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글은 몇 개월 전, 갓피플몰에 서평으로 올렸던 것입니다.
현재 약 30여 건의 서평이 올려져 있는데, 그중 제 글만 부정적이고 나머지는 모두 매우 긍정적입니다.
제가 우려하는 우리의 종교적 확신 가운데 이런 것도 포함됩니다.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의견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자세>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지극히 타당하다고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결코 타당치 않은 것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저는 지금도 존 비비어 목사의 논리가 타당하다고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독후감을 쓴다해도 역시 부정적인 내용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비추어 어느 견해가 진실로 부정적인 생각인지에 관해서는 각자가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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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하나님의 권위를 차용할 수 있는 독점적 직분인가?}
인터넷의 호의적인 서평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다. 감동은커녕 경계심만 잔뜩 생겼을 뿐이다. 나의 신앙관이 잘못되어서일까? 아니면 영성이 병들어서일까? 고백컨대 나는 의도적으로 성경을 왜곡하거나 사악한 영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오히려 성경을 바로 보고 온전히 믿고 참 길 따르기를 소망할 뿐이다.
저자의 주장은 신학적/교리적으로 거의 완벽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고, 지극히 성경적인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더욱이 저자의 부인할 수 없는 업적과 명성까지 참작한다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할 수 없을 것 같기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에는 절대 순종해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위임해 주신 권위에도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 위임된 권위에는 목사는 물론 세상권력도 포함된다. 위임된 권력이 까다롭거나 타락했거나 불의할지라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순종을 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성도(평신도)가 견지해야 할 태도는 목사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 속에 내포된 미비점은 무엇인가? 관점에 따라 무수한 내용이 지적되겠지만 대충만 짚어 봐도, 구약지도자의 직임과 목사 직무의 연계성에 관한 오해, 세상 지도자관과 성경 지도자관의 혼재, 위임된 권위 진정성 식별의 중요성 간과, 광명의 천사와 의의 일군으로 위장할 때의 대처법 경시, 참과 거짓을 구별해야 할 일차적인 주체에 관한 착각, 영적인 두려움을 조장함으로써 평신도의 건전한 판단 방해 등등이다. 목사중심주의 시각에 너무 많이 치우친 설명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고라 일당과 다윗의 경우에 관한 해석도 이에 해당된다 하겠다. 그러나 일일이 다루지는 않겠다.
이러한 미비점(철저히 경계해야 할 위험성)을 염두에 두고, 세 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성경 해석의 편향성이다.
성경해석의 원리 가운데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도 있다. 이는 해석의 준거가 성경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고려하며 부분을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도 지니는 말이다.
저자는 목사에게 순종하라는 구절들만 인용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성경은 오묘하여, 심지어 ‘하나님이 없다.’는 망발까지도 그럴 듯한 논리로 포장시킬 수 있을 정도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편식(偏食) 현상이다. 대표적 이단 중의 하나인 여호와의 증인들의 장기(長技)가 바로 ‘구미에 맞는 성경구절 편식’이다. 이들의 주장이 아무리 확신에 차 있다할지라도 올바른 신자로 인정하는 성도는 없다.
평신도의 목사 순종 문제를 다루기 원한다면, 저자처럼 순종을 강조하는 구절들만이 아니라, 거짓 가르침에 속지 말라는 경계의 구절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의 말씀들도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성경은, 시종일관 하나님께 대한 절대순종만 요구하실 뿐, 인간(목사 포함)에 대한 절대순종은 강요하지 않는다. 인간 간에는 분별을 전제로 한 상대순종을 명령하고 계신다. 슬기롭게 받아야 한다.
둘째, 저자의 주장을 다시 한번 요약하자.
“평신도는 위임된 목사를 존경하고 순종해야만 하며 만약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한다.”
그럴 듯한 주장 속에는 엄청난 무모함이 포함되어 있다. 현존하는 여러 종교 중에서 성직자 존경을 강조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교황을 비롯한 신부를 향한 천주교인들의 존경은 대단하다. 문선명이나 정명석 등 교주를 향한 교도들의 복종은 눈물겨울 정도이다. 또 회교도들은 지도자의 명령에 목숨도 초개처럼 버린다. 놀라운 수준의 존경과 복종의 모습들이다.
기독교도 세상종교들처럼 성직자 존경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가?
한 가지 더, 저자가 위임된 권위의 하나로 설명하고 있는 부모를 예로 들어보자. 효도를 빙자하여 ‘예수를 믿지 말라.’는 부모의 유언을 지키는 것이 권위에 순종하는 것인가? 유언을 위반하더라도 예수님은 믿어야 한다. 이 경우 부모의 유언을 거역하는 것이 권위에 대한 진정한 순종인 것이다!
순종이란, 아무런 생각도 없는 무조건적인 굴종이 아니다. 냉철한(영적인) 분별에 따라야만 참 순종이 가능해진다.
나는 성직자를 대하는 평신도의 존경심의 경중을 가지고 참 진리 여부를 판정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한다!
저자가 아무리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논리를 전개시킨다 해도, 이미 잘못된 관점에서 출발된 것이기에,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셋째, 우리는 신전의식(神前意識=Coram Deo)이라는 말을 알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하게 죄인이다.”라는 의미이다. 저자의 주장을 신전의식에 비추어 검토해 보자.
저자의 인식은 이런 것이다 ; ‘목사는 500 촉광짜리 탐조등이고 평신도는 0.1 촉광도 안 되는 반딧불이다.’ 목사는 그만큼 중요하고 평신도는 그보다 훨씬 못하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성도들 간의 우열논리(천주교 교리를 답습한 것)가 어디에서 파생되는지 생각해 봤는가? 이런 비교의식은 캄캄한 밤에 극명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밤이란 우리의 영이 혼탁해져서 비진리에 빠진 상태를 말한다. 밤이 어두울수록 양자(兩者)의 차이는 커진다.
하지만 대낮이라면 달라진다. 대낮은 우리의 영이 참 빛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때는 탐조등이나 반딧불이나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성경은 어떤 경우에 밤의 상태가 된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을 등 뒤에 둘 때 그렇게 된다.”고 하신다(왕상14:9; 느9:26; 겔23:35 등을 읽어보라).
태양보다 더 밝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탐조등이든 반딧불이든, 모두가 아무 것도 아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을 등 뒤에 둔 상태(죄악상태)에서만 차이가 날 뿐이다.
목사가 평신도보다 훨씬 중요한 직분이며, 목사는 평신도의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지위라는 생각이 드는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을 등 뒤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짚어봐야만 한다.
저자의 주장을 이미지화해 보자.
최상층에 하나님이 계시고, 중간에 목사가 존재하며, 맨 아래에 평신도가 있는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하나님과 평신도 사이에 목사가 낀 그림이다. 만약 이렇다면 평신도의 구원은 목사와도 일정 부분 관계된다고 봐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 견해인가? 아니다! 목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목사가 목숨을 내 놓는다 해도 타인은커녕 자신의 구원조차 이룰 수 없다는 진리를 인정해야 한다). 목사도 평신도와 동일하게 주님의 긍휼을 힘입어야 할 피조물에 불과하다.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는 상호협력 원리에 따라 유지된다.
목사와 평신도는 주종(명령과 복종) 관계가 아닌 형제(피차 복종) 관계이다.
평신도의 존경과 대접을 맘껏 누리는 팔자 좋은 권리가 목사의 최대 목적일 수는 없다. 참 목사라면 ‘혹시라도 내가 천국에 들어가기 원하는 성도들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눅11:52)에 대하여 밤낮으로 살펴야 한다. 참 목사는 언제나 무익한 종처럼 지속적인 섬김의 의무만을 생각한다. 나아가 목사의 목에는 항상 연자 맷돌(마18:6)이 달려 있음도 잊지 않는다. 이 냉철한 요구 때문에 아무나 목사 할 수 없는 것이다.
넘어서야 한다. 평신도로부터 대접받고 존경받으려는 저차원적인 종교관(신앙이 아니다)을 벗어던져야 한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목사존경을 양보하면 기독교와 교회가 위축될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이다. 도를 넘어도 너무 넘어버린 목사의 위상이 제 자리를 찾을 때 기독교는 숨을 통하게 될 것이며, 평신도와 협력하는 직분이라는 바른 위상이 회복될 때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른 목사존경 풍토가 조성될 것이다.
한 마디로, 주님은 목사들의 무소불위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도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기억만 한다면, 저자의 오해가 무엇인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달리 말해 성경적 권위는, 평신도로 하여금 목사를 존경하도록 강요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참 존경과 순종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도록 안내하는 데에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현실을 직시해 보라. 교회 난맥상을 접할 때마다 성경적인 목사위상 정립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깊이 깨우치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