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창4장] 가인의 삶 거꾸로 살기

조회 수 914 추천 수 67 2012.01.29 23:11:01

본문: 창세기 4:1-17

붙잡은 말씀:
(9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4절)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7절)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또 붙잡은 말씀: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깨달음과 묵상- 가인의 삶에서 나의 삶 엿보기

나는 요즘 주일이 기다려진다. 주일날 예배시에 뭔가 멧시지가 새롭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창세기 4장 가인 이야기다. 담임 목사님의 설교 제목은 실락원이다. 목사님의 말씀을 따라, 성경 말씀을 따라 내 묵상의 흐름도 이어진다. 가인은 나다. 주님을 모시기 이전 나는 가인의 삶을 살았다. 아니, 그 이후에도 나는 가인의 태도를 버리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100% 나를 향한 준엄한 말씀이었다. 죄인으로서 가인의 삶은 주님 안에서 새롭게 된 내 삶의 반면교사이다.

죄를 짓고 난 이후 가인의 태도와 행동에 주목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이 하나님과 대면한 이후의 행동 패턴은, 사실상 모든 죄인들이 똑같이 겪어가는 고통의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결과적으로 몸도, 마음도 하나님을 떠났다.(16절: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이것은 당연한 죄의 결과이다. 죄는 종국적으로 하나님과의 분리를 초래한다.(사59:2) 말씀 속에서 그의 행동 패턴이 구체적으로 세가지 보인다. 9절, 14절, 17절의 붙잡은 말씀이다. 그는 1)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렸고(9절), 2) 죽지 않기를 구했고(14절), 3) 자신의 성을 쌓았다(17절).

첫째,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돌렸다. 하나님으로부터의 회피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이다. 나아가, 이는 진실로부터의 회피다. 숨김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알고서도, 그는 회피적 거짓말을 늘어 놓을 수 밖에 없다. 죄가 죄를 변호한 꼴이다. 여기서 나는 말씀에 질문을 던졌다. Where are you, Satan? 하와의 바로 옆에서 속삭였던 그 사탄은 과연 이 때에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인류 최초의 범죄 때와는 다른 양상이다. 그렇다. 이미 사탄은 가인의 마음 속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본다. 이와 같이 사탄의 활동무대는 나의 바깥이 아니라, 나의 안이다. 전투는 내 안에서 벌어진다. 가인의 마음을 하나님은 이렇게 묘사하셨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고, 죄가 너를 원한다..(7절) 죄의 뒤에 바짝 붙어있는 그가 바로 사탄이다. 사탄은 그렇게 가인의 마음을 움직여, 분노하고 안색이 변하게 하였고, 들에서 동생을 쳐 죽이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가인은 하나님 대신 죄와 사탄의 유혹을 택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안타까운 선택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돌렸다.

둘째, 그는 죽지 않기를 구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걸했다는 이야기다. 목숨이 얼마나 중요한가? 죽으면 만사휴의, 그러니까 무조건 살고 봐야지. 일단 살아야 그 다음 뭐라도 할 수 있을거야. 아, 죽음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인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구차하다는 말을 쓸 필요는 없다. 어찌보면 생존본능이야말로 죄인된 인간에게 주어진 최대의 무기이니까. 그러나... 그가 이렇게 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또는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이같이 베드로나 세리처럼 눈물의 회개가 그에게 있었더라면.. 목숨을 구걸하기 이전에 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죽지 않기를 구하는 것은 절대 회개가 아니다. 차라리, 그가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구했었더라면.. 지금이라도 돌렸던 그의 얼굴을 다시 되돌려, 하나님께 죽음의 속죄를 구했었더라면..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 아, 하나님 앞에서의 죽음이 진정한 자유의 시작임을 그가 알까?

셋째, 그는 자신의 성을 쌓았다. 축성은 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최선의 수단이다. 성은 견고할수록, 그리고 성벽이 높을수록 좋다. 외부로부터의 철저한 차단이다. 그의 목적은 뻔하다.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완전히 피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다. 그가 만든 성 이름은 가인성이 아닌 에녹성이다. 이름 조차도 철저한 방어적 본능이 숨겨있다. 또한 아들에게까지 그의 유전적 본능이 가감없이 전달됨을 본다. 나도 가인처럼 견고한 성을 쌓았다. 밖에서 어떤 공격이 와도 끄떡이 없을 정도의 성을 쌓느라고 밤낮으로 노력에 노력을 기울였다. 어느 시점에 보니까, 내가 쌓은 방어기제는 아주 훌륭해 보였다. 내가 만든 성벽은 탄탄하고 높아서 웬만한 공격에는 꿈적도 않을 견고함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다. 내 방어기제는 나를 전혀 보호해주지 못했다. 공격의 화살은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적은 바로 ‘나’였다. 자아 또는 옛사람이라고 불리우는 이 지긋지긋한 존재가, 사탄의 꾀임으로 나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쌓았던 성은 오히려 이들의 죄된 속성을 더욱 강화시켜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렸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가인의 이런 외침이 또한 나의 외침이었다. 이같이 내가 쌓았던 자아의 철옹성은 무너뜨리기도 어려웠다.


적용- 제자의 도: 가인의 삶 거꾸로 살기

참 신기한 일이었다. 가인의 삶에 투영된 나의 일그러지고 비참하고 무모했던 삶의 패턴들을 되내이며, 나는 눈물 지음과 함께 크나큰 심령의 위로를 받는다. 오, 십자가 주님! 주님이 내 삶의 해답임을 감사한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인은 나의 반면교사다. 가인의 삶을 교훈으로 삼아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즉, 가인의 삶을 거꾸로, 반대로 살면 되지 않겠는가? 이 생각을 할 때 퍼뜩 뇌리에 스쳐가는 말씀이 있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유명한 제자의 도에 관한 말씀이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16:24)

억, 제자의 도와 가인의 삶이 무슨 관련이 있어? 다시 차근차근 들여다보니, 가인의 삶을 거꾸로, 반대로 하면 제자의 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아, 말씀의 신기함이여.. 거꾸로 함은 돌이킴이자 회복의 길이다. 어찌 이렇게 연결이 된단 말인가? 내가 발견한 연결점은 이렇다.

1) 제자: 자기를 부인함 – 가인: 자기만의 성을 쌓음
2) 제자: 자기 십자가를 짐 – 가인: 죽지 않기를 구함
3) 제자: 주님을 따름 – 가인: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림

억지로 짜 맞춘 것이 아니다. 가인을 따라 묵상하다가 갑작스레 다가온 예수님의 말씀이 구슬처럼 서로 연결된 것이다. 이제 각 구슬들을 나의 적용으로 꿰어본다.

첫째, 나의 성을 부수자. 내가 만든 자아의 철옹성은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부숴질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나의 성을 공격하자.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력이라”(고후10:4) 매일 마음의 파산을 경험하자. 주님을 향한 가난과 애통, 주리고 목마름이 나의 가장 큰 양식이다. 내가 만든 이전의 방어기제를 100% 외부에 개방하자. 나에게 ‘자기’는 아예 없다. 이것이 종국적 ‘자기 부인’에 대한 나의 목표이다.

둘째, 죽기를 구하자. 하나님 앞에서 죽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것이다. 내 십자가는 원래 내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었다. 주님께서 지셨던 그 십자가를 나도 똑같이 지는 것이다. 내 십자가는 쉽고 가볍다. 왜냐하면 모든 무거운 것은 주님께서 이미 다 처리하셨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까지 가자. 그 곳에서 주님과 함께 나도 올려지고, 못 박히고, 피 흘리고, 죽고, 장사까지 아예 다 지내자. 이것이 세례(침례)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6:3) 한 번만 죽으면 되는가? 아니다. 매일 죽자. 매 순간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시도록 내 자아의 죽음을 구하자. 이것이 주님의 두번째 명령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임을 믿는다.

셋째, 주님의 얼굴을 구하자. 주님을 따름은 주님의 얼굴을 밤낮으로 구하는 것이다. 주님을 향하여 내 얼굴을 돌리자. 내가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을 넘어서, 주님이 내 안에서 사시도록 하자. 그래서 내 모든 삶을 ‘주님으로’ 살자. 그럼, 예수가 다냐? 맞다, 예수가 다다. 내게 예수 외에 다른 자랑거리는 아무것도 없다. 주님, 영광 받으세요.. 내 안에 계신 주님께 매순간 그렇게 외치자. 그 영광의 얼굴을 내 수건없이 바라보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으니라.”(고후3:18)


기도

나의 주 나의 예수님,
가인을 통해 보여주신 제 옛사람의 모습을 보며 울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마냥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다른 여러 분들의 눈물 지음이 함께 있어 더 좋았습니다.
예,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주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처절하고 불쌍했던 가인의 삶을 거꾸로 살겠습니다.
내 안의 성을 부수고, 죽기를 구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겠습니다.
그리 함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이 멋진 제자의 도를 주님의 도우심으로 제 안에서 이루겠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되찾은 내 생명으로 여기겠습니다.
주님, 주님으로 살아 가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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