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창28장, 32장] 야곱 묵상

조회 수 2742 추천 수 102 2010.09.26 08:42:31

야곱 묵상 2부작입니다. 2부(그 이름)는 언젠가 게시판에 올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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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QT 창세기28장] 벧엘 하나님


본문: 창세기 28장 10-22절

내용 요약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벧엘에서 야곱은 세가지 서원을 한다.

붙잡은 말씀
21절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절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느낌 및 묵상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어린 시절 야곱을 보면 그의 성격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경쟁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과 경쟁하더니 세상에 나올 때는 형보다 먼저 나오려고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 그는 잔머리의 대가였다. 팥죽 하나로 형의 장자권을 탈취했는가 하면 엄마와 합작하여 아비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받아 먹었다. 그는 엄마 품을 벗어나지 못한 세칭 마마보이였다. 활동력이나 독립심과는 거리가 먼 '방콕'형 인간이었다. 어디 하나 훌륭한 구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야곱이었다. 왜 이삭이 야곱보다 에서를 좋아했는지 수긍이 간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주셨다. 야곱 자신의 의지도 아니요, 야곱이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일방적, 강권적인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것도 인생의 절대적 위기의 때에, 형의 눈길을 피해 도망길에 오른 야곱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일방적인 엄청난 약속을 해 주셨다. 조부 아브라함과 부친 이삭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그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이었다. 두렵고 떨렸다. 그러나 의지할 것 하나 없었던 야곱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은 약속의 말씀이었다.

그래서 야곱은 세가지 서원을 하나님께 드렸다. 물론 그를 끝까지 잘 인도하시어 집으로 돌아 올 수 있게 해 달라는 조건부 서원이었다. 그런데 이 조건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친히 하신 약속이 아니었는가?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그에게 주어진 것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DL 무디가 시도한 T(Test;테스트중)와 P(Proved;증명되었음)의 신앙 스타일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약속의 말씀이 진정한 '내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말씀에 대한 실질적, 구체적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한 아브라함과 이삭에 비하면 야곱의 믿음은 차이가 있지 않은가?

아무튼 야곱이 서원한 세가지 내용은 1)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 2) 그가 기둥으로 세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되는 것, 3) 소득의 십분 일을 드리는 것이었다. 그럼 과연 이후에 그가 했던 이 세가지 서원의 약속을 '스스로' 지켰을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 부분도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로 서원이 성취되는 과정을 본다.

첫째,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에 대한 서원이다. 그가 서원한 대로 하나님을 과연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을까? 다른 말로, 하나님이 진정 '그의 하나님'이 되었을까? 아쉽게도 야곱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초반 여러 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자기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으로 지칭하였다. 그러나, 이후 기록을 보면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창35:3)이라고 표현한 대목을 볼 수 있다. 그의 입장이 바뀐 것을 쉽게 알 수 있지 않은가?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 아닌 바로 야곱 자신, 즉 그에게 직접적으로 역사하시고 관여하시는 '그의 하나님'으로 바뀐 것이다. 바로 그가 세겜에서 벧엘로 다시 올라가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둘째, 그가 기둥으로 세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되는 것에 대한 서원이다. 결과적으로, 이 서원은 창세기 35장에서 야곱이 다시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단을 쌓음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처소를 일컫는 것이리라. 밧단아람에서 20년을 지낸 야곱은 자신의 서원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이를 기억하시고 야곱을 일깨워 주셨다.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창31:13) 아, 야곱의 서원을 잊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와서도 벧엘과 벧엘 하나나님을 잊고 있었지 않은가? 창34장에 의하면, 그는 벧엘이 아닌 세겜에서 살다가 딸 디나가 강간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다시 하나님께서 그를 일깨워 주셨다.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창35:1). 그래서 마침내 서원이 성취되었다.

셋째, 소득의 십분 일을 드리겠다는 서원이다. 이후 성경의 내용 중에는 야곱이 하나님께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야곱의 서원이 성취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어느정도 추정할 수 있다. 그것이 언제일까? 이것도 벧엘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겜에서 벧엘로 올라가기 전, 야곱은 가족들에게 몸을 정결케 하고 이방 신상을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방 신상과 귀고리들을 하나님 앞에서 아낌없이 버렸다. 라헬이 자기 아버지 라반에게서 몰래 홈쳐왔던 드라빔 신상도 이때 버려졌을 것이다. 아, 이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십일조 일부가 아니겠는가? 벧엘에서 단을 쌓음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다. 예배 시의 예물이 왜 없겠는가? 첫 벧엘에서와 같이 야곱은 단 위에 하나님을 향한 기름을 올려 부어드렸으리라. 첫번 드렸을 때보다 더 향내나고 풍성한 기름 부음.. 이것이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적용

야곱이 한 일은 무엇인가? 그가 스스로 한 일이라고는 온갖 실수 투성이 아니었나? 그런 야곱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로 바꿔 주시고 단련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신가? 야곱의 인생은 하나님을 조금씩 더 알아가는 과정 아닌가? 그가 한 서원은 정작 그가 스스로 이룬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강권적 섭리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그 서원을 기억하시고 일깨워 주신 분도 다름아닌 하나님이 아니신가? 결국 하나님이 계신 그곳, 벧엘이 야곱이 가야 할 종착지였지 않은가? 나의 종국점 벧엘은 어디인가?

나는 철저하게 야곱과 같은 사람이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경쟁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제로썸의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남을 짓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나는 도태된다고 생각하고 악착같이 살아왔다. 잔머리도 굴리고 적당히 속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야곱과 같은 조건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해결책 중 하나로 치부해 온 것이다. 그러나 야곱이 소망이 있었던 것처럼 나도 소망은 있다. 해답은 벧엘이 아니겠는가? 벧엘로 올라가려면 무엇을 해야할까? 내가 붙들고 있는 우상을 버려야 한다. 내 몸에 붙어있는 장신구 모두를 떼어 버려야 한다. 나를 정결케 해야한다. 내 옷을 바꿔 입어야 한다. (창35:2)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만이 내 장신구이자 내 옷이 되어야 겠다.


기도
주여, 야곱처럼 못난 저를 불러주시고 구원의 은총을 주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이 계신 벧엘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으로 옷입게 하옵소서. 아멘.




2부: [QT 창세기 32장] 아, 그 이름...


본문: 창세기 32:22-32

내용 요약
주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바꿔 주시고 야곱은 주님의 이름을 새롭게 만남으로써 인생의 제2막으로 도약한다.

붙잡은 말씀
27절 네 이름이 무엇이냐?
29절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느낌 및 묵상

얍복강 나룻터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는 장면은 내게 너무도 익숙한 말씀이었다. 처음엔 오히려 이 익숙함이 진정한 묵상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2009년 11/1일 주일날 저녁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첫번째 다가온 질문은 야곱과 씨름한 그 분이 과연 누구일까? 라는 것이었다. 야곱은 하나님으로 생각했고, 호세아는 천사라고 했다(호12:4). 문맥상으로 본다면 하나님 자신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사자, 즉 천사가 맞는 것 같다. 아무튼 전체 흐름에서 하나님 자신이든 천사이든,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현현으로 보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먼저 간단한 대화록을 작성해 보았다.

주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주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 야곱이니이다.
주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주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첫번째 깨달음은 11/2일 월요일 새벽기도 때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주님의 물음이 묵직하게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것은 나의 전 인생 영역에 대한 의미를 묻는 주님의 질문으로 내게 다가왔다. 야곱에게 했던 주님의 질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주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어찌 모르시겠는가? 모태에서 그를 조성하실 때부터 주님께서는 야곱의 됨됨이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알고 계셨지 않은가? 이름은 그 사람의 전인적 인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주님의 질문은 야곱을 향한 도전으로 보였다. 그의 삶, 그의 인생은 지금까지 무엇을 추구해왔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스스로 잘해 보고자 노력했던 매 순간의 지나간 삶을 돌이켜 보라는 독촉이었다. 약샥빠른 잔머리와 처세술로 그동안 무엇을 이루었느냐는 호통이었다. 그 주님의 질문은 내게도 비수와 같이 꽂혔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나는 야곱과 같이 울부짖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야곱이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야곱입니다. 야곱처럼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 날은 목사님 말씀처럼 시원하고 통쾌한 새벽이었다.

두번째 깨달음은 11/4일 수요일 아침 집에서 양치질을 할 때였다. 주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바꿔 주신데 대한 야곱의 대답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가 무슨 의미인지 갑작스레 내 머리를 스친 것이었다. 갑자기 웬 생뚱맞은 얘기야? 잘 나가다가 느닷없이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왜 묻는거야?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이 내게 임했다. 그것은 이 때에서야 야곱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예전의 야곱은 늘 자신에 대한 관심과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자신과의 연관성 속에서 자신과 함께 하시어 자신의 미래를 이끌어 주실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바꿔 주신 것이다. 그 하나님은 그의 인생의 가치와 지향점을 송두리째 옮겨놔 주셨다. 인간적 야곱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변화!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야곱이 이 모든 것을 깨닫은 순간, 그는 일생에 처음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주님, 이처럼 나를 사랑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당신을 더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아, 그 이름.. 영광되고 존귀하신 그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야곱의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순수한 간구였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33:18)라고 간구했던 모세의 기도처럼, 한평생 성전에서 주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보는 것이 유일한 소원(시27:4)이라던 다윗의 고백처럼.. 양치질 이후에 내 샤워는 20분 넘게 계속되었다. 끊임없이 내 마음 속으로 밀려오는 야곱의 아름다운 기도와 그 속에서 교류되는 주님과의 사귐..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은 내 눈물과 함께 섞여 주님이 흘려보내는 생수와 같이 내 온 몸을 그렇게 적시고 있었다.

이 두가지 깨달음을 근간으로 위의 간단한 대화록을 길게 재구성해 보았다. 상상속에서 펼쳐 보이는 주님과 야곱의 아름다운 대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일이다. 아, 참 좋으신 주님!

*****
(야곱이 씨름 중에 주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된 이후의 대화)

야곱아, 여기로 오는 여행길에서 나의 군대를 네가 직접 보았지 않느냐? 이것이 내가 너와 함께하는 증거였지 않느냐? 네 간절한 기도를 또한 내가 들었고 너를 도와주려 밤새 같이 있어주지 않았느냐? 내가 네 환도뼈를 쳐서 부러뜨렸지 않느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환도뼈는 네 과거의 상징이란다. 과거에 너는 너 자신의 능력과 처세술로 살아 왔지만 이제는 나만을 의지하며 내 안에서 살아야 하느니라. 네가 의지해 왔던 네 환도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느니라. 네 스스로의 힘과 아집과 자아를 이제는 꺾어 버려야 하느니라.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네 새로운 인생길은 이제부터 시작이 아니냐?

주님, 안됩니다. 아직도 한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내게는 이해가 안가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환도뼈 없이 남자가 무슨 구실을 할 수 있습니까? 환도뼈는 내 인생의 자존심이자 내 소망이었지 않습니까? 이제 나는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그동안 의지해 왔던 과거의 나를 버리고 주님만 의지하라고 하시는데 응답의 증거를 주십시요. 다른 것 다 차치하고라도 내 기도를 들어 주실건가요? 나는 목숨걸고 밤새도록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들고 이곳 얍복강까지 왔지 않습니까? 형 에서는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내게 달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보십시요. 나는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나는 다 망해 버렸습니다.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이런 식으로 되더라도 주님이 나를 축복해 주실 작정인가요?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않겠나이다. 내 재산은 다 날라가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내 가족의 생명은 구원해 주십시요. 주님의 응답을 주십시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지금까지 너에게 네 이름의 의미는 무엇이었느냐? 너는 네 이름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네 인생을 한번 돌아 보거라. 너는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 왔느냐? 네가 가고자하는 방향은 어디였느냐? 약삭빠른 잔머리와 처세술로 네가 이룬 것은 무엇이었느냐? 너에게 나 하나님의 의미는 무엇이었느냐?

야곱이니이다. 그렇습니다.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과 경쟁하다 세상에 먼저 나오려고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온 야곱입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탈취했고 축복을 받기 위해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밧단아람의 외삼촌 집에서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내 인생은 속고 속임 당한 인생이었습니다. 그 부끄러운 내 인생에 주님은 함께 해 주시마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게는 얼마나 힘이 되고 귀한 약속의 말씀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까지도 이제까지 나는 내 인생의 목적을 위해 이용해 왔습니다. 아, 나는 그런 놈이었습니다. 내 환도뼈만을 의지해 왔습니다. 열두 자식을 이렇게 낳은 것도 다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야 알았습니다. 나를 나되게 해주시고 나를 사랑해 주시고 이끌어 주신 분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아, 그럼에도 나는 주님을 외면했습니다. 내가 참 잘난 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 앞에 서니 이 모든 것이 부끄럽습니다. 내가 벌거벗은 것 같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소서.

내가 너를 이미 용서했느니라. 너를 통해 영광을 받았느니라. 너는 나의 기쁨이었느니라. 그러나 이제 너는 더 크게 쓰여질 것이니라. 네 인생이 바뀔 것이니라.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지는 것도, 이기는 것도 내가 주는 것이니라. 너는 이제부터 내 안에 거함으로 진정으로 이기는 삶을 배워가야 할 것이니라. 야곱이라는 인생의 1막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인생의 2막으로 환골탈태하여 살아가야 할 것이니라. 앞으로는 인간적 야곱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니라.

오 주님, 감사합니다. 경쟁과 집착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나.. 늘 자신에 대한 관심과 이기적 마음으로만 가득차 있었던 나.. 주님 조차도 철저하게 나와의 연관 속에서 내 미래를 이끌어 줄 조력자로만 여겼왔던 나..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내 이름을 부끄러운 야곱에서 영광스런 이스라엘로 바꿔 주셨습니다. 주님은 내 인생의 가치와 지향점을 송두리째 옮겨놔 주셨습니다. 이기적인 나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변화라니요! 주님의 영광스런 사역에 참여하게 된다니요! 내가 그럴 자격이 진정 있는 것입니까? ㅠㅠㅠ.. 주님, 이처럼 나를 사랑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하나님이라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부터 주님은 내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을 더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아, 그 이름.. 영광되고 존귀하신 그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허허허, 정말 기특하고 가상하구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나다 (I am who I am. 출3:14). 정말 나를 알고 싶은 것이냐? 지금까지 그랬듯이 내가 일평생 너와 함께 함으로 나를 가르쳐 주겠노라.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네 인생의 여정이 될 것이니라. 너도 늘 나와 함께 거하도록 하거라. 너를 축복하노라.


적용

야곱의 기도를 닮게 하옵소서.
- 야곱의 삶에서 이스라엘의 삶으로 옮겨가기
   즉, 새로운 내 이름에 대한 정체성을 회복하고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아주심에 대하여 감사 찬양하기
- 존귀하신 주님의 이름을 끝까지(야곱처럼 집요하게!) 물어보기


기도

주 하나님, 야곱처럼 부끄러운 제 이름을 바꿔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제 신분을 생각할 때마다 감격스럽고 가슴이 설레입니다. 이제 주님을 더 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그 존귀하신 이름과 아름다운 성품을 제게 더 알려 주옵소서. 제가 주님을 더 배워 가기를 원합니다. 예수 십자가 사랑에 녹아있는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더 깨달아 알기를 원합니다. 참 좋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김순희

2010.09.26 13:25:21
*.161.88.93

아무리 생각해도 야곱과 똑같은 나, 자신의유익에 앞뒤 가리지 않는 이기심, 하나님을
나의 어떠함을 위해 필요한 능력의 주님으로만.. 나의 괜찮음과 나의 어떠함을 위해 존재하셔야
했던 하나님으로만..ㅠㅠㅠ 뒤돌아 보며 얼굴이 붉어 집니다.ㅠ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사랑하여 주시고 손잡아 인도하시고 계시니 그런 울 주님 때문에 저는
매일 울어도 매일 울어도....

정순태

2010.09.27 11:16:28
*.75.152.247

우리 모두의 대화이기를 원합니다! 읽고 감사하며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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