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교사 심경의 변화
교사생활 초기에는 교단 위에서 보면 선량한 학생과 불량한 학생이 확연하게 나뉘어 보였다. 그리고 선량한 학생은 귀엽게 보이는 반면에 불량한 학생은 아주 밉살스러웠었다.
요즈음에는 선량하거나 불량하거나 모두 한결같이 귀여워 보이며 사랑스러워 보여서 가르치기보다 먼저 어루만지고 싶으니 이제 비로소 교사의 자격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벌써 교사 자격을 상실한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기 어렵지만 심판적 태도가 자취를 감추고 동정과 연민의 정이 나타나게 된 변화의 흔적만은 숨길 수 없다.
교사생활 초기에는 불량한 학생을 단연코 쫓아내는 것이 선량한 자를 위하는 길이요 교육자로서의 사랑이라는 이론도 없지 않았다.
지금은 가르칠 수 없는 인간이라고 발견할 수 없으니 사회와 학생의 질이 향상된 것인지 또는 우리의 판단력에 무슨 결함이 생긴 까닭인지는 확인할 수 없어도 마음 속에 변화가 생긴 것만은 사실이다.
이른바 불량소년과 못 말리는 익살꾸러기들 속에서 속사람 참사람을 발견할 때의 기쁨에 비하면 선량한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도리어 무미건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이미 글자 그대로 죄인의 괴수인데 나보다 더한 죄인이 어디 있다고 쫓아 낼까.
교사생활 초기에는 교사의 학식을 시험하는 듯한 종류의 질문에는 심하게 화가 났었다. 그러나 교사생활 10여 년에 철저히 깨달은 것은 무식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한 것이다.
교사로서 알아야 할 것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알지 못한 자인 것을 심각하게 깨달았으니 이제는 무식하다는 탓으로 학생들에게 괄시를 당한다 하더라도 화를 낼 기력조차 잃어버렸다. 그래서 질문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오직 아는 것은 아노라고, 모르는 것은 모르노라고 대답할 뿐이다. 이것도 교사로서는 부당한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속 마음은 지극히 편하다.
교사생활 초기에는 학생들이 존경심을 표시하나 안 하나가 매우 마음에 걸렸었으나 지금은 전혀 무관심이다. 성서조선을 발간하면서 받은 당치도 않은 모든 치욕을 생각하면 학생들의 무례와 괄시쯤은 오히려 기특한 느낌마저 든다.
예수를 믿기 위하여 이미 받은 창피와 앞으로 당할 모욕을 헤아리면 철들지 않은 어린 학생들의 실수쯤은 문제도 아니다. 또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괄시를 받을만한 인간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사요, 나 자신일 수도 있는데 사람의 존경을 기대하는 것은 스스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일이다. 이도 역시 교사의 도리에서 어그러진 일인지 알 수 없으나 심경의 변화인 것만은 사실이다.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