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4:1-42

붙잡은 말씀: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1부: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의 편지

저는 수가에 사는 사마리아 여인이예요.
예수님 만나서 제 인생이 바뀌었지요.
이제 그 얘기를 좀 할려고 해요.
예수님 만나기 전 제 얘기부터 할께요.
저는 자라면서부터 만족감이 없었어요.
뭔가 부족한 게 있으면 어떻게든 채워보려고 했어요.
그걸 손에 쥐지 않으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도 제 욕구는 채워지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세가지였어요.

첫째는 육신적 욕구였지요.
우리가 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들이예요.
음식도 있어야 하고 잠자리도 필요하지만,
이곳 사마리아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물이예요.
특히 건기에 이곳은 메마른 광야와 다름 없어요.
그래서 물처럼 우리에게 귀한 건 없었어요.
그러기에 우리 동네에 있는 우물은 정말 귀중한 거예요.
야곱의 우물이 없었으면 우리는 갈증으로 아마 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육신적 욕구로서 저는 먼저 물을 구했어요,

둘째는 정신적 욕구였어요.
(그때 당시) 여자는 혼자 살 수 없잖아요?
남편이 있어야지요.
남편의 역할은 두가지라고 생각해요.
제겐 육체적 관계도 중요했어요.
하지만 정신적인 면도 절실했어요.
제게 있어 남편은 제 인생의 가치와 같은 것이었어요.
그렇다고 제가 큰 것을 바란 건 아니었어요.
그저 제가 의지하고 저를 이끌어 줄 사람이면 되었겠지요.
그런 남편을 잘 만나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셋째는 영적 욕구였지요.
그래요. 하나님이예요.
남들과 똑같이 제게도 하나님이 필요했어요.
때때로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의심도 품긴 했지만,
우리 동네 사람들 말대로 하나님은 정말 계시는 것 같아요.
제 속에 있는 죄 문제도 해결받고 싶었어요.
공허한 제 삶에 변화를 주고 싶었어요.
예배 받으실 하나님도 찾고 싶었어요.
하나님께 제 마음을 토하고 맘껏 예배를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말이예요.
제가 얘기한 이 세가지 욕구가 제겐 큰 짐이 되었어요.
먼저 영적 욕구의 문제는 성전 때문이었어요.
우리는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요.
누군가 귀띔하길, 예루살렘 성전에 가야 예배가 된다는 거예요.
두번째, 남편에 대한 문제는 정말 골칫거리였어요.
첫 결혼에 실패한 이후로 저는 남편감을 고르는데 계속 실패했지요.
이어서 다섯 번을 결혼했는데 다 허사였어요.
사람들 보기에도 창피하고 동네에서 저는 아예 왕따가 되었어요.
동네 여자들에게는 뭐 잡아먹는 귀신이라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사는 남자와는 결혼도 못했어요.
그러다보니 첫번째 욕구인 물을 구하기도 수월치 않았어요.
아침 저녁 선선할 때 우물 가는 것은 생각도 못했어요.
제일 뜨거운 한낮 정오 시간을 이용해야 했어요.
그래요. 내 인생은 뭣 하나 되는게 없었어요.
저는 그렇게 인생의 밑바닥 한 가운데 있었어요.

그러다가 예수님 그분을 만났던 거예요.
웬 유대 남자가 우물가에 앉아있는 걸 보고는 처음엔 많이 놀랐어요.
그런데 그 남자가 물을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에게는 생수가 있다나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겠대요.
제 첫번째 욕구를 채워줄 기회가 온 것 같아 얼른 그 생수를 달라고 했어요.
제 말에 그분은 다짜고짜 남편을 불러오라는 거예요.
좀 황당한 생각이 들어 남편이 없다고 했어요.
제 얼굴 빨개진 거 아시지요?
그랬더니 그분은 지금 남편이 없는 게 맞다고 하시면서
제가 다섯 번 결혼한 것도 아시는 거예요.
화들짝 놀랐어요. 그제야 그분이 선지자라는 걸 알았지요.
그러면서 제 두번째 욕구인 남편 문제도 그분이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세번째 욕구인 하나님과 예배에 대한 문제로 질문을 했어요.
그분은 말씀하셨어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온다고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고요.
그리고나서 그분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그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고 고대했던 구세주 메시야라고요.
그제서야 저는 깨달았어요.
이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것을요.
예수님을 남겨두고 동네로 들어가 동네 사람들을 다 불렀어요.
메시야가 오셨다고요.

예수님을 만남으로 제 세가지 욕구가 해결되었어요.
아니, 세가지 욕구를 넘어 진정한 제 영혼의 문제를 해결받게 되었어요.
제가 첫번째 구했던 물은 그분의 생수로 제 가슴에 채워졌어요.
그분의 생수는 바로 그분의 영이었어요.
제가 두번째 구했던 남편은 그분의 진리로 채워졌어요.
그분은 진리 자체로서 제 최고의 가치가 되어주신 거지요.
세번째 욕구는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것이었어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셨어요.
그분을 통해 참 예배를 알고 경험하게 되었어요.
그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거예요.
영과 진리는 그분에 의해 이미 제게 주어졌어요.
예수님의 영과 예수님의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임을 후일 깨닫게 되었어요.
저는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았음은 물론 진정한 예배자가 된 거예요.
지금도 예배 드릴 때 그분의 말씀을 생각해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저같이 물을 찾지 말고 영을 찾아야 해요.
저같이 남편을 구하지 말고 진리를 구해야 해요.
제가 만난 예수님이 영과 진리예요.
예수님 안에 영과 진리가 있음을 저는 알아요.
그래서 저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어요.
저와 같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 보시겠어요?



2부: 7/11일 주일 예배시의 간증

7/11일 오전 10:45분 쯤 저는 위에 씌여진 사마리아 여인의 편지를 심령으로 받았습니다.
(성령님께서 배달부가 되어 주셨습니다.^^)

여느 주일처럼 11시 예배 20분 전 성가대 석에 앉아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예배의 감격은 어떤 식으로 주실까, 기대와 열망이 있었습니다. 요즘 예배의 감격이 계속되는 몇 주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도와 묵상 중에 요한복음 4장의 이 장면이 퍼뜩 생각났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세가지 다른 욕구가 보여 졌습니다. 일상에서의 저도 동일한 욕구가 늘 있었습니다.

1차적 육신적 욕구와 2차적 정신적 욕구와 3차적 영적 욕구는 제각각인 듯 하지만, 사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한가지 욕구였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영적 갈증을 풀어줄 주님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그녀의 죄 문제가 드러나고 영적 갈증이 채워지자, 모든 그녀의 욕구가 자동적으로 해결되었음을 봅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그녀가 구했던 물과 남편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물 속의 물을 마다하고 예수님은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수가 무엇일까? 해답은 뒷쪽의 7장에 나와 있었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요7:39) 생수가 바로 영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 남편은 평생의 동반자입니다. 때론 그녀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제게 있어, 그 남편은 그녀의 일생동안 찾고 구했던 인생의 가치로 다가 왔습니다. 다시 말해,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구했던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고, 지금은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네가 구했던 참 가치가 있느냐? 참 진리가 무엇이냐? 그것을 내게 보여다오” 그렇게 주님은 내게도 묻고 계셨습니다. 아, 눈물.. 내겐 이렇다하게 보여드릴 내 ‘남편’이 변변히 없었습니다. 나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이 남편, 저 남편을 오가며 떠돌았던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예수님이 바로 나의 진리였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참 가치였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추구했던 남편이라는 진리도 예수님이셨음을 봅니다. 그래서 그녀가 데려온 것은 남편이 아니라, 진리이신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듣도록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왔습니다.

이제 그녀는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그녀가 추구했던 가치의 반전이었습니다. 물에서 생수로, 그리고 영으로의 반전.. 남편에서 참가치로, 그리고 진리로의 반전.. 이것이 그녀가 드릴 예배의 원천이었습니다.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영이신 예수님 안에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 예배의 의미가 제게 감격적으로 다가 왔습니다. 눈가에 또 주르륵 눈물이 흐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셨던 예배의 의미가 제게도 느껴졌습니다.

목사님의 개회기도는 요한복음 4장 13,14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목사님의 설교는 이사야 43장 18-20절을 본문으로 “광야에서”라는 제목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날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아, 감격적인 말씀.. 제게는 이 말씀이 요한복음 4장의 해설서로 보였습니다.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택해 주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자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당신의 ‘새 일’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성령께서 내게 오셔서 광야 같은 내 마음을 여시고 생수의 강을 놓으셨습니다. 이제 나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자로서 주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나의 예배를 받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3부: 적용을 위한 기도

(예배의 마지막 응답 찬양은 아래의 “거기 계심으로”였습니다.)

주님, 내가 광야 가운데 나아가 설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곳에 내 주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임을.
때론 나의 목이 마르고 눈물이 흘러내릴 때도
주의 약속 인하여 두손을 붙들고 주의 영광 선포하리.

나의 호흡이 광야에서 멈춘다 하여도
주가 거기에 계심으로 마지막 호흡도 예배하리.
그곳이 광야이든 푸른초장이든, 주가 거기 계심으로
주로 인해 시작된 나의 항해는 믿음으로 예배하는 것.

아버지 주 하나님,
부족한 나를 예배자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버지를 예배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립니다.
물에서 생수로, 생수에서 영으로,
남편에서 가치로, 가치에서 진리로,
주님의 용광로 안에서
나의 패러다임이 그렇게 변화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영으로,
예수님의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드리게 하옵소서.
내 호흡이 다하는 날까지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드리겠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mskong

2010.07.12 14:05:07
*.226.142.23

제가 형제님의 간증을 읽으면서 조금은 자신이 생기는 점이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영적인 체험(? 사실 형제님에 비해서 택도 안되지만)들을 괜히 조심을 하곤 하였는데... 간증을 읽어가면 갈수록 동질감(죄송합니다.)을 느껴서요...

이선우

2010.07.12 18:07:20
*.187.106.63

ㅋㅋ 공집사님, 죄송하다니요? 저와 비슷한 류의 사람들을 만나기가 참 힘든데, 동지 한분 생겨서 뿌듯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감을 계속 가지셔도 될 것 같은데요? 따로 만나뵙진 못했지만, 사진을 통해서, 또한 가끔씩 주시는 나눔을 통해 볼 때, 집사님께서 받으신 영적 체험을 이곳에서 있는 그대로 나눠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사 얘기지만, 목사님의 칼럼 제의를 받고 조심스러워 고민했던 부분 중 하나가 그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질서가 딱 잡히고 근엄한(?) 목사님 홈피에 제가 누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같은 말씀이라도 저는 개인적 체험이 우선되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거든요. 어디 레퍼런스나 주석서를 따로 찾아 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객관성이 떨어지고 정통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지요. 자칫 여러가지 논쟁의 불씨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뭐, 아직은 그럭저럭 버티고 있지만..ㅋㅋ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불붙는 것 있죠? 칼럼이 생긴 이래로 과도할 정도로 제 발길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웨이브라는 이름으로 나눔을 가진 이래로 웨이브 체험(?)이 더 생기는 신기한 경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제가 약속드린 간증을 다 못 끝내고 이러고 있지요.^^
제 신앙의 3법칙 중 마지막이 ‘나눔의 법칙’입니다. 나눔은 나눌수록 커지는 뻥튀기지요. 겉만 뻥튀기가 아니라, 속도 실한 뻥튀기..ㅎㅎ 저와 같이 나눔의 뻥튀기 장사 한번 하심이 어떻습니까?^^

김유상

2010.07.12 18:53:15
*.170.40.25

이러다 조만간 성령의 쓰나미가 일겠군요.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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