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눅9장] 자기부인의 세가지 지침

조회 수 797 추천 수 78 2012.08.12 14:35:10
QT묵상 2012.8.6 눅9:51-62 <자기부인의 세가지 지침>

아름다운 월요일입니다.^^ 오늘은 제자됨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세가지 말씀을 대하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나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묵상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어렵고 험난합니다.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내게 주신 세가지 지침은 이러합니다.
1) 머리 둘 곳을 두지 말라 (58절)
2)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60절)
3)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62절)

이 세가지 지침을 보면서, 제게 문득 생각난 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세가지 유혹이었습니다. 눅4장 초반에 나오지요. 세가지 시험을 누가가 기록한 순서대로 보면, 위의 세가지 지침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저는 이 세가지 시험을 심리학적 측면에서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 카테고리와 패턴이 서로 비슷함을 느끼십니까?

1) 굶주림(생존을 향한 욕망): 돌을 떡으로 바꾸라 -> 말씀으로 산다
2) 천하만국의 영광(힘을 향한 욕망): 나에게 절하라 ->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라
3) 뛰어내림(관계를 향한 욕망): 천사가 보호할 것이다 ->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사실상, 모든 유혹은 '나'로부터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것이지요. 즉, 내 마음의 메커니즘은 전적으로 이기적입니다. 내가 먼저 생존해야 하고, 내가 힘을 얻어 만족에 이르러야만 하고, 내가 관계 속에서 사랑 받아야만 하는 것이지요. 내가 모든 것에 있어서 최우선 순위가 되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지난 주에 제자의 도를 말씀하시며, 그 첫번째 명령으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위의 세가지 욕망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으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생존과 안전의 욕구, 힘과 권력의 욕구, 관계와 사랑의 욕구에서 아예 멀리 떠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힘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1) 머리 둘 곳을 두지 말라
인간의 원초적, 일차적 욕구는 생존과 안전입니다. 의식주가 그 기본을 충족시키고 있지요. 그 중에서 머리 둘 곳은 나의 기본적인 생활 터전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우선 살고 봐야지.." 이것만큼 제자의 삶에 위배되는 생각은 없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나도 머리 둘 곳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의지하는 내 삶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 반석이신 그리스도...(고전10:4)

2)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시대와 공간을 막론하고, 장사지냄은 각종 종교적 의식과 행사로 가득합니다. 특히, 죽은 사람이 자신의 친인척이라면 더하겠지요. 그가 극락왕생하고 사후에서도 지복을 누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다 보면, 자칫 장사 지냄 속에서 내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장사지냄에 대한 예수님의 매몰찬(?) 명령은,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힘'을 추구하는 나를 질책하십니다. 경배하고 섬길 분은 단 한 분,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3)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제자에게 있어, 관계와의 별리는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특히, 혈육 관계로, 사랑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가족과의 관계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로서 나의 우선순위는 확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는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과도 같습니다.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오직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매진해야 하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의 아름다운 고백을 닮아가고 싶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2-14)






QT묵상 2012.8.7 눅10:1-16 <복음의 두 얼굴>

본문의 말씀을 대하면서, 한가지 의문이 제게 밀려 왔습니다. 소돔과 두로와 시돈보다 갈릴리 북쪽 마을들(벳새다, 고라신, 가버나움)이 못하다는 말인가? 별 것 없는 것 같은데, 왜 예수님은 이들 마을에 그토록 화를 내신 것일까?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같이 화를 내신 대상이 또 있나 확인해 보았습니다. 다른 그 대상은 한결같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의 원인은 그들의 외식함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은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겉은 깨끗이 하되, 안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했습니다.(눅11:44, 마23:25) 그리고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자신들도 회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천국문을 막아서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마23:13, 눅11:46)

외식이란 나의 안과 밖이 철저히 다름을 일컽는 것입니다. 결국, 벳새다와 고라신, 가버나움도 그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죄악의 땅 소돔, 이방의 대표 도시 시돈과 두로보다 못하다는 주님의 말씀에 무릎을 꿇습니다. 나를 돌아 봅니다. 이 시간 나의 외식을 회개합니다. 사5장에 나오는 아래 말씀이 주님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

동전에도 양면이 있듯이,
복음에도 두 얼굴이 있습니다.

복음의 앞면은 평안이지요.
Peace to this house...
복음을 듣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무릎꿇어 자신을 낮추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입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높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을 소유합니다.

복음의 뒷면은 화이지요.
Woe to Chorazin and Bethsaida...
복음을 들었음에도 이를 배격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들은 상관이 없게 됩니다.
도리어 음부에까지 낮아집니다.
화와 심판이 임합니다.

주님,
내게 주신 복음의 두 얼굴 중
평안의 얼굴만이 나타나도록
나를 도와 주소서...
내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QT묵상 2012.8.8 눅10:17-24 <기쁨의 3중주>

8월 8일입니다.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인 88(빠-빠-), 그래서 북경 올림픽은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 8분 8초에 개막식을 했다고 하지요. 런던 올림픽에서도 우리 나라가 메달 승전보를 계속 울리고 있고.. 뭔가 기분좋은 느낌, 기쁨이 가득할 것 같은 날.. 그래서 오늘 묵상 주제를 "기쁨"으로 잡았습니다.

본문에서 '기쁘다'는 표현이 4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 기쁨이 주제일 수 밖에 없지요.ㅋㅋ
1) 각 마을로 파견되었다가 예수님께로 돌아온 70인이 기뻐했습니다.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본 까닭이었습니다. (17절)
2) 예수님의 대답-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20절)
3) 그 때에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21절)

여기서의 기쁨은 모두, 신자로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 말씀을 들여다 보면, 이러한 기쁨에도 다른 단계와 격조(?)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갈수록 더 심화되고 격조가 높아지는 기쁨의 순서를 말입니다. 그것을 저는, 본문의 순서를 따라 땅의 기쁨 -> 하늘의 기쁨 -> 주님의 기쁨으로 잡아 보았습니다.

첫번째 기쁨은 땅의 기쁨입니다. 이 땅에서 신자로서 내가 누리고, 또한 누려야 할 기쁨이지요. 70인 제자들은 귀신이 항복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예수님도 함께 기뻐하셨습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귀신이 항복한 것은, 제자들이 했다기보다는, 예수님이 해 놓으신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17절) 대행한 것 뿐이었습니다. 시쳇말로 제자들은 '이삭 줍기'를 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첫번째 땅의 기쁨은 이삭 줍기의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다 해 놓으신 것을 내가 이 땅에서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이지요. 예수의 이름으로...

두번째 기쁨은 하늘의 기쁨입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살아가야 할 신분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나의 기쁨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 기쁨의 근거는,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20절) 이 땅의 기쁨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늘의 기쁨만 하겠습니까?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3-4)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하늘에 내 이름을 기록해 주셔서 천국의 소망과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마지막, 세번째 기쁨은 주님의 기쁨입니다. "성령으로 기뻐하시며.."(21절) 기쁨의 마지막 단계는 내가 '스스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해,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이것은 신자인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겠습니다. 땅의 기쁨도 하늘의 기쁨도 그 근원을 따지고 보면,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다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 기쁨의 근원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겠지요. 예수님도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기뻐하심을 받은 성령에 힘입어 다시금 그 성령으로 기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령이 서로간에 기쁨의 공유체가 된 것이지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이같이 예수님은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 믿음의 눈으로 세상과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그분의 마음을 알아가며, 그분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이처럼 내 몸을 산 제물로 드림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를 매일 드리는 것입니다.(롬12:1)

땅과 하늘과 주님
기쁨의 삼중주여

땅의 기쁨으로 가득하라
이 땅에서 주님으로 기뻐하라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하라
주님을 향한 소망의 기쁨에 참여하라

주님의 기쁨으로 가득하라
내 기쁨의 근원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4)

기뻐하라
또 기뻐하라
기쁘시게 하라

땅과 하늘과 주님
아, 기쁨의 삼중주여





QT묵상 2012.8.9 눅10:25-42 <분주한 마음 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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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은 제 글의 공간에 여백을 두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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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과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이야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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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함이야말로 당신의 적입니다.
분주함을 버리는 비결, 여기에 담았습니다.
곱씹으면서 찬-찬-히 읽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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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 마음을 향하여 들려주는 제 이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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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한 마음 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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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한 마음엔 뭔가 꽉 차 있지요.
그래서 다른 것 들어갈 공간이 없어요.
내 것으로 가득해 남의 것 못 들어와요.
보고서도 못 본 척,
듣고서도 못 들은 척,
쏜살같이 피해서 지나가 버리지요.

분주하지 않은 마음엔 공간이 있지요.
그 빈 터를 여유라고도 부르지요.
그 마음엔 내 것도 있지만 남의 것도 많아요.
보면 본 대로,
들으면 듣는 대로,
빈 터로 그냥 들어 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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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뭘 해야 되지요?
분주함을 버려야 겠지요.
어떻게 버릴까요?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 보세요.
뭔가 꽉 차 있는 마음이 보이나요?
어찌 이리도 빈 곳 없이 차곡히 들어가 있었을까..

그 마음을 들여다 보고 어땠나요?
온갖 생각으로 또 꽉 찬다구요?ㅋㅋ
그래요.
빈 곳 하나 없이 분주한 마음..
아, 불쌍타...
그 마음이 불쌍하지 않나요?

내가 나를 불쌍하다고 해?
그래도 이제까지 꿋꿋이 잘 살아 왔는데..
잘 해 보려고 아둥바둥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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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처량한가요?
그러니까 불쌍한가요?
그렇다면 이제 성공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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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한 마음은 꽉 차 있어
불쌍한 생각이 없어요.
이것이 교만이예요.
교만과 방자함은 꽉 찬 마음이예요.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첫 출발이예요.

분주함을 버리려면,
그 꽉 찬 마음을 들여다 보면서
쓰다듬어 주면 돼요.
아, 불쌍타...
얼마나 고생했니?
그 마음을 안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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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마음에도 빈 터가 생겼어요.
빈 터에 뭣부터 채울까?
예수님 말씀으로 채워야지요.
마르다처럼 몸이 분주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마리아처럼 마음은 빈 터를 남겨 두세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보세요.
마리아의 마음도,
마르다의 마음도,
그 발치에 앉아 있으면
들을 것이 있어요.
채울 것이 생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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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나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래요.
그게 사실은 예수님의 마음이예요.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을 때
내 빈 터에 그 마음이 채워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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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다 됐나요?
그냥 나만 불쌍히 여기면 된다구요?
그저 나만 살면 그만이라구요?
에게게,,, 예까지 잘 왔는데?
아니, 아니, 아니지요.
불쌍한 건 나만이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내 옆의 그도 불쌍하잖아요.
내 마음엔 빈 터가 아직 남았어요.
그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
그를 들을 수 있는 마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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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잖아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분주한 마음을 가진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긴 만큼
그도 불쌍히 여겨주는 거예요.
내 마음을 안아준 만큼
그를 또한 품어주는 거예요.
그가 정말이지 불쌍하지 않나요?
내 빈터에 그를 들어오게 하는 거지요.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거예요.
나를 불쌍히 여기는 만큼
나한테는 빈 터가 생겨요.
그 곳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우는 거예요.
그것 또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예요.
이제 그 마음을 그에게 나눠 주세요.

불쌍하다는 생각..
이것이 사랑의 출발이예요.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손 내미는 거예요.
수줍고 부끄러울 게 있나요?
나 가진 것 없잖아요?

그렇게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았어요.
그 다음엔요..
나같은 사람 많이 있었잖아요?
불쌍한 사람들...
이젠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줄 차례예요.
내가 받은 만큼...

사랑이 별건가요?
서로 불쌍하다고
부둥켜 안으며
함께 울어 주며
같이 웃어 줌으로
더불어 사는 게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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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은 말씀)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27절)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1, 32절)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3절)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한지라 (40절)

- 분주한 마음 버리는 순서 -
1) 내 마음 먼저 들여다 보기
2) 나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
3) 예수님 발치에 앉기
4) 예수님 마음으로 채우기
5) 예수님 마음 나눠주기






QT묵상 2012.8.10 눅11:1-13 <무엇을 구할까?>

오늘은 기도에 관한 말씀이네요. 주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 침상에 누운 벗에게 떡을 구하는 벗의 비유, 마지막으로 "구하라"는 결론의 세 파트입니다. 저는 말씀의 흐름을 따라 마지막 13절을 붙잡았습니다.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 중 결론 부분인 9-10절을 자세히 보면 재밌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무엇을? 목적어가 빠졌습니다.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으며, 무슨 문을 두드리라는 말인가? 그 목적어가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일까? 초두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이 목적어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뭔가가 숨겨져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기도는 내 소원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그렇습니다. "너희 구할 것"- 즉, 기도의 목적어는 내 소원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 내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 이것이 기도인 것이지요. 그렇게 구하고, 기도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내 소원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이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나라에 대해 기도하고, 이후에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기도를 드려야 하겠지요. 이어지는 두번째 파트, 간청하는 벗의 비유는 저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그가 구한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행 중에 자신을 찾아온 나그네 친구를 위한 것이지요. 그의 소원에는 친구를 사랑하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간절함이 간청으로 이어집니다. 그러고 보면, 기도의 목적어인 내 소원의 우선순위가 명확해집니다.
1) 하나님 (그의 이름과 나라)
2) 다른 이 (중보)
3) 나 자신

13절의 말씀이 더욱 놀랍습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의 병행구인 마7:11 말씀은 이렇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장의 '좋은 것'이 본문에서는 다른 것으로 바뀌었지요. 성령으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두가지 멧시지가 제게 임했습니다.
1) 내가 구할 기도의 첫번째 목적어는 성령이어야 한다.
2) 왜? 내게 가장 좋은 것, 내게 가장 필요한 것, 하나님이 내게 가장 주고 싶어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시지요. 성령이 바로 예수입니다. 그 분이 곧 하나님 당신이십니다. 내가 무엇을 구할까? 당연히 나는, 내게 가장 좋은 것을 구해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먼저, 가장 절실하게, 구해야 할 것. 다른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바로 그것. 바로 주 예수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아, 주님의 마음... 내 평생 소원이 되신 주님... 내 기도의 목적어가 되시는 주님...

이를 묵상하면서, 문득 제 이전의 경험이 생각났습니다. 2006년 9월의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감격적 체험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짐으로 두 손을 높이 듭니다. 여기에 생생했던 그 때의 제 간증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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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한가지 소원

‘알라딘과 마법 램프’ 이 이야기를 모르시는 분은 없겠지요. 몇 년 전 디즈니에서 만들었던 만화영화를 아이들과 같이 신나게 본 기억이 납니다. 천년의 잠에서 깨어난 램프의 수호신, 그 이름이 ‘지니’였던 것 같습니다. 지니가 거지인 알라딘에게 세 가지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하지요. 알라딘의 첫 번째 소원은 왕자가 되는 것이었지요. 왕자가 된 후 갖은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공주의 진정한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튼, 알라딘의 마지막 소원은 지니를 램프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었고, 지니는 이에 감동을 받아 알라딘의 ‘친구’가 되어 평생 같이 있게 됩니다.

솔로몬의 소원은 지혜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 간의 분규가 있을 때 왕으로서 재판을 잘 하기 위한 것이었죠. 하나님께서도 그를 가상히 여기셨습니다. 지혜뿐만 아니라 부와 영광을 함께 주셨지요. 여기서 저는 솔로몬의 소원을 다시 한 번 묵상합니다. 솔로몬이 구한 지혜가 정말 최선의 것인가? 솔로몬이 ‘더 좋은 것’을 구할 순 없었을까? 그러면서 문득, 다윗이라면 무엇을 구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보았습니다.

알라딘의 세 가지 소원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사실, 알라딘에게는 딱 한 가지 소원만 있으면 됩니다. 그것은 바로 지니가 그의 곁에 평생 같이 있으면서 그를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지니가 그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면 됩니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라딘은 세 번째 소원에서야 비로소 ‘지니의 마음’을 얻게 되었지요. 바로 ‘지니 자신’을 구한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솔로몬의 소원은 알라딘의 첫 번째 소원(왕자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솔로몬은 왕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잘 하기 원했고, 그의 직무를 잘 하기 위한 하나의 ‘직능’으로서 지혜를 구한 것이 아닐까요? 그는 판결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칭찬하셨듯이, 훌륭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라면, 만일 솔로몬이 아니고 다윗이라면, 그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을까요? 다윗이라면, 알라딘의 세 번째 소원과 같이, ‘하나님 자신’을 구했을 것이라고 감히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같이 해 주시는 것, 이것이야말로 다윗이 평생토록 추구했던 것이니까요.

다윗이 특히 좋아했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목동 시절이었던 그는 자기 양들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사랑했지요. 또한, 목자로서 양들을 치고 보호해 줄 수 있는 도구들, 즉 지팡이와 막대기, 그리고 물매가 들어있는 목자의 제구(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죠)를 아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서의 수금을 좋아했겠지요.

젊었을 때의 다윗은 사울왕의 눈을 피해 늘 도망 다녔습니다. 이 때 다윗이 좋아했던 것 중의 하나가 에봇이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만이 입을 수 있는 특별한 예복이지요. 특히, 대제사장의 에봇 예복에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법으로 붙이되, 이 판결 흉패 안에는 ‘우림과 둠밈’을 넣어 하나님의 뜻을 묻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에게 에봇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귀중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왕이 된 이후 다윗이 좋아했던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궤였습니다. 왕권이 안정되자마자 그가 첫 번째 한 일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이었지요. 첫 번째 시도에서는, 사람이 죽는 사고가 나서 큰 낭패를 봅니다. 두 번째 시도에서야 그는 하나님의 궤를 무사히 다윗 성으로 옮기게 되었지요.

이와 같이 다윗이 좋아했던 것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목동 시절 좋아했던 목자의 제구와 수금, 젊은 시절에는 제사장의 에봇, 왕이 된 이후엔 하나님의 궤... 이것들을 분석해 보면 그의 마음 속 진정한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을 바랬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축복(지혜, 승리, 부, 영화 등등)도 그에게는 중요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바랐던 소원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이 그와 함께 같이해 주시는 것이었지요.

이것이 솔로몬의 소원과 다윗의 소원과의 근원적 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영어로 얘기하자면, 솔로몬은 Product를 구했고, 다윗은 Source를 구한 것이라고 할까요? 두 사람의 근원적 자세를 조금 과장해서 말해볼까요? 솔로몬은 하나님을 대함에 있어 ‘경외’라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경외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 섬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곁에 늘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했고, 밤낮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마음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이 쓴 것 같이, 다윗의 하나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요일4:18).

막연하게나마 다윗의 소원이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묵상은 했지만, 성경적 근거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새번역 성경으로 성경을 읽고있던 어느 날, 시편 27편의 말씀이 제 눈앞으로 큼직하게 다가왔습니다. 마치 누군가 돋보기로 확대하여 큼직한 글자로 해서 튀어나오도록 만든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제 눈을 덮고있던 비늘이 벗겨진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제가 찾고 찾았던, 그 바로 다윗의 소원이 여기에 적혀 있었던 것이지요. 새번역 시편 27:4 말씀이었습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저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믿음이 제 가슴 속으로 물밀듯이 소용돌이치며 들어왔습니다. 그의 일평생 단 하나의 소원을 보면서, 제 눈물과 콧물이 뺨을 타고 내렸습니다. 2006년 9월 21일 밤 9시경 미국 캘리포니아 롬폭 훈련소의 제 2층 벙크침대에서, 저는 그렇게 다윗 신앙과의 감격적 만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큐티묵상 2012.8.11 눅11:14-28 <내 마음의 엔트로피>

즐거운 토요일 아침.. 26절을 붙잡습니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 봅니다. 내면의 세계, 제가 좋아하는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어제와 그제 점심 후 회사의 산책로에서 회사 동료들과 나눈 주제 중 하나였지요.^^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빌붙어 살다가, 더 좋은 곳을 찾아 그에게서 나갔습니다. 어디를 다녀도 예전보다 못함을 발견한 귀신은 자기 집(?)으로 돌아 옵니다.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가 되어 이전보다도 살기 좋음을 발견한 귀신은, 자기보다 더 힘센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 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그렇게 된 거지요.ㅠ.ㅠ.

이 이야기는 나의 내면에 대한 일반적 현상과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이러한 나의 내면 세계를 총칭하여 '마음'이라고 표현해 봅니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게.. ♪♬

내 마음은 살다살다 정말이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지 천근 만근입니다.
내 마음엔 어두컴컴한 방들도 어찌나 많은지요?
그 다락방엔 온갖 덩어리들이 수북히 흩어져 있습니다.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 등 잘못된 생각의 덩어리들..
분노, 미움, 응어리, 시기 등 잘못된 감정의 덩어리들..
고집, 자존심, 집착, 중독 등 잘못된 의지의 덩어리들..

세월이 갈수록 이들은 더 자라만 갑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은 더 악화되기만 합니다.

산책로에서의 이야기는 마음의 이율배반성과 더불어 물리학 이론인 열역학법칙으로 이어졌습니다.

만물 속에 내재해 있는 에너지의 운행법칙을 열역학 법칙이라고 한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대자연의 섭리라고도 할 수 있지요. 이 열역학법칙은 이제까지 깨지지 않은 절대적 우주과학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도, 최근의 양자역학 이론들도 열역학법칙의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열역학법칙은 1법칙과 2법칙으로 나눠집니다.

제1법칙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으로서, 에너지는 변환될 수 있으나 변환된 에너지의 합은 이전 상태의 에너지 총합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 유명한 E=MC² 입니다. 그래서 질량보존의 법칙이라고도 불리지요. 즉, 1법칙은 어떤 형태든 새로운 에너지의 창조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우주는 스스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이를 음미하다 보면, 다음의 몇 가지 영적 원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1:1) 1법칙은 최초의 에너지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말해줍니다.
2)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전1:9) 에너지의 근원이신 하나님 외에는, 새로운 에너지의 창출은 불가능합니다.
3) 심는 대로 거둔다.(갈6:7) 인과 응보의 법칙입니다. 나의 행위로 인한 결과물이 다시 내게로 돌아옵니다.

2법칙은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엔트로피는 어떤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변환될 때 생기는 비효율 내지 무질서를 계수화한 수치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우주 만물이 점점 더 비효율과 무질서를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2법칙이야말로 진화론자들이 가장 골머리 아파하는 법칙입니다. 진화는 개념상 점점 더 개선되고 질서있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실제로 자연은 거꾸로 무질서의 종말을 향해 가고 있으니까요. 2법칙을 통한 영적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4) 이 세상에서의 삶은 땀과 수고의 연속이다.(창3:19, 전2:11)
5) 이 세상은 점점 더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계시록)
6)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9:27)

저는 개인적으로, 엔트로피는 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죄로 인해 만물의 운행질서가 순방향에서 역방향으로 바뀌었지요. 그래서 그런지, 마음이라는 나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보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너무나 닮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무질서를 향해 갑니다. 나쁜 것들만 점점 더 많아지지요. 그 못된 각종 덩어리들이 얼마나 크고 많은지, 어느 시점에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난지도의 쓰레기 매립지 저리가라입니다. "갈수록 태산"이란 말은 내 마음 형편에 딱 맞는 표현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그 사람이 바로 나였습니다. 내 마음이었습니다.

엔트로피화된 나의 마음... 나로서는 도무지 해결책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뭔가 해 보려는 생각은 아예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복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나에게 내 위치를 정확히 설명해 주었지요. 너는 마귀의 자식이라..(요8:44) 본문의 바알세불 또는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나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불순종의 아들이었습니다.(엡2:2) 힘쎈 일곱 귀신 졸개들이 나를 끊임없이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외적 표출들이, 그 열매들이 죄임을 알았습니다. 그 죄의 근원지가 다름아닌 내 마음임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저지른 이 모든 것들의 최종 결과는 사망이라는 심판임을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나를 향한 해결책은 '역엔트로피'인 십자가였습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파괴하는 유일무이한 길이 바로 십자가 복음이었지요. 예수님이 죽었던 바로 그 십자가에서 내 마음도 함께 죽었음을 확인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주님께서 비천한 내 마음 가운데로 들어 오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이제는 내 마음의 피난처요, 방패요, 에너지요, 샘이요, 스승이요, 친구요, 생명이 되어 주셨지요. 내 마음이 그 지긋지긋한 엔트로피의 법칙을 벗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역엔트로피의 법칙으로 나는 이렇게 선포하겠습니다.
"내 겉사람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르지만, 내 속사람은 역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른다." (고후4:16)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는 매일 새로운 피조물이다. 낡아빠진 엔트로피의 법칙은 가라!" (고후5:17)

그리고, 주님은 말씀 속에서 마지막 법칙을 나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을 (new) '신열역학 법칙'이라고 당당히 외치겠습니다.

7)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고 계신다.(벧후3:13, 계21:1)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계21:5)

나를 위해 만물을 새롭게 하시며, 새하늘과 새땅을 준비하고 계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으로부터 내 마음을 해방시켜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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