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묵상 2012.8.20 눅13:10-21 <중심을 보시는 눈>
(붙잡은 말씀)
예수께서 보시고...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12-13절)
....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16절)
18년 동안 귀신 들려 앓으며, 허리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한 회당에서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그녀의 상태를 알아 보셨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그녀..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먼저 선언하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그녀를 안수하심으로 병마에서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그녀를 가두었던 귀신이 쫓겨가고 허리가 꼿꼿이 펴지며,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요.
본문 속에서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의 눈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눈은 믿음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내가 보는 눈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 예수님의 눈을 나도 배우기 원합니다. 보혜사 되어 주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가능합니다.
나의 눈은 나타난 그대로 봅니다.
외양적으로 보여진 덧그림이지요.
나의 눈은 귀신들린 한 여자를 봅니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눈은 그녀의 중심을 보시지요.
내면적으로 보이는 밑그림이지요.
첫째, 그녀가 '아브라함의 딸'임을 보십니다.
둘째, 사탄이 그녀를 매이게 했음을 보십니다.
겉사람보다는 속사람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대개 겉과 속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세상도 겉과 속이 다릅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만이 그 속을 보시지요.
이어진 천국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자라난 겨자 나무를 보지만,
예수님은 자라게 한 동력인 겨자씨를 보시지요.
천국을 향한 나의 믿음은...
다 자란 겨자 나무를 통해서
그 안에 숨겨진 겨자씨를 보는 눈입니다.
나는 크게 부풀어 오른 가루 서 말을 보지만,
예수님은 부풀게 한 누룩을 보시지요.
천국을 향한 나의 믿음은...
부푼 가루 서 말을 통해서
그 안에 숨겨진 누룩을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순서도 재미있습니다.
내가 배울 믿음의 '순서'입니다.
1) (중심을) 보시고..
2) (담대히) 선포하시고..
3) (그대로) 행하심
내 눈을 들어 주께 기도합니다.
주님, 나의 중심을 주님께 드립니다.
나와 함께 하셔서
나로 주님을 더욱 보게 하옵소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을 오늘도 배우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믿음대로 행하게 하옵소서.
**
(부록: 이전에 쓴 비슷한 내용이 있어 부록으로 붙입니다.^^)
밑그림과 덧그림
독일 첫 주재 시절인 1990년 어느 시점에, 가족들과 함께 파리 소재 루브르 박물관에 간 적이 있습니다. 봐야 할 것이 많았지만, 제게도 단연 놓치면 안 될 것이 모나리자 그림이었지요. 여러 회랑을 거치고 거쳐 모나리자가 전시되어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의 그 실망이란! 우선 그림이 생각보다 훨씬 조그마했고 그나마 높은 데다가 아예 두터운 유리 박스 속에 잠겨져 있었습니다. 또한, 다른 데는 한산했던 곳이 이곳은 시장터를 방불할 정도로 북새통이었습니다. 그래도 볼 수는 있었기에 까치발을 하면서 열심히 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왜 모나리자를 보려면 루브르에 가야만 했을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 원본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원본을 봐야만 진정한 작품성과 예술성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전문가들도 원본을 봐야지만 작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밑그림’을 볼 수 있겠지요. 모나리자의 모조품이나 복제품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이 중 일반인이 보기에는 원본과 차이가 거의 없는 모조품도 꽤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인정한 원본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다빈치가 원래 그렸던 ‘밑그림’이 있는 그 그림이 진짜이지요. 그의 혼과 나아가 성품이 담겨져 있는 그림은 오직 한 장, 루브르에 있는 그 그림 뿐입니다.
어떤 그림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작가는 구상을 먼저 합니다. 다음에 이 구상한 것을 화판에 옮겨 밑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밑그림은 스케치로도 하지만 직접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합니다. 밑그림이 다 완성된 후에야 작가는 한숨을 돌리며 당초 구상하고 기획한대로 잘 되었는지 중간점검을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밑그림 위에 ‘덧그림’을 추가합니다. 세세한 터치와 첨가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밑그림 위에 덧칠을 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하나의 그림이 작품으로 완성이 됩니다.
완성된 그림은 밑그림과 덧그림이 어우러져 보입니다.
일반인은 덧그림을 위주로 보지만,
전문가는 덧그림 뒤의 밑그림을 위주로 해서 봅니다.
일반인은 작품만을 주로 보지만,
전문가는 작품을 만든 작가의 디자인와 의도를 찾아봅니다.
덧그림은 외적으로 그대로 보이지만,
밑그림은 섬세하게 관찰하고 연구해야 드러납니다.
덧그림은 아무나 볼 수 있지만,
밑그림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보입니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덧그림과 밑그림이 나뉘어져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히11:3).
보이는 것
즉, 나타나 있는 것은 덧그림입니다.
그 뒤에 보이지 않는 것
즉, 나타나지 않는 것이 밑그림입니다.
영적 세계의 밑그림은
하나님이 디자이너이자 작가이십니다.
비젼의 믿음은
그 밑그림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비젼의 믿음은
덧그림의 속과 뒤에 숨겨있는
밑그림을 찾아내어 보는 것입니다.
비젼의 믿음은
겉으로 나타난 현상세계가 아닌,
그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그 분의 뜻을 쫓는 것입니다.
밑그림 속에 깃들어 있는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을
깨닫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민수기 13장에 나타난 이야기를 예로 들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 중에 가나안을 정탐할 정탐꾼들을 보냈습니다. 돌아온 12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내용이 10명과 2명으로 갈라집니다. 10명은 덧그림만을 보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의 2명은 덧그림뿐만 아니라 밑그림까지 보았던 것입니다.
덧그림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드러난 사실(Fact)입니다.
가나안의 덧그림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크다.
장대같이 큰 아낙자손도 살고 있다. (민13:27-28)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민13:31)“
밑그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비젼의 믿음만이 가나안의 밑그림을 봅니다.
비젼의 믿음만이 밑그림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민14:8-9)“
이스라엘 백성은 덧그림만 보고 온 10명의 정탐꾼들을 더 신뢰했습니다. 민주주의의 병폐인 ‘다수결의 원리’를 따른 것이지요. 밑그림도 같이 본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백성들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허사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광야에서의 죽음의 길을 스스로 택했습니다. 밑그림을 볼 수 있는 비젼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비젼의 믿음을 가진 여호수아와 갈렙은 광야에서 살아남아 영광스런 가나안 땅을 밟게 됩니다. 디자이너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만큼 그들의 믿음도 커지는 법입니다. 그들이 본 밑그림대로, 하나님은 그들을 지도자로 삼으셔서 신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힘이 강하나 하나님이 없는 가나안 땅의 족속들을 파죽지세로 물리칩니다. 강한 것처럼 덧그림으로 보였던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의 ‘밥’이었습니다.
QT묵상 2012.8.21 눅13:22-35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붙잡은 말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24절)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3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2b, 33절)
본문을 대하면서 두가지 의문점이 다가 왔습니다.
1) 문이 먼저일까, 길이 먼저일까?
2) 32절에서는 오늘과 내일을 말씀하시고, 그 다음 절엔 오늘과 내일과 모레를 말씀하신 시간적 의미는 무엇일까?
첫번째 의문- 문이 먼저일까, 길이 먼저일까? 말씀 속에서 조명해 볼 때, 아무래도 문이 먼저인것 같습니다. 본문에서도, 전반부에서는 문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문은 안과 밖을 이어주는 관문이지요. 인사이더(Insider)와 이웃사이더(Outsider)를 가름하는 잣대입니다. 그러기에 문의 안과 밖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본문의 문은 천국을 향한 구원의 문이겠지요. 문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열려 있었습니다. 오, 은혜... 나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 열어주신 구원의 문으로 들어 갔습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었음을 송구함과 감사함으로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문이 한정없이 열려 있는 것은 아니지요. 어느 시간이 지나면, 그 문은 닫힙니다. 닫힌 후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내가 전도와 말씀 전파에 힘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을 지난 다음에는 곧 바로 목적지(천국)가 나올까? 그렇지 않겠지요. 우리네 인생의 남은 시간을 아직도 이 땅에서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길이 나옵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그 길은 넓고 아름답고 평탄한 길일까? 그 반대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존 번연은 이를 천로역정(天路歷程)이라고 표현했지요. 천국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의 길과는 한가지 큰 차이점이 있지요. 나 혼자, 내가 홀로이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그 길을 동행하신다는 이 어마어마한 비밀... 그래서 그 길은 외적으론 가시밭길처럼 보이나, 실제론 쉽고 가볍고 기쁨이 가득한 길이지요. 예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한..
그 좁은 길을 홀로이 개척하신 예수님.. 바로 본문의 후반부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지요. 예수님은 3일 동안의 길을 말씀하십니다.(위의 붙잡은 말씀) 1일차와 2일차에 하신 일은 같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럼 제 3일에는? 완전해 지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 바로 뒤에서, 예수님은 해답을 주십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오늘은 1일차, 내일은 2일차, 모레는 3일째입니다. 모레, 즉 제 3일도 변함이 없이 갈 길을 가야 하신다는 말씀.. 모레 때(3일째)는 완전해 진다고 하셨는데, 동일한 길을 가신다니.. 무슨 뜻일까, 또 의문이 옵니다. 저는 그 해답이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에서의 죽음.. 이것이야말로 완전해지는 길이겠지요. 저는 이렇게 단언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만큼 완전한 것은 없다!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완전함을 향해 가는 그 길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 길을 가야 하리
너는 몰랐더냐?
주님의 안타까움의 눈물을
너는 몰랐더냐?
네 반역과 돌 던짐의 의미를
너는 몰랐더냐?
제 3일의 완전함을
아, 예루살렘!
내 갈 길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주님 따라
나도 가려네
십자가의 그 길을
QT묵상 2012.8.23 눅14:15-24 <내가 초청받은 이유>
(붙잡은 말씀)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7절)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21절)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3절)
어제는 온종일 베를린을 갔다 오느라 하루 노트 쓰기를 쉬었습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평상시와는 관점이라든가, 행동거지가 달라짐을 봅니다. 뭐랄까, 조금 더 열린 마음이 되고 뭔가에 눈을 뜹니다. 일상적인 것들을 훌훌 털어 버리고, 새로움에의 날갯짓을 합니다. 그래서 저도 여행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러한 장면이 나와 한 마디 했습니다.^^
한 도시(Town)에 사는 주인이 잔치를 벌여놓고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첫번째로 초청한 사람들은 미리 초청장이 발부되었고, 종이 그들을 모시러 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어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하였지요. 주인은 화가 나서 종에게 명합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에 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종이 그대로 했지만,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주인이 또 명령합니다. 세번째 초청이지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다음의 세 부류였습니다.
1) 초청받을 자격은 있으나, 참여할 마음이 없는 자 -> 불참
2) 초청받을 자격은 없으나, 참여할 마음이 있는 자 -> 참여
3) 초청받을 자격도 없고, 참여할 마음도 불투명한 자 -> 참여
이제 본문에 나오지 않은 부류들을 또한 생각해 봅니다.
4) 초청받을 자격도 있고, 참여할 마음도 있는 자 -> ??
5) 초청받을 자격도 없고, 참여할 마음도 없는 자 -> 불참
이 잔치 비유는 천국에 초청된 잔치이고(15절), 잔치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4)번의 경우, 저는 의문부호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왜일까? 천국으로 가는 잔치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천국에 갈 자격이 있어." 이렇게 단언할 만한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천국에 갈 자격이 과연 누가 있을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지요. 아무도 없습니다. 스스로 자격을 갖추어 천국 문을 두드릴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같이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는 자도 없으며,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롬3:11-12) 그러므로, 위의 1)번과 4)번의 경우는 해당사항이 없는 거지요. 그들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자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니라,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자'인 셈이지요.
1)번의 경우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봅니다. 이들의 문제는 크게 두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초청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격이 있다고 착각했습니다.(이미 나눴지요)
둘째, 주인의 잔치보다는 자기 일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쁘다 바빠!" 이전의 어느 코미디언이 외쳤던 말이었지요. 일상의 하는 일에 충실하는 것- 이것이 사실 문제였습니다. 밭을 샀기 때문에 바쁘고, 소 5겨리(10마리)를 샀으니 바쁘고, 장가 들었으니 바쁜 것입니다.(18-20절) 노아의 때도 그랬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느라고"(눅17:27) 대홍수의 심판이 임박한 줄을 몰랐습니다. 롯의 때도 그러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느라고" 불과 유황의 심판은 까마득히 잊었습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될 수는 없겠지요. 사탄의 전략이 바로 여기에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을 현실의 삶에 몰두하고 매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인생의 미래가 걸린 일은 귀찮아 하고, '내일 일'로 미뤄 버립니다. 멀티 태스킹, 스피드 문화, 멀티 미디어, 소셜 공유의 시대.. 현대적 문화 코드는 한 마디로 '쉴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2)번의 경우는 어떨까?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 이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당한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꾸며놓은 사회, 문화적 코드에서 벗어난 이들이지요. 바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의지해야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뭔가에 목말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들은 잔치에 참여함이 큰 영광입니다.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넙죽 절하며 무조건 초청자를 따라갈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 이것이야말로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표이겠지요.
마지막 3)번은? 세번째에 해당하는 사람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눈물...ㅠ '강권'당한 사람들이지요. 자격도 없고, 참여할 마음도 불투명했는데, 어디 이상한 데 있다가(?), 막무가내로 끌려 갔습니다. 가 봤더니, 이게 웬걸? 천국 잔치 자리에 초청받은 것이지요. 나도 모르게.... 아무 자격도 없고, 초청받을 이유도 없었는데, 와 보니 그 자리였습니다! 그게 나였습니다. 아무 댓가도 없고, 값도 없이, 거저 받은 은혜이고, 앞으로도 나는 영원히 이 은혜의 채무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저 망연자실, 무릎 꿇고 감사의 고백 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중요한 몇 마디만 더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의 내면적 마음을 들여다 보며 이야기를 진행했습니다. 이제는 시각을 달리 해서, 세 부류의 위치를 자세히 생각해 봅니다. 1)번 사람들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주인의 종이 그들을 찾아간 곳이 어디일까? 예, 그들이 사는 곳이겠지요. '집'입니다. 2)번 사람들의 위치는? 시내 한 복판, 정확히는 시내의 거리와 골목이지요. 그러면, 3)번은? 길(Road)과 산울타리가(Country lane)였지요. 각각의 위치에 차이가 있나요? 차이가 있어도,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1) 집은 편안함의 안식처입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2) 시내 한 복판은 내 삶의 현장입니다.
3) 산울타리가는 내가 나그네로, 여행자로서 있는 곳입니다.
물리적 위치를 이야기함이 아닌 것은 아시겠지요? 내 마음의 위치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상기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가난함을 진정 추구한다면, 내 마음은 편안히 집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가야 합니다. 나아가, 길과 산울타리가로 훨훨 떠나야 합니다. 마음의 여행을 떠나십시요. 그곳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 초청을 받아야 합니다. 샬롬~
QT묵상 2012.8.24 눅14:25-35 <목적과 수단>
붙잡은 말씀: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제자의 도)을 말씀하십니다. 망대 비유와 전쟁 비유의 두가지를 말씀의 뜻을 따라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에 대한 제자도를 또한 같은 순서대로 써 봅니다.
[망대 비유]
- 목적: 망대를 세움
- 현상태: 아직 시작 안 했음
- 수단: 준공하기까지의 돈 (비용)
- 하책: 기초만 쌓고 주저앉음
- 차선책: 비용이 모자르면 아예 시작하지 않음
- 방안: 비용 계산부터 먼저 함
[전쟁 비유]
- 목적: 전쟁에서 승리함
- 현상태: 적은 아직 멀리 있음
- 수단: 군대 (숫자)
- 하책: 전쟁을 벌이고 지는 것
- 차선책: 질 것 같으면 화친을 청함
- 방안: 서로간의 군대 수를 비교함
[제자가 되려면?]
- 목적: 예수의 제자가 됨
- 현상태: 그를 무작정 따라다니고 있음
- 수단: 십자가 (고통과 고난의 좁은 길)
- 하책: 시작했다가 이루지 못하고 주저앉음
- 차선책: 이루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하지 않음
- 방안: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따름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 왔습니다.(25절) 그들은 '무작정' 예수님을 따릅니다. 제자가 됨은, 예수님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을 향한 철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망대를 세우려면, 비용 계산부터 먼저 철저히 해야 합니다. 준공하기까지의 돈이 모자른다면,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이 아직은 멀리 있을 때, 아군과 적군의 숫자와 그 전력들을 면밀히 분석하여, 승패 여부를 가늠해야 합니다. 질 공산이 크다면 아예 시작하지 않고, 화친을 청해야 하겠지요. 첫 단추를 잘 끼우라는 말씀이지요.^^
제자도의 수단이자 목적은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기 위한 준비 절차는 '자기 부인'입니다. 여기서 '자기'는 나를 포함한 내 주위의 모든 것, 즉 내 모든 소유(33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고, 내가 관계하고 있고, 내가 지향하며 추구하는 일체의 모든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해야 할까? 이것들을 모두 버리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미워하라는 것입니다.(26절) 눅7장의 여인처럼, 그렇게 내 모든 소유를 주님의 발 앞에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내 소유는 '비소유'가 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친 아들 이삭을 도로 받은 것과 같습니다.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9)
자기 부인은 또한 소금의 역할과도 같습니다.(34절) 어떻게 짠 맛을 계속 낼 수 있을까? 자신을 희생하면 됩니다. 자신을 버리면 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미워하여, 자신을 녹이는 경지까지 가면 됩니다. 소금이 스스로를(자기 소유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시점부터 소금은 맛을 낼 수가 없겠지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가 없어 내버려야 합니다.(35절) 그러니까, 소금은 녹아야 제 맛이 납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버림으로, 자기를 녹임으로, 짠 기운을 표출해 내야 합니다.
관계, 물질, 복, 길, 시간 - 이것들은 모두 내 수단이자 내 소유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어 놓을 때, 내 소유는 십자가의 연관성으로 목적이 됨을 발견합니다. 이를 노래한 것이 아래의 제 자작시입니다. 샬롬~
**
십자가의 목적성
십자가에는 원대한 목적이 있다.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원대한 목적,
선지자들을 통해 보여주신 원대한 그림,
십자가로 이를 이루시고 완성하셨다.
십자가에는 대결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과 죄와의 대결,
하나님과 악의 세력 간의 대결,
십자가로 이를 이루시고 승리하셨다.
십자가에는 충족의 목적이 있다.
나의 죄를 심판하시고 해결하신
공의와 사랑의 동시 충족,
십자가로 이를 이루시고 충족하셨다.
십자가에는 숭고한 목적이 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숭고한 목적,
나를 대신하여 지신 인고의 형틀,
십자가로 이를 이루시고 고난 받으셨다.
십자가에는 가르침의 목적이 있다.
나에게 길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려는 목적,
나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려는 목적,
나에게 생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려는 목적,
십자가로 이를 이루시고 가르쳐 주셨다.
십자가에는 목적이 있다.
주님은 그 목적을 향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주님은 십자가로 이를 이루시고 부활하셨다.
*
때론
목적이라 주장하지만,
목적이 아닌 것들도 있다.
관계는 내게 연관되는 인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러니까,
관계는 그저 관계라 할 것이다.
물질은 내가 사용할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러니까,
물질은 그냥 물질이라 할 것이다.
복은 내가 얻을 부산물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러니까,
복은 그저 복이라 할 것이다.
길은 내가 가야 할 노정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러니까,
길은 그냥 길이라 할 것이다.
시간은 내게 주어진 흐름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러니까,
시간은 그저 시간이라 할 것이다.
*
그러나, 이들이
십자가를 만날 때는
변화하여
목적이 된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의 형벌을 대신한 것을..
그러기에,
십자가의 관계성은
내가 이룰 첫번 째 목적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인 것을..
그러기에,
십자가의 소유가
내가 취할 두번 째 목적이다.
내가 누릴 주님의 팔복이 십자가의 복인 것을..
그러기에,
십자가의 복은
내가 얻을 세번 째 목적이다.
주님이 가셨던 골고다의 그 좁은 길을..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이
내가 가야 할 네번 째 목적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 크로노스적 시간을 초월하는 것을..
그러기에,
십자가의 아이온적 시간은
내가 가질 다섯번 째 목적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는 목적이 있다.
아, 십자가!
오, 주님!
나의 목적이여..
QT묵상 2012.8.26 눅15:1-32 <잃은 양 한 마리>
오늘은 눅15장 전체를 본문으로 한, 세 가지 연결된 주제로 묵상합니다.
산수 공부 시간이라 해도 되겠네요.ㅎㅎ 총 3부작이라 약간 깁니다.^^
붙잡은 말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7절)
1부 <주님의 계산 방식>
본문의 세가지 비유를 대하면서, 숫자에 관심이 쏠렸습니다.(제가 숫자에 강한 편이라..ㅋㅋ)
1) 양의 비유 - 100마리
2) 드라크마의 비유 - 10드라크마
3) 탕자의 비유 - 두 아들
각 비유의 모수는 100, 10, 2로 각각 다릅니다.
그러나, 세 비유들의 결과(열매)는 모두 동일합니다.
예, 하나(1)이지요.
나의 계산 방식과 주님의 계산 방식이 너무도 다릅니다.
나의 계산 방식
1) 100마리 양 중 한 마리 양을 건졌으니, 1/100 = 1%
2) 10드라크마 중 한 드라크마를 건졌으니, 1/10 = 10%
3) 두 아들 중 한 아들을 건졌으니, 1/2 = 50%
주님의 계산 방식
1) 한 마리 양을 건졌으니, 하나!
2) 한 드라크마를 건졌으니, 하나!
3) 한 아들을 건졌으니, 하나!
나의 계산은 효율(Efficiency)을 바탕으로 하지만,
주님의 계산은 효과(Effectivenenss)를 기반으로 합니다.
나는 Input 대비 Output을 따지지만,
주님은 Output 만을 보십니다.
나는 효율의 퍼센티지(%)가 많을 수록 기뻐하지만,
주님은 효과의 절대적 숫자를 보고 하늘 잔치를 여십니다.
나도 이제부턴 내 계산 방식을 버리고,
주님의 계산 방식을 따르겠습니다.
2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내가 두번째 배울 산수는 7절(붙잡은 말씀)에 나타난 아래의 부등식입니다.
VoJ{회개한 죄인 1명} > VoJ{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명}
위의 VoJ는 Value of Joy, 즉 기쁨의 크기입니다.
죄인 1명의 VoJ가 의인 1명의 VoJ 보다 더 클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지요.
바로 '회개'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면, 이 부등식은 이렇게 써도 비슷해 보입니다.
VoJ{회개함} > VoJ{회개할 것 없음}
회개함의 행위 자체가 회개할 것 없는 것보다 큰 가치입니다.
여기서, 제게는 의문이 생깁니다.
왜 회개할 것이 없을까?
-> 그들(99명)이 의인이기 때문일까??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거꾸로 생각해 봅니다.
의인이면 회개할 것이 정말 없을까??
그렇다면, 의인의 정의는 뭘까?
이 생각을 하다가, 번뜩 스친 성경 말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0)
나 자신을 보니까 해답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은혜 안에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지요.
그렇다고 내가 구원받은 이후에 진정한 의인일까?
그렇다고 내가 구원받은 이후에 회개할 것이 없을까?
이 부분에 대한 바울 사도의 고백을 참고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1:15)
바울은 구원 이후에도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날마다 죽어야 하고
죄인 중의 괴수(우두머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의 정체가 풀립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2절)이 그들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했고,
의인이기에 회개할 것이 없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회개할 것 많은 죄인만이 이 세상에 있습니다.
나도 그 중의 하나였고,
지금도 그 중의 하나임을 믿습니다.
3부 <계속되는 하늘 잔치>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할 방법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잃었다가 찾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나는 잃었다가 찾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배울 마지막 산수입니다.
#{회개하는 나} ≠ one time = countless
나의 회개는 일회적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지속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지금도
매일 죽어야 하고
죄인 중에 괴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하늘 잔치는
이제도 매일 계속됩니다.
아, 왜 이리 회개할 것이 많은지...
주님 밖에 있는 나를 보면
모든 것이 회개 꺼리입니다.
그럼에도 내 안에 기쁨이 충만한 것은,
내가 회개할 때마다
하늘에서 나 때문에
기쁨의 잔치가 계속된다는 것...
나는
매일 죽었다가 살아납니다.
나는
매일 잃었다가 얻어집니다.
아, 계속되는 하늘 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