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름도 없고 능력도 없고 예배당도 없는 일개 무명의 강도사로서

교계의 명 칼럼니스트이자 뛰어난 성경해석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과 도전과 깨우침을 나눠주시는 김삼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존경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개인적인 관계는 없지만 김삼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큰 도움을 받은

독자이기도 하며 기독교계에도 이렇듯이 옳곧게 성경말씀에 충실하고자

고군 분투하심에도 존경과 아울러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더구나 요즘 이슈가 되고있는 여러 사역들을 말씀으로 검증하는

실로 만만치 않은 사역에도 힘을 내시는지라 개인적으로도

무척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제가 김삼목사님의 칼럼중 {새해와 십일조}를 읽고서 많은 고심끝에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고 싶어서 이글을 씁니다.

저는 영성에도 부족하고 현장 사역의 경험도 없는 어린 아이 수준이며 성경

원문에도 근접하지 못하는 어눌한 배움이라서 감히 김삼목사님의 깊은 글에

논리적으로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안에서 말씀하시기를 원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부족하나마 약간의 다른 견해를 올리고자함을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들어갑니다.



먼저 저의 개인적인 입장을 우선 말씀드립니다.

저는 십일조 반대론자는 아닙니다.

또한 폐지론자도 아닙니다.

다만 십일조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하되 일괄적으로

무기명 감사헌금으로 연보함에 자율적으로 믿음으로 참여하기를 주장합니다.

일정부분은 위의 주장을 하시는 분들과 내용상 맥을 같이 한다는것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세부적으로는 무기명헌금을 감사함으로 드리자

하는 것이 저의 견해이며 실제로 하고 있는 중입니다.



김삼목사님께서

십일조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영적/유형적 복과 직결돼 있다.

십일조는 약속된 복의 채널의 하나다.

대언자 말라키의 예언에 나타난 약속이다(말3:10).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제가 좀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약속된 복의 채널의 하나다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장하신 근거를 말라기서에서 인용

하셨습니다. 대부분 목사님들께서 자주 애용하시는 구절입니다.



저는 감히 그 말씀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을 따로 독립적으로 적용을 하더라도 물론 말씀은 능력이며

약속이기에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성경은 나무와 숲을 보아야 한다고 하듯이 앞뒤로 혹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같은 말씀을 보고서도 판이하게 다르게 해석이 나옵니다.

이것은 각자의 개인적인 성향과 지적 영적 수준에따라서 다르겠지요.

또 문자적이냐 영적이냐에 따라서도 다르다고 봅니다.



목사님께서는 말라기3장10절 말씀을 적극적으로 붙드셨습니다.

본문을 한번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개역개정)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표준새번역)



너희는 창고에 너희가 거둔 것의 십일조를 가져와 나의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여라.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라.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가 쌓을 공간이 넘치도록

너희에게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쉬운성경)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당시 부패하였던 제사장들에게 질타하시는 말씀입니다.

거룩하고 흠없이 제단을, 성전을 섬겨야할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제물을 흠이

있는것으로(신경쓰지 않고 혹은 하나님이 일일히 감찰 하지 않는다는...

마치 이방의 우상의 하나로,목석으로 만든 신상의 하나로)

그렇게 하찮게 생각했다는 질책입니다.

습관적으로 하는 예식에 짜증을 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경멸하며 무시했다는 의미의 말라기 선지자의

준엄한 꾸짖음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부인할수 있습니까?

제사장들은 스스로 성결케 하며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섬겨서 백성들에게 본이 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는 하나님의 진노의

호통입니다. 제사장들이 멸시하는 제물과 제사행위가 백성들의 눈에 보여졌고

그것을 따라 행하여서 온 나라가 다 범죄하고 부패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말라기 선지자는 그 잘못을 지적하는 예를 든것입니다.

말라기 1장부터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누가 성전 문을 닫아버려서 다시는 헛된 제물과 분향을 하지 못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백성들의 잘못일까요?



말라기 선지자의 엄중한 꾸중에 제사장들이 회개하고 잘못을 시인하기는 커녕

돌이켜서 언제 어떻게 여호와를 멸시했는지 구체적으로 육하원칙에 따라서

말해보라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말라기 선지자가 분을 삭이면서

미련하고 완악한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친절한 설명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가져오라는 말씀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그동안 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기듯이 그렇게

온전한 십일조를 가져오라는 것이고 그렇게 한번 시험해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온전한 십일조를 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하나님외에 온전하신 분이 있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온전한 것이 있습니까?

만물보다 더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도 없을 뿐더러

온전하게 믿음에 도달 할 수도 없으며 온전하게 선을 행할 수도 없으며

온전하게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온전하게 할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서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자신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우리를 대신하여 흠없는 온전한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온전하지 못하는 우리더러 십일조를 해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요?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사탄을 향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은 무슨의도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께서 설마 말라기 선지자보다 못하십니까?

선지자들이 누구를 증거하나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라기의 십일조를 온전하게 하라는 것이 어떤 의도일까요?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처럼 목회자/설교자는 자신의 처지/입장 때문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강조해야 마땅하다. 라고 말라기 선지자가 주장한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부람(아브라함)에게 너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신

하나님이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복의 근원입니다.

이 하나님의 복이 약속의 자녀인 이삭에게 계승되어서 약속데로 성경데로

모든 선지자의 계시와 예언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복이 되셨습니다.



또한가지,

목사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이라고 하시면서 그 복이

십일조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영적/유형적 복과 직결돼 있다. 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영적/유형적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시점이 다 다릅니다.

이 땅에서 받을수도 있고 내세에서 받되 완전하게 받는것을 저는 믿습니다.



복음이 바로 전해지는 건실한 교회인데도 왜 가난한가? 왜 재정적으로 힘이 없는가?

[강단에서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는 교회는 그 자체가 문제이니, 언급을 않겠다.]

십일조의 복음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십일조가 복음이라고? 그렇다.

십일조는 복된 소식의 하나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이다.

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복음이 바로 전해지는 설교와 강단에서는 십일조를 전하는것이 아니라

땅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인 십자가와 부활하심과 다시 오실 주님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모든 선지자들의 말보다 더 권위 있으신

예수님의 지상 대 명령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또한 사도들과 제자들이 전한 것이 십자가와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이며 그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그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중의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만일 사도들이 말라기서의 십일조가 정말 성도들의 복의 채널이었다고 확신했다면

왜 그런 십일조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것 곧 속을 아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온전하게

아시는 성령님께서 왜 말라기의 십일조를 드려 복을 받으라는 메세지를

신약에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다시 목사님께서 강조해 마지 않는 것을 적습니다.



하늘 대제사장 예수 크리스토, 바로 그분이 지금도 우리의 십일조를 받으신다.

목사님께서는 이 근거를 히브리서 7장에서 찾으셨습니다. 친절하게도 다양한 번역으로 말입니다.



히7:8 한글개역/개정을 보면,

둘 다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받은 자가 받았느니라"고 했다.

상당히 부족한 번역이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돼 있다.
     "사제들도 십분의 일을 받고 멜기세덱도 십분의 일을 받았지만 사제들은 언젠가는 죽을 사람들이고

멜기세덱은 성서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표준새번역은 이렇다.
     "한 편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십분의 일을 받고, 다른 한 편에서는 살아 계시다고

입증되시는 분이 그것을 받습니다."

위에서 표준새번역이 가장 속시원하게 잘 번역됐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목사님께서는 많은 부분을 말씀 한 구절에 집착하신듯 보입니다.



히브리서역시도 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연결해서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감히 목사님의 풍부한 성경 해석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만은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11:25)

저는 이 말씀을 힘입어서 짧은 저의 소견을 올립니다.



율법과 완전하신 새 언약이시며 중보시며

영원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히브리서의

기록 목적이라고 봅니다.



율법이 흠이 있다기보다는

율법만으로는 도저히 사람을 온전하게 살릴수가 없고

도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온전하게 수행할 실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며

다만 율법을 통하여서는 죄를 알게 되어서 결국은 그리스도앞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이라는 것인데 그것을 마치 지켜야만 한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고에서 해방시켜준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해방과 자유함을 예수께서 다 이루셨고 완성하셨기에 더이상 구약의 율법에 의해

매일 드려지는 제사법은 이제 필요 없다는 선언입니다. 더구나 이방인들에게

이 보다 더 기쁜 소삭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이

수 천년동안 율법에 매여서 신음하고 고난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아래 들어오질

못했었는데 언감 생심 이방인들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지겠습니까?



율법을 안다고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도  그 율법으로는

도무지 구원을 얻을 수가 없어서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율법을 무효하게 할만한

놀라운 하나님의 한 의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입니다.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을 히브리서 기자가 증언하는 것이 기록 목적이며 모든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서의 내용입니다.



십일조가 복음이 아닙니다.



강단에서 십일조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참 교회라면

마땅히 복음으로 복음에 이르게 하는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죽하면 이렇게 탄식했으며 결심했겠습니까?



세상이 자기의 지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어리석어 보이는 말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고전1:21~23)



더 기가막힌 고백은요,



성도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였을 때, 웅변술이나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기 때문입니다.(고전2:1,2)



또 기회 있을때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6:14)



저는 참 복음은 이렇게 사도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복은 십자가를 알고 믿는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세상 복락보다는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로 가는 자들입니다.



다시 목사님의 주장을 봅니다.



그리고..온전한 십일조는 믿음의 시금석이기도 하다. 십일조를 제대로 안 한다면

그만큼 재정적 미래에 관해 불안한 사람들이다. "[십 분의 일을 바치고도]

다 바치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란 식이란 말이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고 성경이 밝혀준다.  



일견 매우 타당한 설득력을 갖고 계심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온전한 십일조는 앞에서 말라기서를 통해 개인적으로 불가하다고

밝혔기에 통과합니다. 인정하시든 안하시든간에요.



목사님은 믿음의 시금석을 십일조를 제대로 하는것으로 생각하셨고

저는 신약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대신하여서 십자가를 자랑하는것을

시금석으로 삼는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아브람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것을 인용하시는데

그것에 대한 저의 짧은 소견도 곁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소돔성에 살고 있던 조카 롯의 상황을 보고서 인정많은 아브람은

앞뒤 생각없이 자신이 길르던 종자 318명을 데리고서 롯을 구해보겠다고

쫒아 갑니다. 물론 당시 거주 하던 에스골과 마무레와 아넬은 동맹을 맺었기에 함께

달려 갔습니다. 상식적으로 거대한 연합군에게 맞써서 이길수가 있을까요?



당시에 시날 왕 아무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창14:1)

이렇게 다섯 왕의 연합군과 싸워서 죽는것이 당연한 싸움임에도 성경은 대승을 거둘 뿐 아니라

조카 롯과 식구들과 전리품까지도 취해서 돌아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당시 패배하여 수모를 당했던 소돔왕이 나와서 아브람을 영접하였고 멜기세덱도

영접하였습니다. 멜기세덱이 증언하기를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20)

이렇게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승리를 주셨다는 증언에 아브람이 감사로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것을 지금의 십일조의 기원으로 까지 삼으신것을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더 흥미로운 것은

김삼목사님께서 성경 말씀을 근거로 자주 강조하시는 내용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물질의 복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일정부분 맞고 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공통적인 증언은 세속적인 복보다는 당연히 영적이고 신령한 것을

강조하였기에 그렇습니다. 위엣것을 취하라 하셨습니다.

땅에것을 탐하며 우상 숭배하며 물질적인 것에 착념하면 그것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진노가 내린다고 경고까지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늘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옛 사람은 죽었으며,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이 감춰져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영광 가운데 그분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골3:1~4)



일단 아브람도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물질적인 것이 복이 아니라는

근거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그 때에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붙잡혀 갔던 사람들만 돌려

주시고 재물은 다 가지십시오.” 하지만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나의 손을 들어 약속합니다.

나는 당신의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도, 신발 끈 하나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내가 아브람을 부자가 되게 만들었다’는 말을 당신이 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젊은이들이 먹은 음식 말고는 그 외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습니다. 다만 나와 함께 싸움터에 나아갔던 아넬과 에스골과 마무레의

몫만은 그들에게 주십시오.”(창14:21~24)



이것은 응당 받아도 될 것이지만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세속적인 것 즉 소돔왕의 것을

구별한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복에 대한 아브람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롯과 땅을 나눌 때에도

거칠고 척박한 땅을 감사함으로 받은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이기에 별다른 것을

원하지 않았고 롯은 소돔의 풍요함을 원햇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진정한 복은 당연하게도

영적인 복이며 위로부터 주시는 신령함이 복이지 물질적인 부요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께서는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신자라면 물질적인 복을 받아서 누려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을 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이 사실은 가난하시지 않았다는 주장도 설득력있게

하셔서 개인적으로 당혹스럽게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지 않으셨다는 근거를

동방박사가 드린 황금과 몰약과 유향이라 하셨고요.



그렇지만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어린시절을 애굽에 도망하셔서 살아야 한것을

간과하신듯 합니다. 헤롯의 눈을 피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망명생활을 해야 할

그 시간들을 생각하신다면 결코 부유하게 사셨다는 해석은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부유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해도 역시 섬기는 손길들이

있었다는 것은 동의 합니다. 가룟 유다가 돈궤를 관리한것이 증거가 되겠구요.

그러나 그 돈궤가 과연 넉넉했을 것으로는 역시 의문입니다.



그리고 꼭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고 나눴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지금쯤이면 굶어서 죽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고 싶습니다.



굶주리시고 갈하셨던 예수님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4)



이 말씀은 신명기에 모세의 설교로 기록된 것이고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난 후에 어떻게 살것인가를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게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먹이셨는가를 증거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부자들에 대한 경고가 야고보서에 유독 많이 기록되었다는 것도 살펴봐야 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에게 세상의 재물에 마음을 두는 자들에게 교회 안에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무시하는 자들에게 엄청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가르치기를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의 풍요로운 삶보다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과 고난을 받는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또한 유리 방황하며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가야할 본향을 소망했으며 믿음으로 이겼노리는

간증들이 수두룩합니다만 부자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은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부한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구속사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드시고 번성케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박국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거둘 것이 없고,

밭에 거둘 곡식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더라도

나는 여호와 때문에 기뻐하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겠습니다.(합3:17,18)



이제 마무리로 들어 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작별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신약성경을 보면 어느곳에서도 십일조를 해야 복을 받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진정한 복은 예수 안에 있는 복입니다. 영적인 복입니다.

이것을 강력하게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우리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 즉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1~5)



분명하게도 성경은 믿는자들이 세상에서 부하게 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멸시와 가난과

고난을 당한다고 합니다.



누가 돈이 필요 없다고 합니까?

그러나 돈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정말 돈으로만 살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크고 높은 그 뜻을 어떻게 우리가 다 알수 있겠습니까만

하나님의 자녀라 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으로만 간다는 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는 힘이 물론 돈입니다.

돈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과연 돈많은 세상이 할 수 있는게

무엇입니까? 돈 많은 교회가 하는일이 무엇입니까? 제가 시기하고 질시한다해도 할말좀 해야 겠습니다.

십일조를 안해서 십일조 복음을 안가르쳐서 교회가 어렵다고 하는군요.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사도들은 전부 헛수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목숨걸고 십자가를 전하고 예수가 그리스도라 증언하느라 자신을 돌보지 않고

성령에 의하여 달려갔습니다. 교회건축하느라고 성도들에게 십일조 자세하게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성도들에게 진정한 복을 받게 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왜 죄인이며

왜 죽을 수 밖에 없으며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미련하고 쓸모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그 곳에서 온갖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발가 벗기시고 부끄러움을 당하셨는가를 가르치십시오.

십일조 정성껏 드려서 쌓을 곳이 없는 부자 교인들 만들라고 하지 마시고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서 이스라엘앞에서 증거한 복음을 가르치시기를 권합니다.



십일조가 복음이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지금도 받으신다고 주장하십니까?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진노를 받고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번죄함이 백성들의 부패와 타락함이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의

위선과 탐욕때문임을 왜 모르십니까?

그것이 결국은 돈 때문입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게 되면 결국은 돈이라는 맘몬 우상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려워서 할 일을 못한다고요?



교회가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구제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물론 돈에 대하여 비유를 자주 하셨습니다.

그것과 십일조가 무슨 상관 있습니까?



저도 십일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받아서 부자될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모든것이 하나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는 내지 말던지 내던지 해서 주신 복을 받아라

나는 믿음으로 내서 주시는 복을 영육간에 다 받겠고 너는 내기 싫음 내지 말아서

거룩하게 가난하게 살아라 이런 빙신들아~

이렇게 니 맘대로 해라는 식이 목회자로서 생각할 수 있는 말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모르면 차라리 난 잘 모르겠으니까

믿음으로 하시든지 성령의 감동으로 자유롭게 하십시오 라고 해야 진실하지 않습니까?



십일조가 복음이라니오?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흥분해버렸습니다. 거칠어서 죄송합니다.



강단을 책임지는 지도자라면 정말 진실하게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들이 지지하고 듣기 좋아서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듣기 거북하다해서 말씀을 피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모로 부족해서

제게 깨닫게 해주시는 만큼 보여주시는 것만을 전하고자 합니다.



너무 두서없는 긴 글입니다.

혹여라도 글 내용가운데 실수로 김삼 목사님을 비방하거나

비난하거나 명예를 훼손한 부분이 있다면 엎드려 용서를 빕니다.

그럴 의도는 없다 하더라도 글의 흐름상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글을 올린 이유는 목사님의 글에 대한 다른 견해를 올리는 것이 목적이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아무리 하찮은 졸글이지만

이 시대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고 또한 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것입니다.

아래 부족한 저의 고백을 끝으로 전하면서 두서없는 글을 맺습니다.



오!
거룩하신 주님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며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도록 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며
배고프시며
목 마르다 하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외치시며

물 한방울
피 한방울
남기지 아니하시고
그 몸을 찢기시며

나 같은 죄악 덩어리를 살리시려

살릴 가치조차 없는 무가치한 죄인을 대신하여

그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




어찌하여

아버지라 그 순간 부르지 못하시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 통곡하신 예수여

그 순간은

그 순간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인자가 아니며
오직

죄인들의 더러움을 온 몸으로 담당하신
죄인으로 달리신 예수여

어찌하여
아버지여

이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리 말씀하실 때처럼
아버지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라 부르셨던 주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심은
나의 죄때문이었습니다.

내 죄 때문에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시고
그렇게 절규하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이 죄인이
이 죄인이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 십자가는
나 같은 죄인마져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도록 허락 하셨습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아버지를 영원히
영원히 부르며 찬양합니다

아바
아버지!!!!!!!!!!!!!!!!!!!!!!!!


2008-08-06.주님과함께



김광찬

2008.08.07 05:13:52
*.248.124.155

마지막에 고백처럼 쓰신 구절구절들이 제 영혼에 울림이 되고 눈물이 됩니다. 아멘
저 또한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 수 있길 기도드립니다.

김광찬

2008.08.07 09:28:19
*.248.124.155

십일조에 대한 제 생각은(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거긴 하지만요)
예전에는 저도 십일조를 안하면 죄를 짓는거다 또는 축복을 받기위한 수단으로 이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아 드리고 있습니다.
재물(돈)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신 재물(돈)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것임을 완전히 시인하면서 드리는 거죠. 세상사람들은 지금 이순간에도 재물(돈)이 자기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자기 삶을 자기가 세운 목적대로 사는데 필요한 수단으로 여겨서 더 많이 모으는데 초미의 관심을 두고 살지만, 저는 하나님이 저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고
내 삶이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기를 소망하며 살기에 보면 볼수록 완전히 반대의 길을 가고자 하는(가고있는) 느낌입니다.

주님과함께

2008.08.07 17:59:01
*.7.13.27

긴 글읽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워낙 글쓰기가 정리 정돈이 안되는 실력이라 횡설수설합니다~

다시한번 글을 쓰게된 동기를 말씀드리자면
십일조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가 아니라
그것은 당연히 믿음이 들어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십일조를 반대하거나 폐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된 원인이
교회 강단에서 일부 목회자들의 강제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은근한 메세지가
아마도 반발의 한 원인이 아닌가 합니다.

당연히 교회의 재정의 투명성도 문제가 된것이겠고요
그것도 십일조를 믿음의 기준으로 호도하는 분위기에서
신앙이 연약한 성도들이 시험꺼리가 되어서 정작 예수님의 참 자유함을 주신 은혜의
복음이 율법주의로 변질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합니다.

교회재정과 성도들의 복 운운하는것이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양 호도되는 것에 대한 반대일 뿐입니다. 한가지 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라면
십일조를 때는 그 돈의 출처가 과연 정당한 노력과 땀흘려서 번 돈인가를 살피지 않는점입니다.
이것이 묵인되는 상황하에서 보란듯이 내는 십일조가 과연 하나님께 상달될까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 뭐라 할 순 없겠지만
마치 정당하게 십일조를 드렸으니
하나님께서는 자동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육십배 백배의 풍성함으로
넉넉하게 채워주시는 자동 응답기나 혹 현금 인출기로 오용을 당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드리는 분들이야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것을 믿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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