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

  ▲ 어떤 조사 자료를 보니 현재 한국기독교 교파/교단의 수가 122개라 되어있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신흥 소규모 교파들까지 포함되었는지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이단으로 분류된 교파들은 확실히 제외되었습니다. 이단까지 포함하면 숫자는 크게 늘어날 것입니다(약 170여 개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 현재 한국의 정확한 교파 수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만, 위의 자료만으로도 ‘이처럼 많은 교파가 존재했는가?’라는 놀라움이 생길 것입니다. 다른 묵상에서 “기독교의 교파란 성경에 관한 인간 이해의 제한을 나타내는 현상에 불과하며 평신도에게 그리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입니다. 성경에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성도(특히 평신도)에게 주는 유익은 거의 없습니다.  

  ▲ 물론 일부 성도들 중에는, 인간의 연약성을 고려하여 교파의 불가피성을 주장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 있겠지만 옳은 생각이라 하기 어려우며 단지 인간의 불완전성에 기인되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일 뿐입니다.

▲ 교파란 무엇일까요? 사전은 ‘같은 교리를 믿는 종교단체’라고 설명합니다만, 조금 부연한다면 ‘성경해석의 관점이 같은 부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전적 교파개념에는 불가불 숱한 난점이 내재되고 많은 오해가 전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 이제 우리는 성경은 과연 교파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를 알아보고, 나아가 다수 교파로 분리된 현실교회에서 평신도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늘 그렇듯이 성경의 증거를 찾아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 성경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교파를 인정하거나 장려하는가?
  
▲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너무 분명합니다. “아니다.”입니다. 오늘 본문은 명백하게 교파의 불필요성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잘 아시다시피, 여러 가지 문제로 골치가 아픈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바울이 질책하는 교회의 잘못 중의 하나가 바로 “교파”(분당/분파)의 문제였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단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든 바울이든 아무 것도 아니다.”입니다(4-7절). 비유도 아니요 상징도 아닙니다. 가장 기본적인 직설법입니다. 해석이 안 되는 어려운 구절이 아닙니다. 달리 해석될 수조차 없는 아주 명쾌한 구절입니다. 실제 의미는 “교회 안에는 결단코 교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목회자와 신학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성도들이 오해하기 십상인 교파관(敎派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몇 군데를 조심스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5절)라고 정리해 주십니다. 물론 표현 기법상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무슨 기법이 되었든, 이 말씀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대표성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뿌리도 줄기도 잎도 열매도 모두가 포도나무에 소속됩니다. 그것들이 모인 전체는 포도나무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포도나무 전체를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교파”만이 유일한 기독교의 교파임을 확증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장로파와 감리파와 오순절파는 무엇입니까? 각자가 포도나무에 달려 있는 하나의 줄기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만약 줄기가 따로 떨어지면 어찌됩니까? 포도나무가 되나요? 아닙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줄기는 결코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쓰레기일 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분리된 장로파는 냄새나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 고린도전서 12장은 교회를 이루는 원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부분에서 은사를 설명하다가 후반부로 가서는 이를 ‘몸과 지체’의 원리로 비유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확증하십니다. 포도나무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몸’은 누구입니까? 현대의 각 교파들은 자기 교파가 몸을 대표한다는 듯이 설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몸 전체는 오직 예수님만이 대표하실 수 있습니다. 각 교파들은 손이나 다리나 피부 등 몸의 한 지체는 될 수 있으나 몸 전체를 대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각 개인 차원에서의 지체도 홀로 몸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부여된 한도 내에서만 기능합니다. 손이든 발이든 피부든 모두가 일부를 책임질 뿐입니다. 손이 눈을 대신할 수 없듯이 입술이 발가락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서리집사가 목사를 대신하여 강대상에서 설교할 수 없듯이 목사가 안수집사 대신 재정에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사 혼자 설교하고 안수하고 축복하고 재정관리하고 행정관리하고 감놓고 배놓는 현대교회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체도 몸에서 분리되면 지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표현이 적절치 않으나, 단순한 뼈다귀에 불과할 뿐입니다.  

  ▲ 신약성경 여기저기에는 “청지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 청지기 개념도 목사들에 의해 무척 많이 왜곡되는 개념입니다만, 여기서는 묵상 주제와 연관되는 것으로 한정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청지기는 결코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청지기 개념을 가장 극명하게 오해한 사람은 사도 요한과 야고보 형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기 형제들을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삼아 달라고 로비했습니다(막10:37). 당연히 거절당했습니다. 천국은 정승판서들이 활보하는 곳이 아니라 모두가 한 형제로서 서로 섬기는 곳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형제일 뿐이며(마23:8) 형제는 여럿입니다(독자에게는 형제가 없습니다). 청지기 직분에는 문지기, 창고지기, 식모 등 여러 종류가 있으나 똑 같은 청지기입니다. 계급이 없습니다.  

   ◎ 청지기 개념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어느 청지기든 일부를 담당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창고지기는 창고를 책임 관리할 뿐, 부엌까지 총괄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부분을 담당하는 청지기이든, 그 분야에서의 책무는 인정되지만 다른 분야에까지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청지기는 그 누구든지 주인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아니 대표해서는 안 됩니다!

   ◎ 성경적 청지기 개념을 교회에 적용해 봅니다. 가르치는 목사 청지기, 다스리는 장로 청지기, 재정을 담당하는 안수집사 청지기, 심방하는 권사 청지기, 안내하는 서리집사 청지기, 젖 빨고 있는 초신자 청지기(아직 청지기라는 호칭을 감당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등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청지기들이 많기는 합니다만, 이들 중에서 교회의 주인이 있습니까? 물론 모든 성도가 위임된 주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의 실제적 주인은 오직 예수님(성령님)이십니다. 목사를 위시한 모두는 그냥 교회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 그렇다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치는 직임을 감당하는 담임목사라고 해서 교회를 대표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대표는 예수님일 뿐, 성도는 목사든 장로든 서리집사든 모두 일부분을 담당하는 청지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위에서 살펴본 몇몇 구절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대표성입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이 대표하실 뿐, 어떤 교파도 교회의 대표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교파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예수님과의 연계성(신학적/교리적)을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파가 교회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반증이 됩니다. 성경은 예수교파만 증거하실 뿐, 여타의 모든 교파들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 신구약 성경 어느 구절을 인용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교회의 분파(교파)에 있다.’는 교훈은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파는 성경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결론은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해인 것입니다.

▣ 단일교파가 만능인가?

  ▲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교회는 무조건 단일교파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교파라는 단일교파만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 그러나 이것이 정답임에는 틀림없으나, 실행차원에서 보면 엄청난 어려움이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단일교파 실패에 관한 변명할 수 없는 역사적 증거는 천주교입니다.  천주교는 지금까지 단일교파의 형식을 취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비성경적 작태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 약 2천 년 간 단일교파 형식을 취해온 천주교의 폐단은 무엇일까요? 강조점에 따라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권력의 집중’을 가장 큰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앙집권적 권력구조와 상명하복 조직체계는 절대권력의 필수요소입니다. 절대권력은 필연적으로 절대부패를 낳습니다. 중세의 암흑시대가 그 증거입니다. 단일교파의 형식을 취했던 천주교의 철저한 타락을 교훈 삼을 때, 다양한 교파의 필요성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겠습니다. 천주교의 역사는 교파의 필요성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로 오해받기 쉬운 사례입니다. 건전한 견제세력이 필요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한편 혹자는 성경의 근본 가르침은 ‘단일교파’이지만 이는 관념론 내지 이상론일 뿐, 불완전한 인간의 실상을 고려할 때, 교파가 필요할 수 있다고 주장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치 이론적으로 완벽한 공산주의가 현실 세계에서 실패했듯이, 성경의 단일교파주의도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므로 교파주의를 허용하자는 설명인 것이지요. 성경적 원칙에는 조금 벗어날지 모르지만, 현실을 고려한 일종의 타협으로서 허용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기대인 것입니다.  

  ▲ 성경은 분명 단일교파를 명령하시는 것 같은데, 다양한 교파의 장점도 있는 듯 생각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결론 내려야 할까요?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현실에서는 왜 다양한 교파가 생겨나는가?

  ▲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성경을 100% 완벽하게 이해할 교파나 개인(목사)은 없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제한적입니다. 그 누구든 성경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교파)은 없습니다.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며(고전13:12), 서로에게 배울 수밖에 없고 또 하나씩 밖에는 예언할 수 없습니다(고전15:31). 피차 가르치고 권면해야 합니다(골3:16).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명백한 원칙입니다.

  ▲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이미 안수를 받은 목사들의 입장입니다. 목사들은 반드시 특정 교단을 통해 안수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안수하면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당연하지요).

   ◎ 일단 개인차원에서 목사는 교단에 신세를 진 형국입니다. 양심 측면에서 보더라도 신세진 교단을 위해 무엇이든 보답해 주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교단을 옹호하려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 그리고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럿이 힘을 합하면 쉬워집니다.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전4:12). 어찌하든 똘똘 뭉칠 수밖에 없습니다.

   ◎ 이러한 기대에서 출발된 교파는 점점 경직화되어 일종의 배타적 이익집단으로 변모했고 이제 와서는 개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견고해져 버렸습니다.

  ▲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것은, 평신도들의 자세입니다. 평신도들의 신앙관은 거의 목사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습니다. 성경에 입각한 바른 가르침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하지 못한 목사 자신의 성경이해에 목사의 욕심이 가미될 경우에는 괴상망측한 신앙이 생겨나기 십상입니다. 평신도들이 전적으로 담임목사를 믿고 따르려는 태도가 권장할만한 것인 것처럼 호도되고 있으나 이처럼 무모하고 위험한 장난은 없습니다. 목사들이 잘못 가르치는 사례는 비일비재합니다. 아무튼 교파에 관한 한, 평신도들은 성경이해의 제한과 목사들의 욕심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속한 교파라 하더라도 결코 완전한 무리는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의 교파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교파가 없고, 따라서 유일하게 중요한 교파도 없습니다. 그저 그렇고 그런, 다 같이 미흡하고 부족한 교파들만 존재할 뿐입니다. 성경은 예수교파만 말씀하실 뿐, 현존하는 교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이것은 분별(영분별)에 속하는 문제이며 이는 평신도들의 임무입니다.

▲ 이제 이러한 이해를 전제하고, 아주 중요한 사항을 정리하겠습니다. 그것은 교파의 시작에 관한 것입니다. 즉, 과연 누가 교파를 만들고 유지시키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 여기에는 참으로 놀라운 속임수가 숨겨져 있습니다. 교파는 평신도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교파를 만듭니까? 지도자들입니다! 교파를 만듦으로써 무언가 얻을 것이 있는 부류의 사람들의 작품입니다! 목적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이렇게 됩니다.

   ◎ 목사들의 신적권위의 보증수표처럼 오용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민12장의 미리암의 문둥병 사건과 민16장의 고라 일당의 사망 사건입니다. 이 구절은 목사들이 흔히 해석하듯(평신도들의 코뚜레로 해석하지요) 그러한 뜻이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 이를 깊이 다루기는 적절치 않으므로, 묵상 주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모세에게 반항했던 미리암과 아론과 고라와 장로들은 모두 평신도들이 아니라 지도자급에 속하는 이들이었다는 점입니다. 큰 사명(임무)을 담당하고 있었던 부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더 큰 임무 수행자인 모세에게 대항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자들 간의 밥그릇 크기 싸움을 의미합니다. 지파의 우두머리도 아니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명을 부여받지 못했던 평범한 백성들(평신도들)은 모세에게 대항할 위치에 있지도 못했습니다. 크든 작든 권한을 지닌 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확대하기 위해 모세에게 시비 걸었던 사건인 것입니다. 여기는 놀라운 교훈이 더 숨겨져 있습니다. 모세의 위상에 관한 것입니다. 모세는 인간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현대의 목사를 예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오직 예수님을 예표할 뿐입니다. 민수기 상황을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오. 지도자들(미리암/아론/고라 일당)이 하나님(모세)을 대적하는 모습이 그려지십니까? 유념해야 할 점은 ‘지도자들의 무리 짓는 현상’입니다. 이익을 위해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민수기에서는 이것이 모세(실제적으로는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현대 교회에서도 목사들이 무언가를 위해 무리를 짓습니다. 물론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웁니다. 교파별 교리 및 교단법 등입니다. 하지만 진짜 속내는 단순한 ‘무리짓기’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 천주교는 어떻습니까? 성경에 그려진 초대교회에서는 눈 닦고 찾아도 찾아지지 않는 귀족적 사제가 어디서 나타난 것입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뭔가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성직자 그룹입니다. 평신도들이 교황을 옹립해 달라고 탄원하지 않았습니다. 얻을 것을 욕심낸 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허구일 뿐입니다(이게 천주교의 실상입니다).

   ◎ 개신교는 어떻습니까? 종교개혁에 의해 제대로 회복된 만인제사장 교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목사성직론이라는 괴상망측한 교리로 타락되었습니다. 목사성직론이란, 목사는 평신도와는 격이 다른 별도로 구별된 전문종교인이라는, 허무맹랑한 망상입니다. 글자만 바뀌었을 뿐, 천주교의 사제론 그대로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이 바로 잡아놓은 것을 왜 다시 왜곡시켰을까요? 답은 2가지입니다. 첫째는 루터나 칼빈 등이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칼빈은 교회를 개혁하면서 지나치게 설교권을 강조함으로써 목사가 마치 전능권을 보유한 존재인 것처럼 오도했고, 아니더라도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 및 선지자에 버금가는 존재로 오해하게끔 만든 책임이 있습니다. 둘째는 목사들의 욕심입니다. 만인제사장설에 따르다보니 영 재미가 없습니다. 평신도와 구분도 잘 안 되는 것 같고 힘들게 신학 공부한 이득도 별로입니다. 천주교의 사제론이 훨씬 좋아보였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공모하여 ‘목사성직론’이라는 괴물을 창조해 내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처럼 초기 종교개혁자들의 미비와 그 후배 목사들의 욕심이 결합하여 지극히 비성경적인 ‘목사성직론’이라는 우상이 탄생되었던 것입니다.

   ◎ 목사성직론은 성도들이 인식하기 어려운 묘한 함정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를 일종의 신비한 영적존재로 대우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입니다. 성경 말씀의 여기저기를 교묘히 인용하며 목사의 직능을 거룩하게 포장합니다. 그래서 현대교회에 있어서 만약 목사가 없으면 교회가 허물어지기라도 할 듯이 목사의 역량을 과대포장 시켰습니다. 목사는 예수님과 같고 최소한 바울과도 같은 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중 가장 그럴듯한(존경할만한) 목사를 중심으로 편당을 만들었습니다. 이 결과가 바로 교파의 난립입니다! 루터와 칼빈과 웨슬리 등이 아주 모범적인 지도자들이었음은 부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성경의 일부만 알았을 뿐, 성경 전체를 통달했던 것은 아닙니다. 부족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추종자들은 오직 자기가 따르는 신앙 위인만이 최고(최소한 바울과 동급)인 것으로 받아들여 버렸습니다. 이 추종세력들의 모임이 곧 교파인 것입니다! 그래도 정통교파라면 괜찮습니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양파이론을 적용하여 적절히 선별 수용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별 희한한 교파까지 등장한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습니다. 몰몬교니 승리제단이니 만민교회니 JMS니 하는 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 원인제공자가 누구인가요? 목사들입니다. 목사를 무슨 대단한 천사쯤으로 인식하여 목사 말이라면 아무런 비판(성경적 검토) 과정도 거치지 않고 무조건 수용하도록 세뇌시킴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다시한번 강조합니다만, 우리가 존경하는 신앙위인들의 진정한 위상에 관해 재고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루터나 칼빈 같은 분들을 너무 지나치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말에는 '무조건 아멘'을 외쳐댑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루터도 칼빈도 예수님이나 바울에 비견할 수는 없습니다. 루터교리가 완전합니까? 칼빈의 장로교리가 완벽합니까? 웨슬리의 감리교리는 부족한 점이 없습니까? 이들 각 교파의 교리가 부분적으로 타당한 면은 있다 할지라도, 성경을 전적으로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수많은 미비점을 안고 있을 뿐입니다.

   ◎ 한마디로, 교파는 대다수 평신도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무언가 얻을 것이 있는 기득권층의 욕심에 의해 시작된 비성경적 현상임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 교파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교회 구성원은 없는가?

  ▲ 성경은 오직 “예수교파”만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수많은 교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현상이지만 인간의 한계를 고려할 때, 이해될 수 있고 때로는 수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불가피한 현상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부류가 있는 것 같다는 데에 성도들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 부류가 바로 기득권을 보유한 목사들이라는 생각입니다. 현란한 이론으로 강변하는 저의에는 무언가 다른 것이 숨겨져 있는 것 같기만 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마치 ‘암세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 암세포의 병리적 특성은 무엇일까요? 영양분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결코 세포 자신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순환(循環)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점점 부유해집니다. 때론 이웃 세포의 몫까지 흡수해 버립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이지요.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압니다. “나와 너의 공멸”이 최종 모습입니다.

  ▲ 현대교회에도 암세포와 유사한 직분이 존재합니다. 바로 목사입니다. 목사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됩니다. 설교권, 치리권, 축복권, 저주권, 안수권, 세례권, 재정권, 인사권, 기타 교회의 모든 운영권 등이 모두 목사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목사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이러한 목사의 모습은 무엇을 연상시킵니까? 전지전능한 존재(수퍼맨)입니다! 목사에게 한 마디라도 해 보십시오. 목사와 주변 측근들로부터 곧바로 견제가 들어옵니다. 심하면 ‘사단의 주구’로 몰릴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비판하지 말고 오직 순종함으로써 덕을 세워야 하느니라!!!” 이분들이 써 먹는 전가의 보도입니다. 반발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옳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여기에 속아 넘어가면 결론은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목사 말에도 얼마든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목사 직분은 너무 과대평가되어 버렸습니다. 정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는 현대의 목사 이미지는 마치 300kg의 몸무게로 고통당하고 있는 비만환자의 이미지와 같습니다. 암세포처럼 자기 자신만 욕심내지 말고 평신도에게 돌려줄 것은 돌려주어야 합니다. 목사성직론이라는 비만증에서 벗어나 성경적인 살빼기 작업이 바로 교회 지도자인 목사 그룹에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이것을 실패하면 목사뿐 아니라 평신도까지 모두가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암세포처럼, 현대교회처럼...

  ▲ 이것을 달리 말하면 돌출의 유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됨을 해치는 근본원인은 특정요소의 돌출입니다. 성경이 밝혀주시는 교회라는 유기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목사라는 특정직분을 지나치게 돌출(격상)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블랙홀 효과와 비슷합니다. 목사의 권한(사명)을 과도하게 확대시키다보니 주위의 장로나 안수집사 등 평신도들의 사명은 자동적으로 축소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역교회에서의 목사의 위상은 교황과 같습니다. 막강합니다. 이것은 조직을 유연하게 하고 활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직시키고 결국에는 질식시키게 됩니다.

  ▲ 그렇다고 목사무용론으로 빠지면 이것도 철저히 실패하는 것입니다. 목사 직분이 크게 왜곡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목사 직분을 부정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는 교회에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아니, 가장 중요한 지체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묵상 방향과 상이하기에 더 이상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 나가기

▲ 신약성경에서 “서로” 또는 “피차”라는 단어가 약 132회가 사용된 것으로 검색됩니다. “서로 사랑, 서로 사귐, 서로 기도, 서로 대접, 서로 용납. 피차 복종” 등등입니다.

   ◎ 성경은 왜 이렇게 수없이 “서로”라는 말을 강조하고 계실까요? 성도들의 진정한 위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성도는 직분의 종류에 관계없이 모두 청지기 또는 지체로서 서로 협력해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대표성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 그렇다면 “서로”의 의무에서 목사는 제외되고 장로 이하의 평신도들만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을까요? 없습니다. “서로”의 이행주체는 목사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 다 포함됩니다. 목사도 교회를 이루는 일개 지체에 불과할 뿐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적으로 인정하고 욕심(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것입니다!

  ▲ 총정리 하겠습니다.

   ◎ 성경은 결코 교파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직 단일교파(예수교파)만 허락하실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단일교파 형식을 취했던 천주교는, 아시다시피 철저하게 실패했습니다. 그 원인은,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성령님)의 자리를 교황과 신부들이 차지했던 것에서 찾아집니다.

   ◎ 천주교의 실패를 딛고 새로이 시작된 개혁교회의 출발은 좋았습니다(성경적이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천주교의 실패를 답습하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은 교황 대신 목사라는 직분을 예수님 자리에 앉힌 것입니다. 예수님(성령님)은 증발되고 교단과 목사가 지성소의 보좌에 앉아 버린 것입니다.

   ◎ 천주교든 개신교든 실패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지도자들(교황/교단/목사)이 교회의 공식적인 대표자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교황/교단/목사는 교회의 일부인 것은 인정하지만 결코 교회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지 인간지도자가 아닙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말로는 인정하면서 행동으로는 불인정 하는 것이 실패의 근본입니다.  

   ◎ 따라서 이 문제(교단의 난립=분파)를 해결할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 교파와 거기에 소속된 목사 개개인들을 지나치게 중시하지 않으면 됩니다. 교단과 목사는 교회를 대표할 위치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만 인식하면 됩니다. 인간의 한계로 인하여 성경 해석은 다소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서로서로 용납하면서, 자신이 소속된 교파만이 유일한 진리의 대변자가 될 수 없다는 진실을 겸허히 수용하는 것입니다. 교단도 교회의 일부임을 자각한다면 교단간의 알력은 자연스레 없어질 것입니다. 목사도 교회의 일부임을 자각한다면 목사성직론 따위는 눈 녹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성경이 말씀하시는 초대교회와 같은 참 교회가 시작될 것입니다(초대교회의 특징은 오직 예수님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 끝으로 평신도들이 취할 자세를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교파는 성도들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성경적 기준은 아닙니다. 원론적으로는 단일교파가 옳지만, 인간의 한계에 비추어 볼 때 다수의 교파를 무작정 거부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마음 편하게 여러 교파를 인정하고 수용하면 될 것입니다. 다만, 이 교단이든 저 교단이든 대동소이하며(이단은 제외) 모든 교파가 성경의 일부를 담당할 뿐이라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평신도가 꼭 기억해야 할 사항은, 지도자들인 목사들이 자신의 소속 교파 입장을 강조하는 설득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평신도도 목사에 버금가는 지식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함으로써 목사가 허망한 것에 눈독들이지 못하고 오직 성경이 밝혀주시는 것처럼 ‘말씀과 기도’에만 전념토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교파 문제도 목사들의 설명에 모든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좀 더 깊이 묵상해 보시기를 권고해 드립니다. 샬롬. ♥

조인구

2006.11.09 13:00:31
*.91.150.118

허경조

2006.11.09 13:41:42
*.80.180.42

정순태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문제점 지적에만 그쳤고 해결책이 구체적으로 없는 것으로 보아 더 기다려야만 할것 같군요.

교단 문제를 말씀하시니 최근 뉴욕의 사건 하나를 말씀드리죠.( 교단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이곳 뉴욕의 k 장로교회의 A목사가 교인들과 재정문제로 마찰을 빚자 이들을 출교시키고 같은 교단에서는
자기를 동조하지 않으므로 다른 교단의 젊운 목사와 교회 통합을 해버렸고 교인들이 급기야 노회에 청원을
하고 상황을 설명하며 중재를 요구했읍니다.

A 목사에게 목사면직과 모든 권한을 정지시키는 노회의 재판결과가 나오자 A목사는 혼자 그 교단을 탈퇴하겠다고 공포하고 재판결과의 수용을 거부했읍니다.
얼마나 이 A 목사의 행위가 불법이면 평소 같은 편이고 서로 보호해주는 노회에서까지 이런 결과가 나오겠읍니까 ?
게다가 평소 노회가 자기를 편들어줄땐 노회를 이용해 교회내의 반발세력을 누르는 수단으로 이용하다가
자기편이 안되니 노회가 불법이라고 당장 탈퇴하며 자신이 순교 (어ㄸㅕㄴ 종류의 순교인지는 모릅니다.) 하겠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이런 작금의 상황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

새삼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시며 황해도의 8개 교회를 자전거로 돌아다니시며 목회하시던 돌아가신
조부님이 생각납니다. 일제의 위협에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고 가족의 안위를 전혀 개의치 않으신 - 그래서
저의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은 너무 힘든 목회의 길로 안가신듯 합니다._ 그리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감옥과 산속에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신 선대의 목사님들이 이시대에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앞에 언급한 K 교회에서 목사에게 대들었다고 강제출교당한 10가정이 따로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기사를 읽었을때 10년전 제기억이 나며 그들의 상한 심령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과연 언제쯤이면 이런 모순들이 사라지고 아픔들이 안생길까요 ?

김동환

2006.11.10 12:13:49
*.141.214.6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17:11)

신자들이 현대교회가 천주교의 전철을 밟고 있음을 알지 못함은 성경이 닫힌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를 신격화하는 신앙이 되어 버린 책임은 평신도도 그 책임을 면키 어렵읍니다.
전하는 말씀이 그러한가 상고하지 않고 목회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전적으로 받아 굳이 상고하지 않고 그대로 받고 따르는 것은
평신도의 성경이 닫힌 신앙생활이 이런 병패를 낳았읍니다.
성경을 보유할 수도 없던 중세의 암흑시대에 닫힌 성경은
이 시대에 책꽂이에,가방에,차안에 갇혀 먼지를 이불삼아 잠자고 있읍니다.
나부터 날마다 상고해야 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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