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자 신앙을 들어가면서
‘갇힌자 신앙’은 2006년 웨이브6기 롬폭 훈련소 시절에 겪은 실제적 경험에서 나온 제 절절한 신앙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롬폭에서의 갇힌 자로서 8개월간의 기간을 통해 저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갇힌자 신앙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갇힌 자들은 왜 갇히게 되었고, 어떻게 생활했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신앙했는지, 이것이 제 갇힌자 신앙의 모델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갇힌 기사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갇힌 자라 할 수 있는 요셉, 진흙 구덩이 속에 갇혔던 예레미야,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에스겔과 백성들,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 예수님을 예비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한 세례요한, 복음 전파를 위하여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 사도 등이 대표적 사례들이지요. 이 분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행위로는 감옥에 갇힐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고, 또한 뜻하지 않게 고난을 당했다는 것이지요.
롬폭에 갇혔던 제 처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엔 롬폭까지 끌려온 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억울하게(?) 고난당했던 욥의 경우와 인과응보를 당한 야곱의 경우는 엄연히 달랐습니다. 나는 욥의 경우인가, 야곱의 경우인가 자문했습니다.
저는 야곱의 경우였습니다. 법적으로는 제 자신이 유죄 인정을 했고, 판사의 판결도 거쳤습니다. 단지, 8개월이라는 형기가 조금 길다고 생각되었을 뿐이지 제 범법 행위에 대한 벌을 받은 것입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속임도 불사했던 야곱의 경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한 일에 대한 응분의 옥살이를 살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유와 과정을 막론하고 저는 갇힌 자였습니다. 갇힌 자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보다 높거나, 나와 같은 처지인 수감자들이었지요. 내가 제일 낮은 사람입니다. 교도관의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것이 수감자들의 인생입니다. 낮은 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갇힌 자의 소망은 자유의 바깥 세계로 언제 나갈까 기다리고 손꼽아 보는 것입니다. 이는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다가올 천국 소망을 바라보며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구하듯이, 밤을 지새운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림 같이, 갇힌 자는 자유의 날을 갈구합니다. 그래서 갇힌 자의 시간은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입니다.
갇힌 자는 또한 무언가에 매여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소개할 때, 갇힌 자라는 표현과 함께 ‘매인 자’라는 표현을 자주 썼습니다. 제 주위의 동료 수감자들 중 많은 이들이 중독자 인생이었습니다. 술, 마약, 도박, 담배 등 그들은 뭔가에 매여 있었습니다. 롬폭 캠프의 수감자들은 또한 보이지 않는 바운더리(Boundary)에 매여져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멍에에 그들은 찌들어 있었습니다. 저도 뭔가에 매였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주신 ‘갇힌 자 신앙’이라는 포승줄에 매였습니다.
성경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성경에 나타난 갇힌 자들을 읽으면서 저는 세 번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제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동병상련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앞으로 이 갇힌 자 세 분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롬폭에 갇혔던 제 마음의 스승들입니다. 그 분들은 요셉, 바울, 그리고 스스로 갇히신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갇힌자 요셉
요셉의 생애만큼 드라마틱한 반전은 아마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족장 아버지의 가장 사랑받는 아들로서 채색옷을 입고 지내다가, 형제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 종살이 하고, 이후 억울하게 옥살이 하다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기까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를 ‘꿈꾸는 자’로 칭했습니다. 저는 거기에 더하여 요셉의 별명을 ‘우는 자’로 짓고 싶습니다. 성경의 기사 중 가장 많은 횟수로 울었던 사람이 요셉이었으니까요. 그가 울었다는 대목이 무려 8차례나 나옵니다. 그의 울음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정(情)과 한(恨)이 많았던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를 배반하고 종으로 팔아버렸던 형들 때문에 5번을 울었고, 그의 아버지 야곱으로 인해 3번 울었더군요. 그 ‘우는 자’ 요셉 때문에 저도 그를 따라 울었습니다. 아무튼 요셉이 왜 이렇게 많이 울게 되었는지는 그의 과거를 추적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하고 옥에 갇힌 기간이 각각 얼마인지는 성경 상에 명확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가 종으로 팔려간 시점이 17세인 소년 시절이었고(창37:2), 30세에 총리로 등용이 되니까(41:46), 그 사이 13년의 기간이 고난의 시간이 됩니다. 제 추측엔 감옥에 갇힌 시점은 20대 중반 정도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의 준수한 용모를 보고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정도의 나이일 것입니다. 그러면 대략 종살이 8년에, 옥살이 5년 정도 하여 13년이 되겠네요.
하여튼 제 관심은 그가 종살이 할 때부터입니다. 8년여간 보디발의 종으로서 그의 생활은 아주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어 모든 일에 형통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점부터는 온 집안의 총무로서 모든 일을 책임집니다.
유혹은 편안할 때 오기 마련이죠.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이 옵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요셉은 모든 남성들의 귀감(?)이 됩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요셉과 같은 자세로 뱀의 유혹을 물리쳤다면.. 요셉의 선악과는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그는 하와와는 달리 금(禁)한 것의 근원적 이유를 알고 있었지요.(39:8-9) 그는 또한 죄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즉, 죄는 사람에게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짓는 것이지요. 그녀를 금한 사람은 보디발이었지만, 그녀를 범하는 죄는 하나님께 짓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죄를 피하기 위한 모든 희생을 각오했습니다. 죄를 피함으로 인해 감옥행을 감수해야 했던 거지요.
때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가혹합니다. 형통하다고 해서 받을 고난과 역경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고난과 연단을 통해서 나의 믿음이 자라나고 성숙해지기를 하나님은 묵묵히 기다리십니다. 요셉은 이제 갇힌 자가 되었습니다. 5년여의 짧지 않은 세월을 그는 갇힌 자로서 조용히, 묵묵하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물론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의 형통하심이 그와 함께 하셔서 죄수들의 행정 처리를 포함한 옥중 제반사무를 요셉이 다 처리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요셉을 어떻게 단계적으로 훈련시키시는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가정 총무 일을 함으로서 경제에 대한 전반을 익혔습니다. 감옥에서는 죄수들과 전옥 사이에서 사람들을 다루는 법, 즉 정치를 배웁니다. 이렇게 훈련이 됨으로써, 그는 애굽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경제와 정치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요셉은 작은 일에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충성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큰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므나 비유에서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열 고을 권세를 주신 것과 마찬가지지요 (눅 19:17).
그러나 그 훈련의 기간이 요셉에게는 길고도 길었습니다. 갇힌자 요셉은 옥중에서 바로의 두 관원을 만납니다. 요셉이 꿈을 해석해 준대로, 둘 중에 술 맡은 관원만이 출소하여 복직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도와준 요셉과 그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간청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것도 2년 동안이나..
그렇게 2년의 세월이 더 갑니다.(41:1) 이제나 저제나 외부에서 소식이 있기를 2년동안 기다렸다니! 목이 타오르고 피가 바짝 마르는 요셉의 심정을 아십니까? 8개월도 힘들어서 롬폭에서 날짜를 하루하루 세고 있었던 제가 단언합니다. 요셉의 5년 여간의 옥살이, 그 중에서도 후반의 2년이라는 세월은, 30세 출소 이후 그가 죽는 110세까지 나머지 삶의 기간과도 맞먹는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을 만났을 때 울었습니다. 13년 만에 만나는 형들에 대하여 그는 적어도 복수심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세월의 풍상 속에 쌓인 정(情)에 대한 그리움과 한(恨)은 지울 수가 없었겠지요.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그는 고난 중에, 갇힌 장의 생활을 통해 깨달았을 것입니다.(45:5,8) 그러나, 그 깨달음과는 엄연히 별다른 그의 ‘감정적’ 눈물을 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을 만났을 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을 팔아먹은 형들이 그 악한 행위를 뼈저리게 회개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형들을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의 세 번째 눈물은 바로의 궁정에까지 들리도록 목 놓아 방성대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울음은 카타르시스의 눈물입니다. 그의 울음은, 기나긴 고난과 갇힘의 세월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활활 태워버리는 카타르시스였음을 저는 절절히 느꼈습니다.
요셉의 갇힌자 신앙은 그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됨으로 결실을 이룹니다. 여기서 또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출세했다고 해서 이후에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그의 본래의 자세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형들에게 한결같은 동정과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권력자의 평안에 안주하지 않고 그는 죽은 후에 신앙의 터전인 가나안 땅에 묻기를 원했습니다. 갇힌 자로서 그는 철저하게 갇힌자 신앙의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울이나 솔로몬과도 비교가 됩니다. 왕이 되기 전 그리도 겸손했던 사울이 권력의 맛을 안 이후 달라진 모습과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솔로몬도 어찌보면 초기의 뜨거웠던 신앙이 식으면서 말년에 우상숭배를 하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꿈꾸는 자, 우는 자 요셉을 통해 갇힌자 신앙을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열정을 잃지 않았던 요셉의 모습을 본받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