년을 지내도록 계획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이 다른 이민족들과 잡혼을 하지 않고 하나님 한분만을 경배하는 민족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가장 최선의 방책은, 그들이 강성해지기까지 안전하고 고립된 지역에서 자신들만의 신앙세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그들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애굽의 고센 땅으로 이주해야 했다. 이것이 요셉이 한 일이지 않은가? 아니,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지 않은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내 인생도 선하신 설계자에 의해 계획되고 설계되었다. 그것을 내가 인식하든지 인식하지 못하든지 간에, 나를 향한 주님의 선하신 계획과 설계는 변함이 없다. 선하신 주님께서 나를 향하신 뜻은, 모든 것이 끝까지 합력하여 그분의 선을 최종적으로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향한 주님의 열심이시다. 그리고 그 주님의 설계는 한점 오차도, 한치의 오류도 없이 계획된 대로 이루시고 시행하신다. 아, 선하신 설계자! 선하신 하나님!
적용
첫째, 모태신앙으로 출발한 내 가족들(아내, 딸, 아들)을 위로해 주고 격려하겠다. 그들과 내 깨달음을 나누고 모태신앙의 중요성과 자긍심을 나누도록 하겠다.
둘째,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형통함이 내 안에서 지속되도록 기도하자. 그 선함과 형통이 빛되신 주님을 따라 내 안에서 자라가도록 내 마음의 정원을 가꾸자. 나로부터의 시작은 악이요, 주님으로부터의 시작이 선임을 늘 기억하자. 정직한 마음을 늘 새롭게 해 달라고 간구하자.
셋째, 선하신 설계자되신 주님을 찬양한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고백한다. 이것이 진정한 분깃신앙의 첫발이다. 주님만이 나의 분깃임을 잊지말자.
기도
주 하나님, 주님의 선하심과 정직하심을 인하여 찬양을 올립니다. 제 안에 선함을 창조하시기 위한 주님의 열심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설계자되신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저로 주님 안에서 형통케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 마음에 주님의 흔적과 향기가 더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사랑이 더 비춰지게 하옵소서. 주님의 통치하시는 영역이 더 많아지게 하옵소서. 제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제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 주님으로 시작하고 주님으로 끝나게 하옵소서. 주님만이 나의 분깃이십니다. 예수님의 존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