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론 > 교회 > 김교신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오라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이것은 광야의 선지자 세례 요한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 나온 바리새 교인과 사두개 교인을 보고서 책망했던 말이다. 왜 그는 이런 격분한 말을 했던가?
그들이 양심의 목마름이 없이 형식적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양심 위에 ‘주님의 길을 예비하며 그 길을 곧게’ 하자는 그의 눈에는 겉으로만 보이는 믿음은 간교한 독사의 일같이 가증하게 보였던 것이다.
이제 이 같은 부르짖음을 그리스도교 신자를 향하여 보낼 필요가 있는 때가 왔다. 은혜와 진리가 흘러 넘쳐서 사막 같은 이 세상에 생명수를 공급하는 오아시스 이어야 할 하나님의 교회는 저 자신이 물이 다한 우물처럼 타 말라 보기 싫은 신조의 죽은 껍질만을 남겼을 뿐이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는 믿는 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교회 명부에 이름이 있는 것이요, 주일과 기도회에 열심으로 출석 하는 것이요, 날마다 성경 보고, 목소리를 높여 찬미하고, 막힘 없이 오랫동안 기도를 드리는 것이요, 헌금을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밖에 없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대답하기를 죄를 용서 받고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이 그런가? 그 보다는 생활이 나아지기 위하여, 남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인격수양을 위하여, 사회사업을 하기 위하여 믿는 자가 더 많지 않을까?
그 증거로 저희 가운데 자기 죄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가 없다. 그들은 죄라면 살인강도나 간음, 사기 같은 법률상의 죄만을 죄로 알 뿐이며 그것이 없는 한 자기는 의인인 줄로 안다.
기도할 때는 습관처럼 ‘저는 죄인이오나…..’ 하지만, 머리를 들고 있는 동안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영생을 원한다고 하나 그 영생이란 늙은이에게는 욕심밖에 더 되는 것 없고, 젊은이에게는 내용도 없는 말일 뿐이다.
불신자가 누리는 세상 영화는 털끝만한 것도 빼지 않고 다 누린 후, 불신자는 못 가지는 천당에 가는 복락을 또 한가지 더 얻자는 것이니 욕심의 다른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며, 몸은 비록 죽으나 자기들의 사업과 정신은 후세에 남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텅 빈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날의 신자는 말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일은 어떤 것인가?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유치원을 하는 것이다. 농촌사업을 하는 것이다. 여름 어린이 성경학교를 하는 것이다. 청년회를 하는 것이다. 여름 세미나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하기 위하여 불신자에게도 기부를 부탁하고, 남의 보조를 받고, 운동을 하고, 교섭을 하고 선전을 한다. 거기에도 수완이 있어야 하고, 책략이 있어야 하고, 좋은 결과를 말해주는 높은 숫자들을 담은 보고서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신자는 전도를 열심으로 한다.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불쌍한 영혼은 끌려서 어디로 가나? 하나님에게로 가나? 예수에게로 가나?
아니 ‘우리 장로교’로 가고 ‘우리 감리교’로 간다. 때로는 양쪽에서 끌려 그 가련한 양은 갈팡질팡하는 수도 있다. 그것을 없애기 위하여 구역의 설정이 있다.
저기는 네 구역, 여기는 내 구역. 재산분배를 청하는 사람을 보고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고 책망한 예수가 그 구역을 분배하였을까?
슬프게 말하면 오늘날 교회의 신앙은 죽었다. 그 정통이라는 것은 생명이 없는 형식의 껍질이요, 그 진보적이라는 것은 세속주의다.
이제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의 지체도 아니요, 세상의 소금도 아니요, 외로운 영혼의 피난처조차도 되지 못한다. 한 수양소요 한 문화기관이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적어도 기독교만은 형식에 떨어지고 세속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바로 그 형식의 종교와 세속주의를 박멸하기 위하여서가 아니었던가?
이제 다시 그것들과 영합하는 것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를 생명으로 아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에게 절대 복종하고 절대 신뢰하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가 명령하기를 부모나 형제나 처자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라 하였으면 그대로 하는 것이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였으면 그대로 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그저 말로나 외모의 행동으로나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모든 생명을 그리스도에게 넘겨 주는 일이다. 지금까지 ‘자기 표준’, ‘인간 중심’ 으로 살던 것을 ‘그리스도 표준’, ‘하나님 중심’ 으로 사는 일이다. 자기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일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안에 있는 것이요, 밖에 있지 않으며, 양심에 있고 행동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요구 하시는 것은 깊이 뉘우치는 영혼이지 제사가 아니다.
모든 교회 법을 다 지키고, 겉으로 보이는 행동을 선하게 하여도 ‘나’ 를 하나님에게 바치지 않는 이상 신앙은 아니다. 내 영혼이 구원 얻기 위하여, 내 인격이 높아지기 위하여, 내가 영생하기 위하여, 내 가족 내 민족이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아무리 열심이 있고 경건이 있어도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내 재산, 내 세력을 모으려는 것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일지는 몰라도 여전히 ‘나’ 표준, ‘인간’ 중심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처럼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은 없다. 죄란 살인강도를 가리킴이 아니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이 자기 중심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의 신자는 그 거짓 신앙에서 뛰어 나와야 한다. 그 ‘나 표준’ 의 태도를 버리고 그 문화주의 살림을 없애야 한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에 돌리는 하나님 중심의 믿음으로 돌아와야 한다.
불신자에게 회개를 권하기 전에 저 자신이 먼저 회개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바리새 교인더러 천국 문에 서서 자기도 아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한다고 책망하였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떨치지 못하는 원인은 불신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신자 자신에게 있다.
형식주의와 문화주의의 거짓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오늘날의 신자는 역시 천국 문을 가로 막고 서있는 자다.
아아 무서운 일이여! 저희는 빨리 이 무서운 자리를 떠나야 한다. 회개하고, 성령을 고쳐 받고, 성경을 고쳐 읽어!
내 뜻대로 헤매었던 탕자가 돌아옴 같이 살아있는 신앙을 도로 찾아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사실 며칠전에 이분에 대해서 알게되었는데.
너무나 놀라고있습니다. 어쩌면 이리도 같을수가있나요???
우리 골통 노선하고 너무나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저도 한동안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에 동조하고 심각하게 갈등했던때가 있었습니다 사실 교회를 다니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구원과 무관한 것은 사실이고 또 언젠가는 교회의 종말이 온다는 것이 셩경의 가르침(살전 2장, 계시록 등등)이지만 저는 그 때를 우리가 알기는 매우 어렵고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사를 연구해보니 신학적인(신앙적인) 결론은 언제나 하나의 공동체(community)안에서 내려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이 늘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정말 긴 이야기이지만 결론만 한문장으로 썼습니다) 교회의 부분적인 잘못된 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부족한 교회를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용하고 계시는 선교현장이 있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언제나 저에게 신비함 그 것이지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