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 국어가 가능한 힘? 타일러 라쉬 (2)
“언어 감각에 뚜껑이 열려야 해요. 언어에 대해 한번 뚜껑이 열리면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보여요. 언어 습득의 메커니즘을 터득하면 언어 자각이 생겨요. 모국어만 아는 상태에서는 언어 사용을 따로 의식하지 않고 자동으로 하게 되죠. 자각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요. 다른 걸 습득하고 깨달아 가다 보면 제3자 입장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 타일러의 언어 학습에 관해 축약한 설명
- 지금까지는 한국의 개선점 위주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한국의 장점을 꼽자면요.
“문제가 많다는 건 그만큼 기회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죠.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려 있기 때문에 블루오션이 많아요. 몰리는 곳으로만 가지 않으면 기회와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요.”
- 투명하고 효율적인 운영, 매출의 90%가 아티스트에게 돌아가는 구조를 내세운 웨이브 엔터테인먼트 창업이 그 일환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웨이브 엔터테인먼트는 동업자인 줄리안 님의 제안으로 시작했어요. 그동안 한국 엔터업계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아티스트에게 돌아가는 수익 구조가 투명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변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변화의 파장,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 싶다는 열망을 담아 웨이브 엔터테인먼트라고 이름 붙였어요. 가장 린(lean, 최소한의)한 형태로 회사를 운영하고, 아티스트에게 수익이 많이 돌아가야 스스로에게 투자할 수 있다는 철학이에요. 모든 문의는 폼(Form)을 통해 하고, 불필요한 현장 지원 인력을 최소화하고, 대부분의 업무를 원격으로 처리합니다.”
- 9 대 1이라니, 남나요?
“남아요. 수익이 엄청 많이 남는 구조는 아니라도 흑자 운영이 가능합니다. 기부까지 준비 중이에요. 큰 금액은 아니지만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에 녹이기 위해서죠.”
- 엔터업계 입장에서는 시장을 교란하는 도전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할 것 같은데요.
“아직까지는 우리를 견제하는 것 같지 않아요. 다른 소속사 아티스트를 빼앗아 온 적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운영 방식과 철학 자체가 너무 다르니까요. 경쟁 관계로 볼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새로운 메뉴가 추가됐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 스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등 엔터업계의 판이 달라지고 있어요. 변화의 방향성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2010년쯤부터 이미 미국에서는 퍼스널 브랜드가 중요해지고 유튜브가 부상했어요. 한국은 2014~15년에 퍼스널 브랜딩 개념이 생긴 것 같아요. 개인이 브랜드가 되고, 사업체가 된다는 것이 명확했죠. 엔터업계도 마찬가지예요. 대중적인 관심은 크게 없지만 특수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업체를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됐어요. 한 예로 조명 디자이너도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사업체를 꾸려서 1인 기업처럼 활동할 수 있죠.”
- 어떤 사람이 개인 브랜드로 우뚝 서기에 유리할까요.
“자기만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몸담았고, 공유할 수 있는 콘텐츠가 쌓여 있으면서, 솔직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식이 있고,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고 봐요.”
- 2010년부터 미국 유튜브 시장의 폭발력을 읽었다면 인구 구조로 볼 때 미국에서 활동이 유리했을 텐데요. 그 어마어마한 시장을 놔두고 왜 한국에 정착했나요.
“원래 하고 싶던 건 개인 영역이 아니라 국가 부문의 일이었어요. 정보 분석, 외교, 인텔리전스 업계 일에 관심 많았어요. 그래서 서울대에서 외교학 석사과정을 밟았는데, 우연히 방송 일을 하면서 방향이 달라졌죠. 저는 지금 있는 곳에서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미국에서 활동하게 된다면 과연 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가치 관점에서 일을 바라보는군요. 한글 과자 제작도 대단히 가치 있는 행보예요.
“한 친구와 영어 몰입 교육 활동을 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였어요. 어릴 적 알파벳 과자를 먹고 자랐는데, 한국에는 한글 과자가 안 보이는 거예요.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알아봤지만 역시 없더군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생산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위해 친구와 테스트를 했어요. 집에서 반죽을 하고, 한글 틀을 만들고, 포장 디자인과 네이밍 등 콘셉트를 세우기까지 한 달 걸렸습니다.”
- 주요 타깃층은 누구인가요.
“일단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요. 교육적인 관점이죠. 그런데 우리 주요 타깃층은 20~30대입니다. 창의적인 술 게임이나 마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널리 알려지면 좋겠어요. 케이크 위에 ‘생일 축하해’라고 과자를 장식하거나 회사 친구 책상에 ‘힘내’라는 글자로 응원하는 식으로 특별한 날 이벤트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당신의 두뇌 구조가 궁금해지더군요. 9개 국어를 구사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한 지식의 양과 지혜의 깊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어요. 그 원천은 도대체 뭔가요.
“그렇게 봐줘서 고맙습니다. 나다움과 진정성이 비결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그저 개인적으로 호기심 가는 것들을 파고들 뿐이에요. 내가 관심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알고 싶고, 그걸 알아가는 과정이 시간 흐르는 줄 모를 정도로 재밌어요. 하지만 관심 없는 분야는 전혀 몰라요.”
- 외국어 공부도 재미로 하나요?
“너무너무 재밌어요. 언어는 다른 사고를 하게 해주거든요. 언어 교육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부분이 있어요. 언어는 학습의 대상이 아니라, 습득 대상이에요. 공부로 대하면 배워지지 않아요. 몸에 배게 해야 합니다. 언어를 진짜 내 것으로 만들어 가는 몰입을 하고 배움에 집중하면 그 재미가 끝도 없어요.”
- 언어 영역은 타고나는 부분을 무시할 수 없더군요. 한 살부터 문장 단위로 언어를 구사하고, 세 살부터 글을 썼다고 들었어요.
“하하. 부모님의 미화도 있을 거예요. 언어 능력이 선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후천적인 부분이 90% 이상을 차지해요. 한번 뚜껑이 열려야 돼요. 언어 배우는 과정을 운동처럼 터득하는 거죠. 몸이 유연하지 않다고 해서 유연해지지 않는 건 아니거든요.”
- 언어 근육을 만들어라?
“그런 느낌이에요. 그 근육을 활용해본 적이 없다면 선천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언어에 대해 한번 뚜껑이 열리면 세상이 완전히 새롭게 보여요. 뚜껑이 열려서 언어 습득의 메커니즘을 터득하면 언어에 대한 자각이 생깁니다. 모국어만 아는 상태에서는 언어 사용을 따로 의식하지 않고 자동으로 하게 되죠. 다른 걸 습득하고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다시 말해 제3자 입장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 그 ‘뚜껑이 열리던 순간’을 기억하나요.
“천천히 열린 것 같은데, 한국어를 배우면서 더 많이 열렸어요.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은 논리체계가 다르거든요. 한국어로 말할 때는 제가 자라면서 배운 논리의 순서대로 하면 항상 빗나가요. 끝까지 설득을 못 해요. 아무리 설득력 있는 메시지라도 뭔가 걸림돌이 생겨요. 그걸 대학원 때 깨달았어요. ‘언어는 그저 어휘가 아니구나.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생각의 지도를 알아가는 과정이구나, 인지 환경을 알아야 소통할 수 있구나’라는 걸.”
- 한국어의 사고체계가 어떻게 다릅니까.
“영어는 결론부터 말해요. 그러고 나서 여러 가지 논증을 달고 결론을 강조하는 구조죠. 협상을 한다면 내 패를 먼저 까요. ‘그러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어서 너무 좋을 것 같은데, 이렇게 해주겠어요?’ 식이죠. 한국어는 내 패를 먼저 까면 불리해요. 둘러둘러 가는 지점이 함께 있어야 해요. 상대방이 들을 자세를 갖출 시간을 준 후 ‘사실은 이거야’ 살짝 보여주고 논증을 이어가요. 그다음에 ‘그러면 이게 좋지 않을까?’ 물음표를 던지고 결론 내는 느낌. 너무 강력한 주장을 하면 오히려 거부하고, 시작부터 세게 들어가면 들으려조차 하지 않아요.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하잖아요. 도입부가 길어서 그래요. 긴 도입부는 한국어 말하기에 꼭 필요해요. 그걸 하지 않으면 공을 받을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공을 던지는 셈이에요.”
- 언어가 바뀔 때마다 사고 체계가 달라지겠군요.
“확확 바뀌죠. 영어로 말할 때는 직설적이에요. 말의 강도가 세고. 그 정도로 언어란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해줍니다. 세상을 덤으로 얻어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요즘엔 포르투갈어를 다시 배우고 있어요.”
- 시간 관리 룰이 있나요?
“시간 관리보다 습관 설계가 중요해요. 예를 들어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싶다면 포르투갈어를 자주 접하는 환경을 만드는 거예요 인스타그램에서 포르투갈어를 팔로우하면 자연스럽게 포르투갈어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겠죠. 내 환경에 포르투갈어가 자동으로 들어오면, 딴짓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돼요.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해야지’ 식으로 하지 않아요.”
-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방식이 참 똑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똑똑하다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근데 재밌는 게, 저는 한국인들이 말하는 똑똑하다는 기준에 부합하진 않아요. 한국인들은 시험점수 잘 나오고, 수학 잘하고 이런 걸 똑똑하다고 하잖아요. 학교에서 시험점수가 높지 않았거든요. 수업 시간에 집중을 잘 못해 따라가기 힘들었고, 초등학교 때는 난독증을 의심할 정도였어요. 영어 스펠링을 잘 못 외웠고, SAT 시험점수는 2400점 만점에 1800점이었어요.”
- 잠재력에 비해 결과가 안 나오면 자신감이 떨어지기 쉬운데요.
“전혀요. 성적이 전부가 아니라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니까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SAT를 못 보면 ACT를 보면 되고, ACT를 못 보면 시험성적을 안 보는 대학에 지원하면 된다는 식으로 늘 대안이 있었어요.”
- 그럼 성장 과정에서 똑똑하다는 칭찬을 못 들어봤나요?
“그런 것 같아요. 대신 사고를 다르게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중학생 때 선생님이 ‘타일러는 사고 흐름이 다른 학생과 달라서 가르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다른 학생은 명사에 대해 가르치면 명사 생각만 하는데, 저는 명사를 듣다가 동사 생각으로 빠진다는 거예요. 생각이 다른 가지로 뻗어 나가기 때문에 직선적으로 가르치면 심심해해서 공부를 안 하고, 스스로 가려는 방향으로 같이 가면 오히려 빨리 배운다고 하셨어요. 한 반에 학생이 여덟 명 정도의 작은 학교라 가능했어요.”
- 타일러 대표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어땠을까요?
“이런 사람이 되지 못했겠죠. 그냥 납작하게 눌렸을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저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 가치를 만들어가는 삶이 나다운 삶이에요. 제가 살아가는 이유기도 합니다. 지금 해야 할 역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기 안에 있는 모습을 꺼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돕는 일 같아요. 그런 작은 실험들을 해보면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커뮤니티를 소소하게라도 만들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바뀌지 않고, 한국의 미래가 밝지 않을 거예요. 현실적, 이기적인 이유로 이해관계만 생각해도 ‘개인을 아는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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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동안 진행된 타일러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버릴 말이 하나도 없었다. 녹취를 풀면 그대로 글이 되었다. 기승전결이 명확하고 어휘 구사는 적확했으며 메시지도 선명했다. 이 긴 지면도 그가 건넨 인사이트를 담기엔 좁디좁다.
그는 버킷리스트가 없다고 했다. 인터뷰에서 자주 던지는 질문인데, 버킷리스트가 없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먼 후일을 기약하며 담아두지 않고 그때그때 실천하는 삶을 산다는 것. 타일러 대표도 그랬다. 그는 자기 안에서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올라올 때마다 꺼내서 실험하고 변화를 줬다. 자신에게 과감히 기회를 준 사람은 삶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이 적다. 그가 자신의 행복도는 10점 만점에 10점이라고 말한 건 이런 마음이리라.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이미 책 한 권 분량의 유언장을 다 써뒀기에 갑자기 죽더라도 괜찮다고 했다. 고양이 밥을 주러 가야 한다며 돌아서는 그에게서 세상의 이치를 통달한 신선과 해맑은 동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