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대의 가슴 속에 맺히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무엇으로 맺히는가.
흔적..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맺힘.
바로 사무침이다.
-안도현님의 ‘봄날, 그리운 첫사랑’에서-
사무침은 어느 한 곳에 깊이 스며 들거나 멀리까지 미치는 것이다.
어떤 일이나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극한점이다.
그 막다름에 이르러 넘쳐 흐르고 끓어 오르다 못한 절절함이다.
사무침은 알알이 맺힌 내 가슴앓이를 비통스레 토해내는 아쟁산조이다.
내 가슴에서 그 분에게로 전이가 가능한 소통 수단이다.
죄인된 내가 거룩한 그 분을 만나뵐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이다.
기쁨이 넘치면 흥이 되고,
흥이 사무치면 춤추는 막가파가 된다.
하나님의 궤 앞에서 신명나게 춤추었던 다윗처럼.
슬픔이 거세지면 눈물이 흐르고,
눈물이 사무치면 절규의 기도자가 된다.
성전에서 술 취하듯 읊조렸던 한나처럼.
바람이 커지면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이 사무치면 절대적 갈망이 온다.
모년에 아기 예수를 해후했던 시므온과 안나처럼.
병이 길면 고통이 잦아오고,
고통이 사무치면 무대뽀 짝사랑이 된다.
그 분의 옷자락을 겁도 없이 만진 혈루증 여인처럼.
들음이 많아지면 마음 속 새김이 되어가고,
새김이 사무치면 믿음의 아버지가 된다.
모리야 산에서 아들을 바쳤던 아브라함처럼.
사무침은 내 쪽에서 할 일을 다했다는 마침표이다.
아니, 사무침은 새로운 반전으로의 연결점이자 도약점이다.
그러기에 사무침의 끝자락에는 그 분의 옷자락이 놓여있다.
이 땅에 오셨던 그 분은 내 사무침의 영원한 모델이다.
그 분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진실하심과 선하심의 사무침이다.
십자가는 그 분이 이루신 사무침의 극치이다.
그 사무침의 눈물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사로를 향하여
아, 못난 나를 향하여..
그 사무침의 기도가,
올리브를 압착해 기름 짜듯 핏방울로
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사무침의 수치가,
침뱉음과 뺨맞음, 조롱과 굴욕
아, 발가 벗겨짐..
그 사무침의 고통이,
물같이 쏟아짐과 어그러짐
아, 녹슨 세개의 못으로..
그 사무침의 단절이,
친인들과 제자들로부터
아, 아버지로부터..
끝내 그 사무침의 절규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러나 이제 나는 알았다.
그 분의 그 사무침이
영광의 사무침으로 이미 승화되었음을.
그러함으로
그 분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속속들이 사무쳤음을.
그러하기에
그 분의 그 사무침이
내 가슴에 거룩한 생채기 되어 맺혀 있음을.
그 분이 새겨주신 이 사무침의 흔적들을
나는 더 알아가고 싶다.
나는 더 간직하고 싶다.
**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시36:5)
(후기)
갑작스레 주중에 시 아닌 시 한편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일 독일 한마음교회의 설교 말씀 제목이 그리움이었습니다.
그리움을 생각하며 사무침이라는 단어가 제 심령을 울렸습니다.
그리움의 익스트림(Extreme)이 사무침이니까요.
한국인으로서의 한(恨)이라는 개념이 사무침의 진수이니까요.
사무침이 없었던들 제가 어찌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무침이야말로 주님을 향한 나의 가장 멋진 소통 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표현이 제 가슴에 맞닿았습니다.
다윗, 한나, 혈루증 여인 등 사무침에 통달(?)한 믿음의 선진들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가 사무침의 모본이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십자가는 그 사무침의 클라이막스이겠구요.
시36:5의 사무침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여러 사무침들이 제 가슴에 도도히 밀려왔습니다.
아, 내 마음에 새겨진 거룩한 생채기....
이 사무침의 흔적을 더욱 잘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고난과 절망의 막다름에 이른 분들을 내내 생각하며 이 글을 썼습니다.
제 주변에도 여러 분들이 보였습니다.
사무침의 절절함을 통과하셨거나 통과 중인 분들입니다.
이 분들을 제가 굳이 어줍잖게 위로해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사무침의 대가(!)이신 주님의 위로와 터치하심이 이미 임하셨기 때문이지요.
감사와 샬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