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회심"(하버드 천재들, 하나님을 만나다.)을 강추합니다.
오랫동안 제 나름대로 관심을 갖고 살피는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실제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구체적 방안을 생각해 시도해보기도 합니다. 바로 현 세대,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지 여부입니다.
물론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한 죄인의 심령을 변화시켜 거듭나게 하는 것은 순전히 성령의 간섭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또 혹시라도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자신 있게 대답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현 세대의 특징은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 자체도 사실은 하나의 절대가 됨에도 그러합니다. 칸트가 사실과 의미를 분리시킨 이후로 그때까지 객관적 진리라 믿어 오던 모든 것이 거부되고 모든 의미는 각자 주관에 따라 달라져버렸습니다.
결국 자기만이 진리가 되었기에 오히려 사람의 숫자만큼, 그것도 하루에도 수없이 바뀌는 기분의 숫자만큼 진리는 더 많아졌습니다. 또 모든 것이 진리가 되는 바람에 역설적으로 따지면 아무 것도 진리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종교적 차원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열리는 바람에 구원의 절대적 길도 없어졌습니다.
말하자면 절대적 진리를 표방하는 기독교에 대해 현세대는 필연적으로 절대적 반감을 표출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그야말로 비합리적, 비이성적, 비논리적, 비과학적, 반지성적 종교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광신자들만의 주관적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이지 않습니까? 의미를 오직 자기 주관에서만 찾는 현 세대로선 가장 주관적인 종교라면 칭송을 해주어야 함에도 무조건 싫어하니까 말입니다.
현세대의 상실됨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인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모든 자연인은 자아가 실종된 상태로 향방 없는 달음질만 합니다. 이전 세대까지는 자신의 참 정체성을 찾으려 평생을 두고 노력했다는 뜻입니다. 현세대는 절대적 진리 자체가 없다고 믿기에 그런 탐구 노력조차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거기다 현재의 젊은 세대는 언어적 교통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성보다 감성에 더 많이 의존합니다. 거대담론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잃었습니다. 지금 당장의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충족시켜주기만 하면 무엇이라도 오케이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만한 절대적 진리를 찾는 대신에 찰나적으로 유별나고 신나는 체험만 쫓아다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은 그분을 떠나선 결코 안식을 구할 수 없습니다. 헤이우드 브라운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만큼 하나님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현세대의 끝없어 보이는 방황도 스스로 의식은 못해도 사실은 하나님을 찾으려는 극심한 몸부림일 것입니다.
문제는 기독교에 대해 꽁꽁 닫힌 그들 마음의 철문에 어떻게 작은 구멍을 내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한 줄기라도 새어들게 만드느냐일 것입니다. 복음을 현세대의 사고방식에 맞게, 현 세대의 언어로 풀어내어서 전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 메마른 심령에 성령이 역사하기 좋게끔 사전 정지 작업을, 사실은 그마저 성령의 역사가 수반되어야 가능하지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기독교서점에서 우연히 제 눈길을 끈 책이 그런 숙제 해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켈리 먼로 컬버그가 엮었고 새물결플러스가 2011년에 번역 발간한 “지성의 회심”입니다. 전세계의 최고 지성인들이 모인 하버드 대학을 다니는 동안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회심 간증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알다시피 하버드는 세상에 예수님의 복음을 구현할 십자가 군병을 양성하기 위해 1636년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대학의 뿌리는 “베리타스”(veritas), 즉 진리-죽지 않는 참된 포도나무-입니다. 설립목적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In Christi Gloriam)과, “그리스도와 교회”(Christo et Ecclesiae)를 위한 진리를 추구 실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하버드의 전체적 분위기는 기독교를 비이성적 미신으로 전락시켰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논하면 가장 비지성적인 일로 치부합니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부인하는 일에 선봉을 서고 있습니다. 예컨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주자인 Harvey Cox가 바로 하버드 신학부 교수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시고 변화시킨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대학 안에 심어놓았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진리를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찾았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지성적으로 심오하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자신의 근본이 변화되었기에 예수님 그분이 바로 진리임을 한 결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예의 신학부 교수 Cox는 예수를 윤리적 계명을 준 유대 랍비로만 가르친 반면에, 다양한 전공분야의 이 학생들은 그분이 바로 하나님임을 생생하고도 당당히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우는 자와, 믿고 따르는 자의 차이일 것입니다. Cox의 “예수 하버드에 오다”(When Jesus Came to Harvard-Making Moral Choice Today, 문예출판사 2004년 발간) 책에선 제가 전혀 감동을 받지 못했으나, 이 “회심의 증언”은 아직 반도 채 읽지 않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이 사이트에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sex)에서부터 정치, 학문, 경력 등에 이르기까지 세속적인 문화에서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의미까지도 말이다. ... 우리의 젊은 세대는 이중적인 교훈을 배워왔다. 그들은 성에 대한 의미를 단지 생물학적 기능일 뿐이라고 교육받았다. ... 그러나 지금 자유에 대한 교훈을 배워온 사람들도 인간의 성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그것을 ‘잘못’ 사용할 때 격분하게 된다. 사람이 토끼와 같다고 교육 받았으면서도 토끼처럼 행동하면 도덕적으로 천박한 사람이라는 공격을 받는다. ...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상들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초월성에 근거를 둔 구조가 있어야 한다. ... 만약 인간이라는 존재가 복잡성의 차원에서만 나무나 토끼와 다를 뿐 생화학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면, 서구 문명의 고결한 이상들을 우리가 왜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그것들은 인간이라고 하는 동물들의 두뇌가 과열된 상태에서 갖는 특이한 생화학 작용으로 생산된 부수효과이자 신기루인가?” (메서추세츠에서 라브리 사역을 하는 리처드 키스의 간증 중에서 발췌, 책의 132-3 page)
한분의 증언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인용했지만 참으로 현세대, 특별히 지성적인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예리한 질문이자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통박(痛迫)이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한 죄인이 절대적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따르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믿은 후 자기가 걸어가는 좁고 협착한 길의 의미에 대해선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 현대교회들이 복음, 믿음, 은혜 만능주의로 흐르다보니 비이성적이라는 세상의 오해와 배척을 자초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온당한 변론을 제시한다면 포스트모던 세태가 복음의 위기보다 오히려 기회도 될 수 있습니다.
하버드의 천재라고 해서 영성이 우리보다 더 뛰어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오늘의 언어로 우리 믿음을 재정립하는 데는 물론, 특별히 지성적인 불신자에게 복음을 소개하는 데에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책을 사서 읽어보라고 직접 전해주는 방안도 좋을 것입니다만...)
3/15/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