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에 관한 또 한가지 생각

조회 수 1006 추천 수 42 2005.11.23 23:24:12
정 순태 형제님의 묵상과 견해들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 오는 것은 형제님이 어떤 신학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고( 평신도이시기에!) 오직 말씀에 근거하여 서로를  조화시키려는 노력에서 오는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본인의 말씀처럼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작금의 많은 교파와 찢어진 교단은(비록 하나님이 관용하시고 그대고 두시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도구로 사용해 오셨다는 것은 인정하지만---사실은 그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성경말씀을 도구로 쓰신다) 참으로 우리 현대 신학자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기에 정 형제님이 평신도 이심을 참으로 감사한다.(참고로 박진호 목사님에 따르면 만인 신학자 시대가 도래 했다---그런 예수는 없다를 읽어 보시라)
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침례를 받았고 거기에서 신앙이 자랐고 방언에 대한 많은 가르침과 거듭되는 강조 속에서 한참동안 방황해 본적이 있기 때문에 비록 개인적으로 그 은사를 받지 못했지만 (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받았더라면…하는 섬뜩한 생각이 든다 ) 방언을 받았다고 하는 많은 신도들과 함께 지냈던 경험이 있다. 뒤 돌아 보면 기도 할 때 방언하는 사람의 기도소리를 흉내내며 내가 열심히 방언을 연습했던 이유를 이해한다. 내가 방언의 은사만 받으면 내 구원은 확정된다고 가르쳐졌고 또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방언은 아주 매력적이고 얻기 쉬운 보증수표로 여겨졌다. 그러나 나는 그때 구원을 전혀 이해하지 못 했었다. 구원의 조건들( 하나님의 예정,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기, 하나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 성령님의 말씀의 내 심령에의 적용 하심과 거듭남의 증거로서의 나의 순종 등) 중 어느 하나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 이었다 ( 이것에 대한 나의 이해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서 생략한다 ).
방언은 성경말씀에 의하면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사였으며,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계시의 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회의 덕을 위하여 공중앞에서 통역 할 것을 명령했다고 생각한다.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그때 당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계속되었다 (고전 14: 27-32). 그런데, 과연 성경이 완성된 지금도 이 방언의 은사는 계속되는 것인가? 이 방언의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계속된다면 계시록 22:18-19절의 더 이상의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오순절 교파가 주장하듯이 여러 다른 종류의 계시는 성경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이율 배반적 일 수 없으시기에 계시로서의 방언을 더 이상 허락하실 수 없다.  
또 다른 한면은 지금 방언을 강조하는 모든 교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방언과 함께 기사와 이적, 신유, 물질적 축복을 강조한다. 이 모든 것은 성경의 본질을 오도하는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영혼의 구원에 관한 영적인 메시지이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사와 이적은 그분이 하나님 이심을 증거 하는 것이요, 물질적 축복과 관련된 구약의 기록들도 우리가 구원 받은 후 누릴 영적축복의 풍성함을 예표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셨고(요18:36), 사망과 세상을 이기심을 선언하신다. 우리가 더 큰일을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의 역사 하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구원 받게 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후에야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셨음을 우리는 안다---예수님 당시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구원의 증거를 보인다). 예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 하심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하심이 똑 같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왜 이러한 구절을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하는지는 오순절 교회를 다녀본 사람은 이해할 것 이다. 더욱이 성경은 말세의 징조를 설명하는 곳에서( 마태복음 24장, 살후 2장, 계시록 13장등등) 말세에 나타날 기사와 이적으로 현혹시키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계신다. 방언과 기사와 이적은 한 묶음으로 다닌다.
또한 고전 14:21-22에서

21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사도바울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아사야 28:11절을 인용하여 방언에 관하여 더 설명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불순종하니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한다. 이것은 신명기28:49절의 성취다. 다시말해 방언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말씀이다. 방언을 추구하는 자들은 복음의 존질을 이해하지 못 할 것이요 오히려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 갈 학률이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말세가 가까운 때의 현상이라고 확신한다). 이 방언이 마지막 때의 현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Testing Program이라는 주장은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Reference: Speaking in Tongues at www.familyradio.com ).
P.S. 이러한 저의 이해에 대해 그릇된 점을 발견하시면 성경말씀으로 고쳐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감사.

정순태

2005.11.24 07:00:27
*.95.73.2

형제님과 저의 방언에 대한 이해는 상당부분 일치하지만, 방언이 허락된 시기에 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제 글의 세 번째 항목). 형제님께서는 방언이 초대교회의 태동시기에만 필요했던 은사라는 생각을 지니신 것 같고(사도 은사와 동일한 개념), 저 또한 이러한 이해를 처음 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방언이 초대교회 초기시대에만 필요했던 은사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비록 연습을 통해 유사 방언을 흉내 내는 사례가 있다할지라도,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볼 수 있는 진짜 방언을 무작정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허긴, 방언을 하면서도 성경을 엉뚱하게 해석하거나 조그만 삶의 본(本)마저 찾을 수 없는 분들(목사, 학자, 장로, 평신도 등)을 보면, 형제님의 유사 방언에 대한 경계가 이해되기는 하겠지요. 아무튼, 방언이 언급된 여러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방언의 시대적 제한을 추론해 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형제님의 인품이나 신앙심으로 보아 저의 반대 견해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시고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 가상공간에서의 성도들의 토론 수준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사족(蛇足) 하나만 달겠습니다. 개인적인 신학관입니다. 형제님 글에도 약간 언급되어 있습니다만, 신학을 하신 분들에게는 숨겨진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공부한 교파의 신학과 교리를 벗어나기 지극히 어렵다는 것입니다(사실은 불가능하지요). 그러므로 끝까지 자기가 속한 교파의 신학을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좋은 측면도 있지만 보편교회로 보면 오히려 해로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학과 교리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Theology라는 용어를 제대로 해석하면 금방 이해되는 데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분들이 실패하고 있으나 여기서 이를 장황히 설명할 수는 없고, 이 글에서는 의미론적인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간단히 말해, 신학이란 “하나님에 관한 인간 개인의 이해”이며, 교리란 “다양한 개인적 신학 중에서 비교적 다수가 공감하는 집단적 이해”라고 말입니다. 이는 결론적으로, 어느 개인이든 어느 교파(집단)든, 하나님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인식입니다. 다시 말해 완전한 신학과 교리는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옳은 부분도 있지만 틀린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이는 치우친 것입니다(대부분의 학자나 목사들처럼). 그러므로, 저는 나름대로의 2가지 기준을 세워 두고 있습니다. 첫째 기준은 “양파이론”(OT : Onion Theory)으로써, ‘어느 개인이나 교파의 신학/교리만으로는 완전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다양한 견해를 수용하자’는 것입니다. 양파 껍질 하나하나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둘째 기준은 “하나님중심진리”(GCT : God-Centered Truth)로써, 다양한 견해를 수용한다고 해서 이단을 비롯한 엉뚱한 것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으므로 ‘성경에 비추어 정당한 것만을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제 경험상, 둘째 기준이 힘들 것 같으나 노력하다보면 어느 정도는 가능해진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제가 방언의 시대적 제한에 관한 형제님의 견해를 부동의 한다고 해서, 위에서 말한 둘째 기준인 GCT를 적용한 것은 아닙니다. 제 지식으로는 이 문제를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판단이 여의치 않으므로 잠시 유보해 두어야 할 부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리플이 너무 길군요. 이해하시고 앞으로도 좋은 나눔과 교제가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운영자

2005.11.24 14:55:11
*.108.170.228

방언에 관한 두 분의 심도 깊은 논의에 끼어들고자 하는 뜻이 아니라, 김계환님의 글 가운데 저에 관한 부분이 있는데 독자들이 혹시라도 오해할 소지가 조금 있는 것 같아 해명을 하고자 합니다.

"만인 신학자 시대가 도래했다"라는 것이 모든 평신도가 다 신학자가 되어야 하고 특별한 교육 없이도 될 수 있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오강남 박사의 예수는 없다의 논지에 반박한 일종의 강조적인 표현이란 측면을 이해하시고 또 제가 말씀 드린 내용의 본질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즉 평신도들이 너무 유명 신학자의 말을 무조건 추종하는 경향이 있는데 평신도도 가능한 신학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여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분별의 기준은 당연히 성경이어야 하며 따라서 신학자들의 의견을 성경보다 앞세우는 잘못을 절대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마침 이에 대해 정순태님이 좋은 의견을 리플해주셨네요. 실제로 GCT가 힘들지만(목사, 신학자에게도 마찬가지임) 꾸준이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조명을 기다리고, 무엇보다도 성경 전체를 흐르는 예수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기준으로 해석하고자 하면, "어느 정도"(일부 가능의 뜻)를 넘어서는 "어느 정도"(하나님의 근본적인 뜻을 상당하고 충족할 정도로 알게 됨, 즉 구체적 적용에선 조금씩 차이가 질지 모르지만 원리에서만은 정확히 알 수 있음)까지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두 분의 귀한 의견에 감사하옵고, 방언에 대해서도 정순태님의 리플대로 우선 OT를 적용하되 구체적으로 각자는 GCT에 더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만인 신학자론(?)의 진정한 제 의도였습니다. 샬롬!

김 계환

2005.11.24 20:01:54
*.167.27.161

훌륭하신 코멘트에 감사합니다 저는 방언이 허락된 시기보다도 방언이 하나의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에 초점을 마춘 것입니다
만인 신학자 설에 관하여 목사님의 예리하신 보충설명에 감사드리고( 목사님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게되어 아쉽지만..., 다른 많은 복음적 메세지를 원하시면 그래도 읽어 보시길...) 한가지 더: GCT를 위해서 성경말씀과 성경말씀을 비교해 봐야 하는데 제 경험으로 반드시 Concordance가 있어야 겠다고 느꼈습니다(원어에 대한 부담은 시중에 아주 훌륭한 범교단적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구입가능 합니다---누구 든지 신학적인 자료에 얼마든지 ACCESS가 가능한 시대!). 또 OT는 반드시 거쳐야 겟지만 진리는 CONSENSUS에서 찾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다 아시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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