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 달란트의 비유는?

조회 수 1378 추천 수 40 2008.12.26 23:19:41
"또 하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마25 : 14)-표준새번역.



달란트 비유는 이미 교회생활에 익숙하신 분들에게는 혹은 모태신앙이라든지 어릴적 부터 교회와 인연을 맺어서 다닌 신자들이라면 줄줄 외울정도로 잘 알려진 유명한 내용입니다. 특별히 직분자를 임명할때나 한해를 마감하는 시기에 매우 유효하게 사용되는 인기있는 구절입니다. 여전도회나 남전도회나 청년회 헌신 예배때에도 단골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보통은 달란트비유에 한해서만 이해를 하고 곧바로 적용을 시켜버리기 때문에 주님께서 정작 원하신 의도를 충분히 해아리지 못한것도 사실입니다.



단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그것을 땅에 묻어 두었다가 나중에 주인이 와서 정산을 할 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과 함께 엄청난 저주를 선고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성도들에게 호소하기를 두달란트 다섯달란트 받은 종들처럼 착하고 충성되어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하고 마무리를 해버립니다. 자연스럽게 교회에 열심히 모이고 충성하고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헌신하는 성도가 믿음이 충만한 성도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헌금이나 십일조에 대하여서 인색하지 않게 낸다면 교회로서는 정말 vip 성도라고 존경받을 것입니다.



더구나 적절하게 예화를 인용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해마다 연말에 각종 메스컴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연예인들입니다. 각가지 명목으로 시상식을 치룹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인 샘인데...더구나 주일학교에서는 어떤식으로 가르쳐지고 교육이 되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오늘 고등학교 2학년 아이와 우연히 대화를 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 나왔기 때문에 제가 좀 과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가난도 죄다' 라는 말을 너무나 익숙하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물론 이해하고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저변에는 그 학생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가난에 대한 부정적인 사상을 주입식으로 혹은 부모로부터나 주위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 학생이 이해할지는 모르지만 제가 이렇게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만 본다면 조금은 곤란하단다. 왜냐하면 인생을 살다보면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고나 질병으로 사회생활과 경제적인 삶을 할 수 없을 경우가 있기 때문인데 만일 가난한것이 죄라면 그런사람의 경우에는 어쩌란 말이냐 하였습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이 사회 구조적으로 시스템 자체에서 도저히 가난을 극복할 수 없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가난이 죄라면 반대로 부자는 무죄라는 공식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르게 살다가 구조적인 것때문에 가난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불의한 재물로 부자가 되는것은 악하다 하였고 의로운 삶 때문에 가난한 것이 복되다고 가르칩니다. 이미 우리 사회구조의 사고가 이렇게 가난은 곧 죄 혹은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이 되었기에 더욱 무한 경쟁사회로 미쳐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와도 무관하지 않기때문에 더욱 답답한 것입니다. 오늘의 단란트 비유역시 교회안에서 잘못 이해되는 바람에 성도가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방향성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오직 성공주의로 끊없이 머리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크고자 하거든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라 가르치셨건만 오늘날에는 무조건 교회 이름으로 잘나야 하고 출세해야 하고 성공해야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라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달란트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먼저 확인해야할 것은 마태복음 25장 전부를 살펴서 그 관계속에서 살피지 않는다면 정말 주님께서 의도하신 본뜻을 놓칠수가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달란트가 각자의 재능이나 은사나 어떤 능력에 대한 비유라고 보는것은 부분적으로는 맞을수 있겠지만 성경의 구속사적인 관점으로는 전혀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만 달란트 비유에 대한 설교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몇편정도만 살폈는데 그 중에 인문학적인 영향을 받으신 목사님의 설교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굉장히 진보적인 성격의 설교였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것은 주인이 누구냐하는 대목입니다.



보통은 주인을 하나님혹은 예수님을 가르킨다고 해석을 하는데 그렇지 않고 단지 종들의 부유한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달란트 받은 종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해석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주인이 단지 부자라고 가정을 하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주인은 불의한 주인이라는 가정입니다. 그러니까 이 악한 종은 예전에는 주인이 어떤 사람인줄 모르고 충성해서 인정을 받았지만  나중에 눈이 떠지니까 자기가 얼마나 주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많은 불의를 행했었는가를 깨달았다는 것이고 그래서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신앙의 눈이 열리니까 기존의 보수적인 신앙인들처럼 무사 안일하게 주인에게 충성하려고 이웃들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결심이랍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불의한 청지기처럼 지혜롭게 빚진자들의 채무를 탕감해서 노후를 대비하는 실천적인 삶에서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이제는 바르게 살며 결심하고 주의 뜻을 분변하여 살자는 것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언뜻 들으면 공감이 가지만 그러면 예수님의 달란트에 담긴 깊은 의미가 실종되어 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주님께서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라는 선고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달란트 비유에서의 주인은 예수님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고 마지막 날에 심판의 주권자이심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비유는 첫장의 '열 처녀의 비유'와 동일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로 구분하시면서 영생과 영벌에 대한 뜻을 밝히 암시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달란트 비유에서 가르치는 것은 크게 보면 종말론적인 것이지요.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에 관한 비유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개역개정) ""그런데, 하늘 나라는 이런 일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처녀 열 사람이 등불을 마련하여,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표준새번역)  하는 것과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내용입니다. 달란트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제자들과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지혜롭게 준비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 생각이 100% 정확하다고 장담할수는 없지만 25장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그렇게 보는것외에 또 무엇이 있을수 있을까요?



물론 신학자들의 눈으로 제 졸고를 본다면 비평할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논리적이고 틀이 잘 짜여진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주님께서 열처녀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를 하신 이유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고 죽으셔야 하고 다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하고 부활 후 승천하셔야 하고 반드시 다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과 제자들의 사고가 자기들의 생전에 주님께서 오실것이라고 기대하였기 때문에 오해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열명의 처녀는 곧 주님을 맞이할 신부를 의미합니다. 신랑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처녀들이 있었는데 똑같이 등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더디 올줄은 몰랐습니다. 똑같이 몰랐습니다.



등불을 준비한 다섯과 기름을 예비한 다섯처녀의 자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것은 분명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며 특별합니다. 그러나 약속의 시기와 때가 곧 올것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마지막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주님의 말씀을 비추어서 살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 속히 오신다 하셨으나 우리의 시간표와는 너무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원하는 좋은 때에 오시는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에 오십니다.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여야만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예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름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여러가지 해석들이 줄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달란트 비유에서도 분명 주인이 타국(먼 나라 = 십자가,승천)에 가서 오랜 후에 돌아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종들은 다시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로 가야 합니다. 열처녀 역시 신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달란트가 얼마며 그것을 어떻게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겼는가에 치중하기 보다는 세 명의 종들의 마음과 태도에 관한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동의하시는 것은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예수님과 성도와의 바른 관계라는데 이의는 없을 것입니다. 먼저 이러한 참된 관계성에서 신앙의 모든 행위가 출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잘못된 관계로 시작을 하며 열심을 내기 때문에 부작용이 나고 교회와 성도들의 삶의 내용과 방향성이 비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것은 호세아서에도 나오지만 이스라엘을 아내로 인정하시겠다는 서약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종으로서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며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며 철저하게 범죄한 자에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관계였습니다. 율법은 단지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달래고 심판에서 어떻하든지 면해보려는 수단으로서 남용되었던 것이고 제사장들은 그것을 잘 깨우쳐 주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백성들을 인도해야 할 사명을 상실한체로 그것을 악용하였다는 것입니다. 만일 제사장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알고 누렸더라면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목시키기 위하여 열심을 내었을 것입니다만 본인들도 종으로서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짐승의 피로 나아가기 때문에 답답하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하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단지 형식이나 어떤 행함으로 맺어서 만일 그것을 수행하면 벌을 면하고 못하면 쫒겨나는식으로 생각하시는지요? 오늘날 교회역시 그런 면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교회안에서 분명하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르쳐야 합니다만 그것이 뒤로 밀리면서 봉사와 충성과 헌신을 가르치게 되니까 오히려 주님과의 관계가 동상이몽의 관계로 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자꾸만 교회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찬양잘하고 기도 열심히 하고에다가 맞추니까 상대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성도들에게는 알수 없는 죄책감과 무거운 심리적인 중압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두 달란트 맡은자와 다섯 달란트 맡긴자를 인정하고 칭찬하심에다가 초점을 맞추게 되면 결국은 교회 안에서 봉사못하고 주일성수 반듯하게 못하고 새벽기도 못하는 성도들은 악하고 개으른 종이 되어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으로 내어 쫒길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목사님들과 사역자들과 장로님들은 언제나 교회에서 당연하게도 주일성수 잘하고 새벽기도 금식은 물론이며 찬양대원들은 얼마나 뿌듯하게 자랑스러워할 것이며 천국에서의 상급은 물론이거니와 이 세상에서도 대접을 잘 받는 복을 받았다고 착각할게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한가지 오해하지는 말아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새벽기도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금식기도가 문제가 아니라 교회충성하는것이 문제가 아니라 십일조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행한것으로서 마치 모범적인 신앙인이 되었다고 하는 착각과 오해를 안타까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눈에 보이는 행위들이 믿음의 기준으로 매겨지는 교회 현실속에서 정말 주님과의 인격적인 바른 관계가 성립할수 있을까를 염려하는 것이지 주님과의 신실한 관계속에서 주일을 감사하게 지키며 은혜로 드리는 십일조가 무슨 문제가 될 것이며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새벽 기도가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람은 겉모습과 외모로 판단하지만 주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달란트 비유는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자세가 주님과 매일 동행하는 삶이냐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능력과 달란트를 남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온전하게 알고 신뢰하는 자세로 이 세상의 풍조에 흔들리지 않으며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견디며 기다리는 삶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일 달란트가 어떻게든 열심을 내서 전도를 하고 복음전파를 하는것으로 이해되어 버린다면 거지 나사로와 같은 인생은 어떻게 무슨 소망을 품고 살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갈 길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좁은 길로 가기를 힘쓰라 하셨습니다. 찾는이가 적은 길이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할지라도 주님께서 도무지 모른다고 하신답니다. 열 처녀중에 다섯 처녀역시 주여 주여 열어 달라고 울부짖었지만 주님은 모른다고 하십니다. 많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는 열심으로 무수한 짐승의 피로 희생을 바쳤지만 모른다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문화가 급속하게 교회를 장악한 이 시대적인 어두움 속에서도 오직 주의 말씀을 간직하며 그 말씀을 따르며 가르치는 이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입니다.



양과 염소로 나누시면서 도무지 모르는 자들이라 하셨는데  그들이 누구일까요?

그 때에 임금은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아는자들이 누구일까요?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양과 염소로 나눈 이들역시 자기들이 한 행위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의인이라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계산이나 방법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했었기에 마치 주인의 소유를 맡은 청지기처럼 주인의 눈치때문에 일한 것이 아니라 누가 보던 안보던지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인을 기다리며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악하다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이미 그 마음속에 주인과의 관계가 단지 종과의 관계이며 언제든지 자기 이득을 위해서는 배반도 할수 있는 사업적인 관계였다는 뜻입니다. 주인의 자세지만 진정한 주인이 주님이시다는것을 인정하고 사는 사람과 주인이 오래동안 안보이고 오지를 않으니까 주인이 죽었거나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관계입니다.



이 시대속에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내 교회. 내 교인. 내꺼라고 생각하며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자기들 살 궁리는 다하고 심지어는 세습도 부끄러운줄 모르면서 당연하다고 정당화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틀린것을 틀리다고 말하지 못하고 아닌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분명 성경은 잘못이라 밝히건만 자기는 아니라고 믿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칭 축복받은 종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가까운 주변에 굶주리고 소외당하는 이웃들에게 전혀 눈길한번 주지 않으면서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복을 맘것 주는 종들이 많습니다. 말세의 현상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어떻게 주님과의 바른 관계속에서 살아야할 것을 진솔하게 가르치기 보다는 오로지 주일성수에 목메달고 교회건축에 혈안이 되고 부흥과 성장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들에게 과연 주님의 십자가와 좁은 길른 어떤 의미이며 좁은 길은 어떤 길일까요?



야고보 사도의 일성은 어떻게 해석을 할까요?

부자들은 들으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부르짖으십시오. 여러분의 재물은 썩었고, 여러분의 옷가지는 좀이 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그 녹은 장차 여러분을 고발하는 증거가 될 것이요, 불과 같이 여러분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날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꾼들의 아우성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어갔습니다.(약5:1-4)

진정한 의미의 달란트의 비유를 묵상하시고 주님과의 신실한 관계속에서 열매를 맺는 삶이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곧 주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살아내는 싸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능력이나 방언이나 기도응답을 초월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비록 더디오실 지라도 지금 내가 살고있는 그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며 주의 뜻에 반응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것은 미련한 길이며 어리석게 보이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길입니다. 지금 이라도 돌이켜서 그길을 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주님. 은혜를 주셔서 진리로 이끄시어 바르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2008/12/27. ⓒ 주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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